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원전 220년 진시황(秦始皇, BC 259~BC 210)은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통합된 방어 산성을 쌓기로 하였습니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축조는 그 후 명나라 시대(1368~1644)까지 계속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장대한 규모의 군사시설물  되었습니다. 이는 역사적· 전략적으로 중요한 성벽인 동시에 건축학적으로도 탁월한 유적인 것입니다. *

 

                                               

 

 계에서 가장 긴 인공 건축물로, 가장 오래된 부분은 기원전 221년에 축조되었습니다.

 만리장성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정말로 우주에서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대단한 건축물 중 하나이다. 세계에서 가장 긴 인공 건축물인 만리장성은, 동쪽의 로프 누르에서 서쪽의 산하이관까지 중국 북부를 따라 약 6,350㎞나 뻗어 있습니다.

기원전 221년, 중국이 최초로 통일되었을 때 새로운 진 왕조의 황제는 북쪽에서 흉노족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성벽을 축조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때의 성벽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아주 적은 사료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가장 대규모였던 축조 단계는 명나라 때로, 15세기 후반이었다. 명나라 황제들은 호전적인 이웃 몽골 족을 막기 위해 성벽을 건설하기로 결심했던 것이었습니다. 성벽이 놓이는 지역에 따라 그곳에서 구할 수 있는 자재에 따라 건축 기법은 다양하지만, 벽돌과 석재를 혼합한 구조가 가장 흔했습니다.    성벽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망루가 세워졌으며, 매우 정교한 통신 체계 덕분에 적군의 움직임을 감시할 수 있었고, 성벽 그 자체도 지원군이 그 위로 달려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어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적군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성벽에 배치되는 주둔군들을 수용하기 위해 큰 요새와 병영 또한 지어졌습니다.

중국이 결국 북쪽의 만주족에게 정벌당해 1644년부터 청나라 왕조가 형성되면서, 벽은 사용되지 않고 방치하게 되었습니다. 청나라의 영토는 만리장성보다 더 북쪽으로 뻗어나갔으므로 이러한 방어벽은 거의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성벽의 일부는 잘 보존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풍상에 침식당하고 지역 주민들이 건축 자재로 쓰기 위해 뜯어간 끝에 현재 매우 열악한 상태입니다.

 

 달에서도 볼 수 있는 장대한 건축물                                                                                        

지구상에 존재하는 유적 중에 최대 규모의 유적을 들라면 단연 만리장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동쪽 하북성 산해관에서부터 서쪽 감숙성 자위관에 이르기까지 주요 부분의 길이만 3,000킬로미터로, 이는 한반도의 세 배가 넘는 거리다. 또한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만리장성의 흔적을 모두 합치면 총 길이는

무려 1만 2,000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세계 최대의 건축물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장대한 건축물은 어떤 왕이나 제후 한 사람 생각에서 비롯되었지만, 한 세대 만에 축조된 것은 아닙니다. 중국 역사 속에 등장하는 여러 왕들이 외적과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몇 세대에 걸쳐 만리장성을 건설했던 것입니다. 만리장성이라는 말은 사마천의 『사기()』에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서 사마천은 진시황제가 쌓아올렸던 만리장성이 '1만여 리'(1만 리에 가까운)의 길이를 자랑했다고 기록해놓았습니다.

 

2천 년 동안 계속 만들어진 건축물

만리장성의 기원은 B.C. 7세기 전후의 춘추·전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중원 지방에서 군웅할거하던 여러 나라는 자국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중요한 지역에 성벽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 조(), 진()은 북쪽 흉노족의 침입으로부터 영토를 지키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기도 했습니다.

B.C. 221년에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자 전국 시대 때부터 존재했던 각지의 성벽을 하나로 통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각지에 흩어져 있던 장성을 연결함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방벽이 만들었던 것입니다. 만리장성의 기초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B.C. 133년 이후, 흉노족의 침입이 다시 활발해지자 한() 무제에 의해 장성의 복원과 확장이 이루어졌고, 무제는 장성 각지에 봉화대 등의 연락망을 설치하게 하고, 방어체제를 한층 더 강화시켰습니다.

그 후 계속적인 수리와 확장이 이루어진 만리장성은 1368년 명()의 태조 주원장이 현재의 북경 주변까지 새로운 장성을 건설하여 확장시켰으며, 1567~1572년에는 융경제()가 472개의 파수대를 설치하여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실로 2,000년 이상의 긴 세월을 거쳐 완성된 만리장성은 그 대부분이 명대()의 것으로 진시황제 이전에 건설된 장성은 현재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군사 방어시설로서의 만리장성

만리장성은 평화로운 시절에는 교역시 발생하는 관세를 거둬들이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유사시에는 방위의 필수 요소인 성벽으로 기능했으며, 병사들의 군사 거점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또한 봉수대는 적의 침입이나 긴급한 상황을 통보해주는 유력한 통신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성벽의 높이는 평균 7.8미터이며, 폭은 5~10미터로 간선도로 역할도 하기도 했습니다. 즉, 자재 운반과 군대의 이동용 통로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진()·한() 시대에는 판과 판 사이에 흙을 집어넣어 위에서부터 굳게 하는 판축공법()을 사용해서 대부분의 성벽을 축조했습니다. 그리고 명대에는 벽돌과 석탄을 사용해서 쌓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만리장성은 막대한 인적 자원과 자재가 투입된, 중국 왕조의 강력한 권력을 엿볼 수 있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중국인들이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방어용 성벽을 유럽인은 ‘중국의 성벽(Wall of China)’ 혹은 ‘대성벽(Great Wall)’이라고 부릅니다. 탁월한 성벽 구축의 역사는 춘추시대(BC 722~BC 481)와 전국시대(BC 453~AD 221)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성벽 건설은 기원전 408년 위()나라가 진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은 성벽처럼 봉건적인 갈등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중국 중심부에 보존된 유적들에 따르면 기원전 300년 무렵 북방의 침략자에 대항하여 진·조()·연()나라가 축성한 성벽들보다 먼저 축성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원전 220년 통일된 진나라를 건국한 진시황은 기원전 3세기 혹은 그 이전 시대에 구축된 몇몇 성벽을 연결시켜 재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내몽골의 오르도스(Ordos)에서부터 만주까지 성벽을 증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206년 한나라가 들어서기 이전에 이미 최초의 통합 방어체계로서 성벽을 서쪽으로 확장하였고, 시대에 만들어진 성벽의 모습은 황허() 유역의 계곡 지대와 란저우()에 여전히 중요한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만리장성은 그 이후 더 확대되었는데, 한()나라의 무제(, BC 140~BC 87)는 중국 서쪽의 둔황 지역부터 동쪽의 보하이만()까지 약 6,000㎞에 해당하는 성벽을 더 지었습니다. 중국 북방 경계지역에서는 몽골족·투르크족을 비롯해 초원 지대 최초의 제국인 흉노 제국의 퉁구스족 등의 침략 위험이 커짐에 따라 이전보다 더욱 견고한 방어책이 필요했던 것이었습니다.

