김중업

 

한국의 유명한 건축가 가운데 한명을 꼽으라면 나는 김중업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올림픽 상징조형물인 평화의 문 등을 설계한 건축가 김중업은 건축가 기수근과 많이 비교되어 집니다. 두 사람의 건축이념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김중업은 그의 스승이었던 프랑스의 유명 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말년에 보여주었었던 조형에 초점을 맞췄던 반면, 김수근은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사랑방이나 마당처럼 눈에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리삶에 여유를 주는 공간에 주목하였습니다. 이들 둘은 모두 여태 한국의 현대건축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지평을 연 거장이라는 점에는 틀림없습니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하였습니다. 1922년 평양에서 5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평양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41년 일본의 요코하마 공업고등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게 됩니다. 그리고 8.15광복 이후에 서울대 공과대학 조교수로 1946년에서 1952년까지 있었습니다. 그당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1952년에 유럽에 진출하여 유명한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연구소에 들어가 그의 밑에서 4년간 수련을 거치고 1956년에는 한국의 홍익대학교로 들어와 건축미술과 교수로 있게 됩니다. 그 해에 그는 김중업 합동건축연구소를 세우고 연구소장이 됩니다. 그리고 또 1956년에서 1965년까지 10년동안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으로 있었습니다.

 

1971년에서 1978년까지는 프랑스 파리 그리고 미국 프로비던스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1972년에는 파리건축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1971년에서 1975년에는 프랑스 문화부의 고문건축가로서도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리고 1976년에는 미국 로드아일랜드 미술대학의 교수로 그리고 하버드 대학교의 객원교수가 되는 등 유럽은 물론 미국에서도 큰 활약을 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 대사관, 미스 반데어로에의 시그램 빌딩에 영감을 얻어서 삼일빌딩을 설계하게 됩니다. 그 밖에도 서강대 본관, 부산대 본관, 서울 동대문운동장역 부근에 있는 서산부인과, 유엔기념공원 정문, 올림픽 상징조형물인 평화의 문등을 설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이 계속 장미빛이지는 않았습니다. 건축가로서 승승장구하던 김중업의 삶에 1970년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와우아파트 붕괴 당시에 옛 광주단지 현재는 성남시인 곳의 무분별한 도시개발정책을 비판하다가 1971년 우리나리에서 강제 추방 당하여 프랑스에서 도피생활을 하여야만 했습니다. 1976년에 영국으로 귀국할 때 까지 그의 도피생활은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1988년 5월에 건강악화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최근에 김중업이 설계한 한국건축의 대표작인 주한프랑스대사관의 신축 계획이 발표되었습니다. 얕은 구릉 위 한옥 처마 형태의 콘크리트 지붕으로 되어진 건물 두동이 정차처럼 얹혀 있는 모양을 한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마치 콘크리트 건물인데도 외씨버선 코 닮은 우리 전통의 선이 절묘하게 보여집니다. 도심속 오아시스 마냥 서울 서대문구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는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김수근과 함께 한국 건축역사를 이끌었던 인물의 우리 근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1980년에 조선일보가 실시하엿던 한국 50년 걸작 건축물 20선에서는 김수근이 설계한 공간 사옥과 함께 1위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사라질 뻔했던 그의 건축물이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어지고 신관까지 증축하여 재탄생합니다.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대사관 신축계획을 발표합니다. 건물의 설계는 2014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건축전의 황금사자상 수상자인 건축가 조민석과 재불 건축가인 윤태호가 공동 설계를 맡아 2019년 여름까지 완공할 예정입니다.

 

그는 또한 굵직굵직한 그의 작품들 이외에도 서울 곳곳에 단독주택을 남겼습니다. 늘 "집은 아름다워야 하고 정성어린 공간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던 그의 철합이 반영되어진 주택들입니다. 그가 설계한 단독주택들은 작고한지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화두 되어지고 있습니다.

 

서울시 성북구 장위동 일대에 위치한 2층짜리 단독주택이 그 주인공입니다.

 

뉴타운으로 지정되었다 해제된 이 일대에는 2015년 부터 노후주택 개선을 위한 도시재상사업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하얀 담벼락에 둘러싸인 이 주택은 1970년에 준공되어 근 50년 가까이 묵었지만 1986년 건축가 김중업의 손을 거쳐 리모델링을 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인지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서울시와 성북구청이 지난해 9월에 14억 800만원을 주고 매입하기 전까지 사람이 거주하였다고 합니다. 원래는 김중업이 직접 처음부터 설계했다고 사람들은 추측했지만 설계도면을 찾을 수 없어서 그가 리모델링 사실만 확인이 되었습니다. 

 

건축가 김중업의 수석제자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건축그룹 칸의 대표인 곽재환은 말하길 "뼈대는 그 당시의 전형적인 주택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세세한 곳에서 선생님의 건축언어를 찾아볼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온실과 홈통등은 여느 다른사람의 작품에서는 볼수 없는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그 주택은 현재 "김중업 건축문화의 집"으로 이름이 붙여져 매주 금요일 주민들에게 개방되어지고 있습니다. "주민공동시설"로 사용되어지기로 결정이 끝난 상태이며 그의 제자인 곽재환 대효가 차후 그 건축물의 활용방안을 논의 하고 있는 중입니다. 건물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작은 도서관이나 작품홍보관 등으로 활용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 사람들의 의견입니다. 성북구청의 관계자는 "개방디어진 주택을 본 주민들이 집이 너무 아름다워서 보존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많이 내놓고 있어서 내부만 손을 대는 방향으로 윤곽을 잡고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건축가 김중업은 그 밖에도 현재는 카페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연희동 주택, 방배동, 한남동, 장충동 등 서울의 곳곳에 10개 안팎의 주택을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지방자치단체에서 이러한 것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가 이미 일부는 벌써 철거가 끝난것으로 알려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한국 현대건축사에 길이 남을 건축가 김중업의 건축물들이 충분히 보존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도시재생의 한축으로 보존하면서도 살아있는 공간으로 활용할 방침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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