서기 200년 한 왕조가 몰락하자 만리장성은 중세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방어책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만리장성을 증축하거나 유지 관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몽골족의 멸망으로 오랜 갈등 기간을 끝낸 뒤 명나라는 진시황의 성벽 구축의 전통을 부활하여 5,650㎞에 이르는 성벽을 구축하게 했습니다.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만리장성은 수비대가 아닌 군이 관할하는 9개의 진() 체제로 관리되었습니다.

요새는 마을, 산길, 여울을 방어할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지었습니다. 성벽의 맨 위쪽 길은 군대가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게 하고 연락병의 이동도 가능하게 했습니다. 2개의 상징적인 기념물이 오늘날까지도 성벽의 양 끝에 서 있습니다. 동쪽 끝 산하이관()이 첫 번째 성문이고, 1949년 이후에 완전하게 복구된 요새 자위관()이 북서쪽 끝에 있는 마지막 성문입니다.

만리장성은 복합적·통시적() 문화재로서 2,000년 동안 오직 전략적 목적으로 유지된 군사 건축물의 특별한 사례입니다. 그리고 성벽 건설의 역사는 방어 기술과 정치 상황의 변화에 따라 계속 발전했습니다. 만리장성의 목적은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고, 동시에 침략자들의 관습으로부터 중국인의 문화를 보존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벽의 축조 과정 중에 백성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만리장성에 대한 이해는 중국 문학을 이해하는 필수 요소이기도 하였습니다.

명나라 시기의 만리장성은 거대한 공사를 수행하기 위한 대담성뿐 아니라 건축학적으로 완벽성을 지닌 걸작이었습니다. 광대한 대륙의 경치와 어우러진 성벽은 완벽한 건축물의 예입니다. 춘추시대 중국인들은 북쪽 변방을 따라 방어벽을 구축하면서 독자적인 건설 공법과 공간 구조를 확립하였습니다. 또한, 만리장성 공사에 동원하기 위해 인구를 이동시킴으로써 중국 인구의 확산이 두드러졌습니다. 만리장성은 탁월한 고대 중국 문명에 대한 증거입니다. 당시 명나라는 간쑤() 지역에 남아 있는 서한(西) 시대 진지 안에 흙을 다져 채워 넣는 방식으로 축성하였습니다.

등재기준

기준 (ⅰ) : 명나라 시기에 건축한 만리장성은 대담한 공사 수행의 특징뿐 아니라 건축학적 완벽성을 갖춘 절대적인 걸작입니다. 만리장성은 광대한 대륙의경치와 어우러진 완벽한 건축물의 예입니다.

기준 (ⅱ) : 춘추시대 중국인들은 북쪽 국경을 따라 방어벽을 구축하면서 독자적인 건설 공법과 공간 구조를 확립하였습니다. 중국의 확산은 만리장성 공사에 동원된 인구 이동으로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기준 (ⅲ) : 만리장성은 고대 중국 문명의 탁월한 증거입니다. 간쑤 지역에 남아 있는 서한 시대 진지 안에 흙을 다져 채워 넣는 방식으로 건축한 성벽은 명나라의 놀라우면서도 보편성을 지닌 축성술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기준 (ⅳ) : 만리장성은 복합적이고 통시적인 문화재로서 2,000년 동안 오직 전략적 목적으로 유지된 군사 건축물의 특별한 사례입니다. 하지만 성벽 건설의 역사는 방어 기술과 변화하는 정치 상황 속에서 계속 발전했음을 보여 줍니다.

기준 (ⅵ) : 만리장성은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입니다. 성벽의 목적은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는 동시에 침략자들의 관습으로부터 중국인의 문화를 보존하는 데 있었습니다. 성벽의 축조 과정에는 중국 백성들의 고난이 내포되어 있고, 그것은 중국 문학사상 중요한 작품인 진림(, AD 200년경)의 『음마장성굴행()』이나 두보(, 712~770)의 시, 명나라의 소설 등 작품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 제국 건설의 선두주자인 대표적인 건축물 피라미드 **

< 기원전 2550년 ~ 기원전 2450년 >

 

 

https://www.youtube.com/watch?v=dro3J-ycBXE&feature=youtu.be

 

 

[ 고대 이집트 최대의 미스터리]

 

  B.C. 3000년경에 성립된 고대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과 함께 번영을 누리며 독자적인 문명을 건설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은 히에로글리프(상형문자)라는 독특한 문자와 수많은 신과 내세관을 가진 종교를 만들어냈으며, 후세까지 남아 있는 거대한 석조 건축물들도 건설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이 건설한 거대한 석조 건축물 중에 대표적인 건축물이 바로 피라미드입니다.

피라미드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고대 이집트인은 계단형 피라미드를 '이알', 사각추 피라미드를 '메르'라고 불렀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피라미드라는 명칭은 피라미스라는 사각추 모양의 빵에서 나왔다는 설, 그리스어로 불을 의미하는 '퓨르'에서 나왔다는 설 등 다양한 설이 있지만, 어원 자체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오래 전부터 사카라의 계단식 피라미드('사카라'편 참조)를 비롯해 기자, 사카라(우나스 왕), 마이둠, 다슈르 등 나일 강 서안 지역에 다수의 피라미드가 건설되었지만 그 건설 방법이나 용도에 대한 의문은 아직도 깊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고왕국에서 중왕국 시대(B.C. 2800~B.C. 1600년)를 거치는 동안에도 피라미드는 계속 건설되었지만, 신왕국 시대에는 '왕들의 계곡'에 무덤을 만들기 위해 피라미드가 만들어졌던 것 같습니다.

이집트에서 약 1,200년간 50기 이상의 피라미드가 만들어졌지만,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바로 기자의 3대 피라미드입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자의 3대 피라미드는 수도 카이로에서 남서쪽으로 13킬로미터 떨어진 기자 고원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세 개의 피라미드는 왕의 이름을 따서 쿠푸 왕의 피라미드,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로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와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라는 명칭은 주변의 유적을 통해 판단해서 붙인 것으로, 실제로 두 왕의 명령으로 건설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고 합니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에는 건설에 동원되었던 노동자들이 남겨놓은 낙서 속에 '쿠푸 왕 재위 17년'이라는 흔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피라미드 내부에는 왕의 이름이 쓰여진 경우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쿠푸 왕, 카프레 왕,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를 순서대로 제1피라미드, 제2피라미드, 제3피라미드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 피라미드 콤플렉스 *

  통상적으로 피라미드 본체와 그 주변에 있는 시설을 통칭해서 피라미드 콤플렉스(복합체)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기자의 피라미드 콤플렉스는 대개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와 그 동쪽에 있는 세 왕비의 피라미드, 사원으로 통하는 둑길, 동쪽 마스터바(이집트 왕조 시대 초기부터 알려져 있던 무덤 형태로 피라미드의 원형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진흙 벽돌이나 돌로 만든, 꼭대기가 편평한 4각추형 구조물로 지하 매장실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서쪽 마스타바.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와 남쪽에 있는 위성 피라미드, 동쪽에 있는 장제전(殿 : 장례 의식을 치르는 건물, 스핑크스와 그 남쪽에 있는 신전, 장제전과 신전을 이어주는 둑길.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와 그 남쪽에 있는 세 왕비의 피라미드, 동쪽에 있는 장제전과 신전, 신전으로 통하는 둑길.

그리고 주변에는 피라미드를 만들었던 노동자들의 주거지 흔적으로 추정되는 유적과 마스타바, 석굴 무덤 등도 존재합니다.

마스터바는 이집트 왕조 시대 초기부터 알려져 있던 무덤 형태로 피라미드의 원형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진흙 벽돌이나 돌로 죽은 자는 그 지하실에 매장되었습니다. 사각추 모양의 피라미드 상부를 수평으로 자른 형상이 이집트인들의 접대용 의자인 마스타바(mastaba)와 비슷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고, 피라미드 주위에 있는 마스타바는 쿠푸 왕 신하들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왕비의 피라미드라는 명칭 역시 후세 학자들이 붙인 것일 뿐 실제로 왕비의 무덤은 아니고, 그 규모가 작은데다 왕의 무덤 옆에 붙어 있어서 왕비의 무덤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피라미드 복합체는 피라미드 본체와 장제전, 신전, 신전으로 통하는 둑길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쿠푸 왕의 피라미드에는 장제전과 신전이 없는데, 아마 후세에 파괴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신전이 있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에는 현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촌락이 있었다고 합니다.

각 피라미드에 대한 데이터는 다음과 같다.

왕의 이름 고대의 이름 밑변(m) 높이(m) 경사각도

쿠푸 왕

지평선

230×230

146

51

카프레 왕

위대한 것

214.5×214.5

143.5

63

멘카우레 왕

신성한 것

105×105

65.5

51

 

 표에 나오는 '고대의 이름'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부를 때 사용했던 고유명사입니다.

쿠푸 왕과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가 거의 같은 크기인 것에 비해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는 약 2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는 작은 것일까? 자금난 때문에? 왕의 권력이 약해서 노동력 확보가 어려웠기 때문에? 여러 설들이 분분하지만 확실한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직접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현지인들에게 들은 피라미드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놓았습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피라미드 건설을 지시한 쿠푸 왕은 전국민을 노예처럼 부렸다고 합니다. 10만 명을 3개월간 교대로 동원해서, 돌 나르는 도로를 건설하는 데 10년, 피라미드 본체를 건설하는 데 20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민들을 노예로 부린 것이 아니라 농한기의 실업 대책으로 대규모 건설 사업을 일으켰다는 것이 현재의 유력한 설입니다. 그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한 가지 증거로, 피라미드 건설용 석재를 채취한 채석장에는 노동자들이 써놓은 것으로 보이는 쿠푸 왕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이 어떻게 해서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있었는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길이가 짧은 나무로 만든 기중장치'를 사용했다고만 간단히 언급했을 뿐 상세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피라미드는 주로 석회암과 일부 화강암을 사용해서 만들었습니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에만 약 270만 개, 약 600만 톤의 돌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돌을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쌓아올렸을까요?

피라미드 경사면 앞에 흙을 높이 쌓아서 완만한 경사를 만든 다음 돌을 운반했다는 설과 피라미드 경사면에 나선을 그리듯 흙을 쌓아서 돌을 운반하는 길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일단 정상까지 돌을 쌓아올린 후에는 위에서부터 경사면으로 난 길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피라미드를 완성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 경사면을 이용해 한 단씩 쌓아올렸다는 설이 현재는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경사면에는 돌을 운반하기 쉽도록 나무로 만든 지지대를 설치한 후 로프로 끌어올렸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피라미드 주변에서 발견된 반원형 나무조각을 심도 있게 조사한 고고학자들은 돌 테두리에 반원형 바퀴를 만들어서 운반했을 수도 있다는 추정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즉, 운반할 만한 돌을 바퀴 삼아 운반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 부근으로 올라갈수록 경사가 급해지기 때문에 이런 방법으로 돌을 운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현대의 건축가들은 헬리콥터처럼 공중에서 돌을 들어올린 다음, 밑에서부터 쌓아올리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하고 있습니다.

 건축 방법 외에도 문제가 있고, 이처럼 거대한 건축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떻게 인력을 관리했느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재 조달이나 운반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다 작업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식량이나 주거공간 확보, 도량형의 통일, 건축가 육성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문제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를 건설에는 지금 기준으로도 몇조 원의 비용이 든다고 합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현대에서도 해결하기 어려운 수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힘이 있었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가 번영을 누렸던 것은 아닐까요?

무엇을 위해 만들었던 것일까요?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이라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전설입니다. 하지만 피라미드가 정말 '왕의 무덤'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피라미드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주장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왕의 무덤이라는 설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은 헤로도토스에 의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역사』 속에서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실제로 피라미드 속에서 석관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의 주장은 피라미드가 만들어지지 않았던 시대의 소문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며, 고대 이집트의 유적지에서 피라미드가 무덤이라고 기록한 문헌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기자의 피라미드뿐만 아니라 이집트 전역에 있는 피라미드 내부에서 유체가 발견된 적도 없다. 더구나 제4왕조의 초대 왕인 스네프루는 다슈르 지역에 '붉은 피라미드(바깥쪽으로 붉은 빛이 나는 석회암을 사용했기 때문에 붉게 보인다)'와 '굴절 피라미드(피라미드의 경사가 도중에 완만해지기 때문에)'를, 마이둠 지역에 '붕괴된 피라미드(피라미드 바깥쪽에 쌓은 돌들이 무너졌기 때문에)'를 건설했습니다. 이 모두는 스네푸르 왕이 만든 것으로, 만약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이었다면 혼자서 세 개의 피라미드를 만들었을 리는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2. 태양신 전설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인 앙드레 포샹은 쿠푸 왕이 태양신을 믿었고, 또 쿠푸 왕의 별명이 '크눔은 나를 비켜준다(하르 크눔 쿠푸)'인 것에 착안해 피라미드는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전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3. 오리온 신앙설
3대 피라미드의 배치에 주목한 이집트의 건설기사인 로버트 보봐르는 피라미드를 오리온자리의 삼성('오리온 삼성')과 연관지어 고대 이집트인들이 오리온을 숭배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피라미드를 지상에 만든 것은 천상을 지상에 재현시키기 위함이었다는 설도 내놓고 있습니다.

앞에 소개한 세 가지 주장 외에도 고대 아틀란티스 문명이 건설했다는 설, 강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만든 거대한 테트라포트(tetra pod : 콘크리트로 만든 물막이용 블록)이라는 설, 신이 남겨놓은 성서라는 '돌의 성서'설, 고대 천문대설 등 황당무계한 것에서부터 충분히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었습니다.

이집트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피라미드가 수십 개나 더 있다고 합니다. 그런 피라미드 속에 피라미드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그 어떤 것들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 것입니다.

 

                     ** 세계 7대 불가사의 피라미드 **

       https://www.youtube.com/watch?v=v-knBX_PR5s

 

 

 

 

 

                                                                          

   < 이집트 문명의 피라미드의 역사>   

 

 

                                                                            

* 기자에 있는 쿠푸, 카프라, 멘카우레의 피라미드 * 

 

 https://www.youtube.com/watch?v=ycPARB3eaS8&feature=youtu.be

 

 

 

  조세르의 뒤를 이은 파라오들은 계속해서 피라미드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임호테프와 같이 뛰어난 건축가가 없어서인지 그 중에 많은 것이 미완성으로 그쳤거나 또는 공사가 조잡해 세월의 흐름과 함께 단순한 돌무지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제3왕조의 마지막 왕인 후니(기원전 2575년경)가 계단식 피라미드를 완성한 후에, 그 계단을 메워 나가는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형태의 피라미드를 처음으로 만들게 됩니다.

 뒤를 이은 제4왕조의 첫 왕인 스노페루는, 다슈르에 반쯤 완성되었다가 말았지만, 큰 피라미드 위에 작은 피라미드를 얹은 모습의 과도기 형태의 벤트 피라미드(Bent Pyramid)를 건립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슈르에서 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자신이 묻힐 피라미드를 세웠는데, 그래도 이러한 피라미드들은 피라미드 건설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고, 그의 아들 쿠푸 왕의 등극과 함께 드디어 피라미드 시대는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게 됩니다.

쿠푸는 현재 카이로 교외에 있는 기자에 대() 피라미드를 세운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류 문화유산의 최대의 불가사의로 꼽는 바로 그 피라미드인 것입니다. 이것은 폭이 233m나 되며 면적은 12. 5에이커에 이릅니다. 또한 높이는 144m에다 총 201층의 거대한 바위벽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제일 아래층의 벽돌 1개의 높이가 1.5m로 가장 높고, 점점 올라갈수록 작아져서 제일 꼭대기에 쌓인 벽돌의 높이는 53㎝입니다.
이 피라미드를 세우는 데 총 260만 개의 돌이 사용되었고, 그 무게는 700만 톤에 이릅니다. 이 바위벽돌들은 주위의 돌산에서 잘라, 피라미드가 세워질 장소로 옮긴 뒤에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그렇다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와 같이 거대한 돌을 어떻게 쌓아 올렸을까요?

당시는 아직 철기 또는 청동기가 본격적으로 발명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러나 제2왕조 때부터 석재 건축일을 해온 고대 이집트 석공들은 가히 최고의 경지라고 할 만한 석재기술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돌로 만든 망치와 돌보다 부드러운 구리로 만든 정과 톱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은 먼저 사용할 돌의 눈을 유심히 주목한 다음에 돌망치로 돌 눈의 방향에 구멍을 깊게 팠습니다. 구멍이 파이면 그곳에 단단한 나무로 쐐기를 박았고, 다음 위에 가만히 물을 부으면 나무가 팽창하면서 그 힘에 의해 돌 눈이 쪼개져 나왔습니다.

 석재는 풍부했습니다. 대부분의 석재는 기자 부근에서 구했고, 피라미드의 겉을 장식할 아름다운 석회암은 나일 강가에서 구해 배로 실어왔습니다. 또 현실()에 쓰일 화강암은 남쪽의 아스완에서 배로 실어왔습니다. 실어온 돌을 아름답게 깎고 다듬는 데는 구리톱이 사용되었습니다. 구리톱으로 돌을 자르면 톱날은 쉽게 못 쓰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르는 부분에 수정가루와 특수한 모래를 바르고 물을 뿌려가면서 잘랐습니다.

 이렇게 가공된 돌을 사막 위에 그냥 쌓아 올리면 무너지기 때문에, 사막보다 높은 암석지대를 평평하게 만들어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각각 가로, 세로가 230m 이상이나 되는 암석지대를 평평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밑바닥이 평평하지 않으면 돌을 쌓아 올려도 무너져버릴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암석지대를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석공들은 피라미드를 4각으로 에워싼 입 구()자 모양의 수로를 어망의 눈처럼 가로와 세로로 파 이곳에 물을 부었습니다. 수면을 기준으로 암석을 평평하게 깎는 것입니다. 현대의 기술로 이 수평면을 측량해보면 남동쪽의 모퉁이와 북서쪽 모퉁이의 오차는 불과 20㎝이며, 방위의 오차는 2~5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10만 명의 노예들과 4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현대의 고고학자들은 피라미드의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 수는 약 4,000명 정도이며, 그들의 신분도 노예가 아니라 공공사업에 징발된 자유인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피라미드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쌓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먼저 피라미드 위쪽에 돌을 쌓아올리기 위해 피라미드의 네 변을 따라 벽돌과 돌로 비탈길을 닦았습니다. 비탈길은 모두 피라미드 네 변에서 시작해 각각 꼭대기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중에 3개의 비탈길은 돌을 운반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일을 마친 사람들이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20명씩 한 조를 이루어 무거운 돌을 끌어올렸습니다.

 그러나 수 톤이나 되는 돌도, 통나무 2개를 나란히 깔고 삼나무 열매기름을 부어가며 수레에 실어 끌면 많은 힘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정원석을 옮길 때 곧잘 쓰이는 방법입니다. 노동은 고되었지만 파라오를 위한 노동에 오히려 즐거움을 찾는 충성스런 노동자들이 많았습니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문서 가운데는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 신을 위해 드리는 근사한 제사 때처럼 빵을 배부르도록 먹고 맥주를 마셨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피라미드 건설은 이집트의 왕 파라오가 전력을 기울인 대사업이었습니다. 쿠푸 왕의 뒤를 이은 제4왕조의 제드흐라 · 카프라 · 멘카우레 · 세프세스카프 왕들도 연이어서 제각기 피라미드를 건설했습니다. 그중에서 쿠푸의 피라미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외관상의 아름다움은 물론 복잡한 내부구조도 가장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조금씩 크기가 작은 카프라와 멘카우레의 피라미드들이 이어져 있는데, 이 세 피라미드들이 바로 대표적인 기자의 대 피라미드들로 가장 유명합니다.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만으로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외적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이끌어줄 지도자로서의 파라오가 필요했습니다. 이집트 전역은 '파라오의 토지'였고 이집트 농민은 '파라오의 백성'이었습니다. '나일 강의 선물' 이라고 일컬어지는 기름진 토지도 저수지와 관개용수가 없으면 많은 수확량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해마다 사막의 모래에 묻힌 저수지와 운하를 수리해 새 운하를 만드는 일은 파라오 휘하에 직속된 토지관리부서의 일이었습니다. 또한 이집트는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생활에 필요한 금, 은, 동, 나무, 보석 등을 외국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역로의 안전을 위해 대상과 상선들은 군대의 보호를 받아야 했습니다. 군대는 파라오가 임명한 장군이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에 매장된 구리산을 독점할 수 있었던 것도 파라오의 군대 덕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파라오는 이집트 번영의 근간이자 기초였습니다.

  현재 이집트에 남아 있는 피라미드의 수는 약 80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 왕국 5천 년 역사에 기록된 파라오들의 숫자에 비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였습니다. 왜냐하면 피라미드가 한창 만들어진 시대는 500년간의 고왕국 시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피라미드 건설은 대 역사였습니다. 가장 규모가 큰 쿠푸 왕의 피라미드가 만들어지고 나서 60년 후에 즉위한 파라오조차 피라미드 건설을 단념하고 옛날의 마스타바 식()의 무덤으로 만족해야 했다. 피라미드 건설과 유지가 국가 경제에 너무나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ztmq7_VVIU&feature=youtu.be

 

** 불가사의 한 피라미드의 힘 **

 

 

    < 쿠푸왕 피라미드 >

   카이로에서 남서쪽으로 13km 떨어진 기자에 위치해 있는 이집트 4대 왕조 쿠푸왕의 무덤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인류 최대의 건축물이다.

 

 

  이집트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 문명의 상징적인 건축물로서, 고왕국 시대부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까지 계속해서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이집트에 남아있는 피라미드는 보고된 것만 80기 이상이며, 학자에 따라서는 112기로 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피라미드가 나일강 서안을 따라 남북으로 분포하고 있습니다. 피라미드는 독립 구조물이 아니라 건축물 복합체의 일부였습니다.

피라미드는 자체로서 무덤 역할을 하거나 무덤 위에 세워졌으며, 그 옆에는 장례와 제례에 사용되는 장제전이 있고, 강변까지 운하로 이어지도록 건축된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피라미드 건축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제 3~5왕조로, 이 시기를 '피라미드 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 후 피라미드 건축물을 점차 축소되었다가 제 18왕조부터는 대부분의 왕묘가 암굴묘()의 형식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는 사카라(Saqqara)에 있는 제3왕조의 제2대 파라오 조세르(Djozer:재위 BC 2630~BC 2612 추정)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건축가이자 재상이었던 임호텝프가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카라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처음에는 한 변이 63m이고, 높이가 8미터인 석조 마스타바(이집트 초기 무덤의 한 형태로, 아랍어로 직사각형의 구조물을 의미한다)로, 중앙에 깊이 28m의 수혈()을 파고 그 밑에 매장실을 만드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사가 확장되어, 결국 마스타바를 6단 포개 놓은 모양의 밑변 109×126m, 높이 62m의 계단 피라미드가 완성되었습니다. 피라미드의 하부는 지하 복도와 방으로 이뤄졌으며, 깊이 25m, 너비 8m의 중앙 통로 아래에는 아스완산() 화강암으로 만든 지하 매장소가 있습니다.

 사카라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종교적으로는 헬리오폴리스를 중심으로 예로부터 존재했던 태양신 숭배가 피안()의 신앙과 결부된 결과로, 계단은 죽은 국왕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태양신과의 결부는 후의 정통 피라미드의 출현으로 한층 긴밀해졌습니다. 피라미드 그 자체는 왕의 미라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음식물과 가지각색의 물품을 진열하여 제사를 지내는 장소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피라미드 북측에 장제전(殿)이 건조되고, 다시 동쪽에 세드제()의 의식을 행하는 신전·소신전·중정()이, 남쪽에는 제단이 있는 대중정이 축조되고 그것들을 높이 10m, 동서 277m, 남북 545m의 사각형의 주벽()으로 둘러 장대한 묘소를 형성하였습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피라미드 복합체'의 모습이었습니다.

  측면이 평면인 정통 피라미드는 제4왕조로 들어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초대 파라오인 스네프루(Sneferu:재위 BC 2612~BC 2589 추정)는 3개의 피라미드를 만들었습니다. 그 중 사카라의 남쪽 다흐슈르(Dashur)에 세워진 높이 97.5m, 밑변 189m, 사면각도는 처음에는 54°32 ', 중간쯤에는 43°21 '이 되는 '굴절()피라미드'가 있다. 특이하게도 중간 위로는 기울기가 달라지며, 아래쪽이 위쪽보다 더 가파르고,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 보다 4각 뿔에 더 가까운 모양이었습니다. 역시 스네프로가 세운 메이둠(Meidum)의 피라미드는 현재 2단 탑의 모양으로 남아있으나, 본래는 8단의 계단 피라미드를 만들고, 단의 부분을 돌로 메운 뒤 석회암으로 덮어 순수한 4각뿔 형태로 완성시킨 것이었습니다. 일설에는 제3왕조 말, 스네프루의 선왕 파라오 후니(Huni)가 착수하고 스네프루가 완성시켰다고도 합니다. 높이 92m, 밑변은 144m, 사면() 각도는 51°52 ' 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4각뿔로 설계, 시공된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피라미드는 다흐슈르에 있으며, '북() 피라미드' 혹은 '붉은 피라미드'로 알려져 있습니다. 높이 97.5m, 밑변 213m, 사면각도 43°36 '이므로 경사가 완만합니다. 제4왕조로 들어오자 장제전은 피라미드의 북측에서 동측으로 옮겨지고, 사막가에 새로이 하곡신전(殿)이 만들어져 양자는 참배로()로 이어졌습니다.

  다음 파라오 쿠푸(Khufu:재위 BC 2589~BC 2566 추정)는 카이로 남서쪽 15km에 위치한 기자(Giza)에 최대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습니다. 이것은 대피라미드 또는 제1피라미드라 일컬어지며, 높이 146.5m(현재 137m), 저변 230m, 사면각도는 51°52'입니다. 각 능선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오차는 최대의 것이라도 5°30'에 지나지 않을 만큼 극히 정교한 것으로, 피트리에 의하면 평균 2.5t의 돌을 230만 개나 쌓아 올렸습니다. 세계 최대의 석조건물로서 그 장대한 규모와 간결한 미는 다른 데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내부구조는 복잡해서 독일의 보르하르트에 의하면 계획이 2번 변경되었다고 합니다. 북측의 지면에서 약간 위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그대로 하강하면 암반 밑에 설치된 방에 도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곳이 제1차 계획의 매장실이고, 그 위에 있는 통칭 '왕비의 방'이 제2차 계획의 매장실입니다. 그리고 제3차 계획에 의해 피라미드가 완성되었습니다.

  제1피라미드 남서쪽에 파라오 카프레(Khafre:재위 BC 2558~BC 2532 추정)의 제2피라미드가 있습니다. 높이 136m, 밑변 216m, 동쪽에 있는 장제전에 450m의 참배로가 뻗어 하곡신전에 이르렀습니다. 유명한 스핑크스는 하곡신전에 가까운 참배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기자에는 그밖에 파라오 멘카우레(Menkaure:재위 BC 2532~BC 2504 추정)의 제3피라미드와 왕비, 혹은 왕족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피라미드 6기가 있습니다. 기자의 피라미드 중에 카프레의 피라미드만이 화강암 위를 덮여 표면을 매끄럽게 했던 석회암이 일부 남아있어 본래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5·6왕조에는 피라미드의 규모가 작아졌습니다. 아부시르(Abu Sir), 사카라에 있는 5, 6 왕조의 피라미드는 65∼80m의 밑변을 가진 것이 많습니다. 그 중 제5왕조 최후의 왕인 우나스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6왕조의 페피 1세, 메르엔라, 페피 2세의 것에는 매장실 벽면에 왕의 사후 행복을 기원하는 각 종 주문, 소위 '피라미드 텍스트'가 일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제7왕조의 이비왕을 마지막으로 피라미드는 일시 모습을 감추었다가 제11왕조에 이르러 다시 나타났습니다. 제12왕조에 속하는 리슈트(Lisht)에 있는 아멘엠헤트 1세(Amenemhat I:재위 BC 1991~BC 1962), 센우스레트 1세(Senusret I:재위 BC 1971~BC 1926)의 것, 엘-라훈(el-Lahun)있는 센우스레트 2세(Senusret II :재위 BC 1897~BC 1878)의 것, 하와라(Hawara)에 있는 아멘엠헤트 3세(Amenemhat II:재위 BC 1860~BC 1814)의 것이 유명합니다. 그러나 규모도 작고, 또 햇볕에 말린 벽돌로 지었기 때문에 심하게 파괴되었습니다.

  피라미드를 건조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무거운 석재를 필요한 높이까지 운반하는 일이었습니다다. 당시에 어떠한 방법으로 석재를 운반했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많은 학자들이 피라미드 측면에 직각으로 경사로를 만들고 석재는 썰매로 운반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정한 높이마다 핵재() ·내장재· 전재()· 외장재의 순으로 쌓아놓고, 피라미드가 높아짐에 따라 경사로도 높아졌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경사로의 기울기는 일정해야 하므로 길이는 점차 길어집니다. 정상까지 다 쌓고 나면 위에서부터 외장을 완공시켜가면서 서서히 경사로를 낮게 하여 완성시키는 방법을 취하였습니다. 외장은 정성껏 시공되고, 석재는 종이 한 장 끼워지지 않을 정도로 정밀하게 쌓아졌습니다. 완성에 걸린 연대에 대하여 헤로도토스는 '기자의 피라미드'를 20년이라 적었으나, 실제로는 더 짧은 기간으로 생각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b7SFHz5fCo&feature=share

 

 요즘 무분별적으로 고층 건물들이 지어지면서 없었던 싱크 홀이 목격되고 뉴스에도 보도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옛날 초막집부터 현재까지 생각하면 고도로 눈부신 발전을 해오면서 문제점이 들어나고 있음을 엿보기 위함이고 "사람들은 땅을 밟고 살아가야한다" 옛날 고담에서도 들어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알지도 못하는 병들이 생겨나고 지구 온난화의 원인도 있는 듯해서 뒤돌아보면 문제가 보이지 않을까하고 발자취를 따라가보려고 합니다! 



** 창세기11장_언어가 통하지 않아 흩어진 무리, 바벨탑이야기 **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하나의 언어를 사용해오다가 혼란하던 오리엔트 세계 메소포타미아의 세력이었던 아시리아에 의해 통일되었고 기원전 8세기말 오리엔트 세계를 정복하고 세계제국이라 일컬을 만한 국가를 건설하여 웅장함과 번영을 자랑하던 아시리아인이 정복당하고 정복당한 민족은 끊임없이 반항하며 마침내 기원전 612년 이란고원에서 일어난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고 세계제국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아시리아 멸망 후 오리엔트 세계는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외에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리디아, 그리고 다시금 독립한 이집트를 합쳐 4국 대립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중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지배하던 신바빌로니아가 가장 강대해졌습니다. 신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은 고바빌로니아 시대보다 더욱 번영했고, 웅장한 신전과 궁전 등이 하늘 높이 솟았습니다. 특히 바벨 탑과 공중 정원이 유명하였습니다.


            

            " 바벨탑 이야기" 는 구약성서 창세기 제11장에 잘 기록되어 있다. 바벨탑은 바빌론이외에도 메소포타미아 각지에서 볼 수 있는 지구라트

           (신을 제사하는 성탑)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YLNX1g7SNA&feature=youtu.be


       

          

          " 공중정원 " 은 건조한 바빌론에 인조 공원을 만든 것이다.

          벽돌로 벽을 쌓고 안을 흙으로 메워 여러 층의 정원을 만들고, 층마다 온갖 나무와 꽃을 심어 짐승과 새들이

          살게 하였습니다. 필요한 물은 노예로 하여금 유프라테스 강에서 운반하게 하였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VPJUit1U-g&feature=youtu.be

 

       

                      

           **중세시대의 공중정원의 사진**

 

 

    신바빌로니아에서는 또한 자체의 움직임을 통해 인간의 운명과 세상의 앞일을 미리 점치던 점성술이발달하였습니다. 점성술 그 자체는 미신이 포함되어있었으나, 천체에 대한 관찰은 과학적으로 천문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기원전6세기 중엽에 키루스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레디아에서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인도경계까지 진출아여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고  뒤를 이은 캄비세스 2세 때는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오리엔트를 하나로 묶었습니다. 그 뒤를 이은 다리우스 1세는 중앙 집권화에 힘써서 제국을 20개의 속주로 나누고 각 주에 장관을 두어 세금을 거두는 일과 치안 유지를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각 지방에 파견하여 장관을 감찰하고, 수사와 스르디스를 있는 '왕의 길'도 건설되었고 간선도로에는 역전제가 설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고국에 귀환한 이스라엘인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고,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나가기로 다짐하였고 페르시아 제국 아래서 야훼 신을 경배하는 민족적인 종교로 형성된 것이 '유대교'로서, 그때부터 '유대인'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페르시아 제국은 발전의 발전을 거듭하며 동으로는 인더스 강에서 서로는 에게 해 북쪽 해안, 남으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대제국을 건설하였고 다리우스 1세 이후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전 550~330)는 2세기 동안에 걸쳐 오리엔트 전역을 지배하였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에 의한 통일은 오리엔트 전체를 하나의 국가 및 문화권으로 묶어 놓았고, 이로써 하나의 역사적 세계로서의 오리엔트가 성립되었다. 또한 오리엔트의 통일은 당연히 주변 세계의 동향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페르시아가  대통일 이후에 맞게 된 것은 서방 세계로의 진출이었고 그 세력이 에게 해를 건너려 할 때 동지중해를 기반으로 하는 그리스 세계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는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초강대국 페르시아에 맞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구약의 기록을 기반으로 비추어 봤을 때 중세시대의 테라스가 오늘날에 지어진 것을 보고 여기서부터 기인하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벨탑처럼 높은 오늘날의 초고층 건축물 또한 중세시대때를 기반으로 모방되어지고 있는 듯 합니다!

  대표 건축물로 미국의 "엠파이어 빌딩"과 중동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주메이라 해변에 위치한  "버즈 알 아랍 호텔" 을 보며 성경의 바벨탑이야기가 더욱 생각나게 합니다.

 

                                          

 * 미국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      * 두바이 "버즈 알 아랍<Buri Al Arab 호텔*        * 두바이 "버즈 알 아랍<Buri Al Arab 호텔(야경)*

 

 

시대의 흐름은 막을 수 없지만 현시대의 건축공법을 뛰어넘을 수 있는 공법을 개발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퇴보되어질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인 듯합니다!!

   

   ** 노아의 방주 이야기 **

 

    https://www.youtube.com/watch?v=2qXIOBSAgT8&feature=youtu.be

 

  성경 속에서는 도대체 언제부터 건축물이 지어졌을까하는 호기심이 생겨 노아의 방주이야기로 소재를 조심스레 접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의 계시에 의해 방주를 만들어 대홍수 후에도 살아남았던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 신앙인들에게는 익숙하나 익숙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도 보편화된 지식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존재하는 이슈화될만한 홍수 전설이 이 노아의 방주를 역사적 사실로 증명한다는 일설은 인간사의 생활 속으로나 역사적인 사이에서 뿌리 깊게 믿어지고 있습니다. 이 가설에 진실은 있을까요? 노아의 방주가 실제로 존재했을지의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요?

 성경에는 진실의 단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9세기 중반 중동까지 뻗어간 고고학의 발굴은 구약성경의 무대인 메소포타미아 주변에서부터, 지금까지 전설의 장소라고만 여겨지고 있었던 성경에 등장하는 도시의 유적에 이르기까지 차례대로 발견해나갔다. 그리하여 성서에 기술된 일부가 역사적 사실이었던 것이 증명되자 성경의 신화적 부분, 다시 말해 「창세기」에 눈을 돌리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무엇인가 진실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하고 말입니다.

「창세기」의 홍수 전설은 구약성경에 특히 스케일이 크고 또한 인상 깊으며 신비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이브의 자손들은, 땅 위에서 번성하고 순조롭게 늘어갔다. '신의 아들' 들은 각각 인간 여자를 아내로 삼아 자녀를 낳았다. 여기서 말하는 신의 아들이란, 아담의 자손이 아니라 천사들을 일컫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아이들은 네필림(Nephilim)이라 불리며 아주 옛날 이름 높은 영웅이 되었다고 합니다.그러나 인간이 늘어남과 동시에 사람들이 행한 악행 또한 지상에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에 몹시 마음이 아팠던 신은, 인간을 창조한 일이 역시 과오였노라고 후회하면서 홍수를 내려 지표면을 싹 쓸어버릴 것을 예비하였습니다. 다만 신은 인간을 전멸시켜버리지 않고 단 당대 의인이라고 일컬은 아담의 9대손인 노아에게 방주를 지을 것을 예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노아는 그 당시 당대에서 단 한 명, 신에게 순종하는 욕심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신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 것을 명하고 자세한 순서와 치수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었습니다. 노아는 신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는 세 명의 아들과 함께 긴 세월에 걸쳐 방주를 완성시켰습니다. 그러자 신은 다시 노아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네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배에 들어가거라. 그리고 깨끗한 짐승은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한 쌍씩, 공중의 새도 일곱 쌍씩 배에 데리고 들어가 온 땅 위에서 각종 동물의 씨가 마르지 않도록 하여라. 이제 이레가 지나면 40일 동안 밤낮으로 땅에 비를 쏟아, 내가 만든 모든 생물들을 땅 위에서 모두 없애버리리라."라고 명하였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실은 동물의 정확한 숫자는 불확실합니다. 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모든 동물을 암컷과 수컷 한 쌍으로 두 마리씩 들여보냈다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다섯 종류 정도의 자료를 모았는데 정리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병기()하는 형식으로 편찬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노아는 아들들과 힘을 모아 기한까지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방주에는 동물과 음식물이 쌓이고 노아 일족이 올라탔습니다. 이때 노아는 6백 살이었다고 합니다.

신의 예고대로 분명히 7일 후에 파괴적인 호우가 찾아왔습니다. 홍수는 40일 동안(1백50일이라고도 합니다.) 계속되어 방주는 수면으로 떠올랐지만,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지상의 가장 높은 산조차 물밑으로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지표면에 남아 있던 생물은 사람이나 새나 짐승할 것 없이 다 쓸어버리셨던 것이었습니다. 40일이 지나자 노아는 방주의 창문을 열고 밖으로 까마귀를 날려보냈습니다. 까마귀는 기세 좋게 날아올랐지만, 육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방주로 들어왔다 나왔다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던 7일 후, 이번에는 똑같이 비둘기를 날려보냈습니다. 그렇지만 비둘기 역시 앉을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7일 후,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날려보내보았습니다. 그러자 비둘기는 멀리 날아가서 저녁 때가 되어서야 돌아왔습니다. 부리에는 올리브 잎이 물려 있었습니다. 노아는 어디선가 물이 빠져 육지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7일 후 비둘기를 날려보내자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물이 빠지고 방주는 아라랏 산에 멈추었다.

 신은 노아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아내와 아들들과 며느리들을 데리고 배에서 나오너라. 새나 집짐승이나 땅에서 기어다니는 길짐승까지, 너와 함께 있던 모든 동물을 데리고 나와 땅 위에서 떼지어 살며 새끼를 많이 낳아 땅 위에 두루 번성하게 하여라." 그래서 노아는 모두를 데리고 방주에서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을 위해 제단을 쌓고 제물을 바쳤습니다. 신은 노아에게 두 번 다시 대지의 생물을 전부 벌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합니다. 그 계약의 증표로 구름 속에서 나타난 무지개입니다.

 

 

 

「창세기」에는 신이 만들라고 명했던 방주의 해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재질은 고펠나무. 지금 이것은 전나무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 재질을 길이 3백 큐빗, 폭 50큐빗, 높이 30큐빗〔큐빗은 일반적으로 척()이라 여겨집니다. 이렇게 산출해보면 방주의 크기는 길이 약 1백35미터, 폭 약 23미터, 높이 약 14미터가 된다〕의 방주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몸체의 안팎으로 타르를 칠하고 내부는 세 겹 구조로 작은 방을 여러 칸 만들었습니다. 천장에는 빛이 들어오는 창을 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출입구는 방주의 옆으로 냈다고 되어 있습니다.노아의 방주는 중세의 종교화에서는 고물 끝이 뾰족하고 멋진 배의 형상으로 그려지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합니다. 아라랏 산에서 방주(의 잔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노아의 방주를 일반적인 배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아의 방주가 실제로 그런 형태를 갖고 있었는가 하는 설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방주'가 아닌 것이라고 의문도 듭니다. 방주 전설의 원형이라 여겨지는 바빌로니아의 전설에서 건조된 배는 밑바닥이 편편하고 네모난, 바야흐로 물에 뜬 상자와 같은 모습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물에 떠 있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형상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노아의 방주를 우스꽝스럽고 투박한 상자 모양의 배로도 정해놓은 일설도 나오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는 사실 명확한 모델이 있습니다.

 1850년에 기원전 7세기 앗시리아의 앗시르바니팔 왕의 대도서관에서 열두 장의 점토판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아카드어의 설형문자가 새겨진 이 점토판에는 세계 최고()의 문학작품 『길가메시 서사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중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똑같은 홍수 전설이 삽입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반신반인의 영웅 길가메시에게 그의 선조 우트나피슈팀이라는 인물이, 영원히 죽지 않는 비밀을 말해주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우트나피슈팀은 먼 옛날에 시르팍(대홍수 이전에 존재했다는 메소포타미아의 5대 수도 중 하나)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에아 신의 경건한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에아 신은 신들이 대홍수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꿈을 보여줌으로써 우트나피슈팀에게 곧 닥치게 될 파국을 경고했습니다.
이 꿈을 올바르게 이해한 우트나피슈팀에게 에아 신은 이렇게 명했다. "시르팍 사람, 우바라 투투의 아들이여, 그대의 집을 부수고 배를 만들어라. 부를 버리고 생명을 쫓아가라. 재산을 돌아보지 말고 그대의 생명을 구하라. 살아 있는 것의 모든 종류를 그대가 만든 배에 실어라. 그대가 만들어야 할 배는 치수와 비율을 정해진 그대로 하라. 폭과 깊이는 똑같이 비율을 맞추어라."

우트나피슈팀은 신의 계시에 따라 마을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고 방주의 건조에 착수했습니다. 골조는 5일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기술자들을 시켜 신에게 명령받은 그대로 마루가 1이크(약 3천6백 제곱미터), 네 벽의 높이는 10가르(약 60미터), 덮는 판자의 폭도 각각 10가르로 된 여섯 겹의 거대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배 밑바닥에는 아스팔트가 부어졌다고 합니다. 배를 완성시킨 우트나피슈팀은 기술자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연회를 베풀고 모든 재산과 모든 종류의 생물을 배에 실었습니다. 가족, 친척, 기술자, 가축, 짐승도 실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배에 올라타고 문을 닫았습니다.

이윽고 에아가 예고했던 시간이 다가왔다. 서광과 함께 하늘 끝에서 시커먼 구름이 몰려들었습니다. 천둥신 아다드가 천둥을 치게 했습니다. 큰 바람이 몰아치고 수로에서 물이 넘쳤으며. 사람들을 징벌하리라 말을 꺼냈던 지상과 명계의 신들조차 무시무시한 대홍수에 놀라 허둥대며 천신 아누의 곁으로 도망쳤습니다. 여신 이슈타르는 인간 여자처럼 울면서 말했습니다. "보아라, 옛 나날들은 진흙으로 돌아가버렸다. 내가 신들의 모임에서 재앙을 말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신들의 모임에서 그런 말을 했던가? 나의 인간들을 멸망시킬 싸움을 입 밖에 내었던가? 나야말로 인간들을 낳은 자인데. 물고기의 알과 같이 그들은 바다에 가득 찼었는데." 모든 지상과 명계의 신들은 이슈타르 신과 함께 슬퍼하고 후회했습니다. 미칠 듯이 일렁이는 바람과 홍수, 그리고 태풍이 6일 낮 6일 밤 국토를 일순간에 망가뜨렸습니다. 7일째가 되자 폭풍의 신이 겨우 싸움에서 져서 바다가 가라앉고 폭풍은 고요해졌으며, 그리고 물은 빠져나갔습니다. 하지만 이미 모든 인간은 진흙으로 돌아가버린 뒤였습니다.

우트나피슈팀의 방주는 니시르 산(티그리스 강과 그 지류 자브 강의 합류점 가까이에 있는 산. 구르디스탄 산맥의 한 줄기)에 멈추었습니다. 7일 동안 기다린 그는, 우선 비둘기를 날려보냈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다음에 그는 제비를 날려보냈습니다. 제비 역시 되돌아왔습니다. 마지막으로 날려보낸 것은 큰 갈가마귀였습니다. 갈가마귀는 물이 빠졌기 때문에 시체를 쪼아먹고 주위를 돌면서 까악까악 울면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트나피슈팀은 모든 새를 하늘로 날려보내고 산 정상에서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자 향기에 이끌려 신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여신 이슈타르가 우트나피슈팀에게 말했습니다. "이 나날을 마음에 새기고 결코 잊지 말아라. 신들이여, 희생 제물 앞으로 와주십시오. 엔릴(바빌로니아 3대 신 중 하나로 하늘의 대신. 신들의 왕)은 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생각 없이 홍수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인간들을 파멸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엔릴은 왔습니다. 그리고 배를 보고 살아남은 자가 있음을 알고서는 "이들이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가. 한 명도 살아남아서는 안 되었는데" 하며 격노했습니다. 그런 엔릴을 말린 것은 에아였습니다. 에아는 엔릴이 사려 없이 홍수를 일으킨 것을 비난하면서 닥치는 대로 벌하지 말고 죄의 경중에 따라서 사자를 늘리고 이리를 풀어놓고 기근을 일으키고 역병을 돌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마음을 고쳐먹은 엔릴은 우트나피슈팀과 그의 아내에게 축복을 내리고 불사의 몸으로 만들어주면서 그들을 멀고 먼 땅, 강의 하구에 살게 했습니다.

이것이 영원한 사람, 머나먼 우트나피슈팀의 전설입니다. 후세의 노아의 전설이 여러 명의 신을 유일신으로 바꾼 것만 제외하면, 완전히 이 이야기의 재탕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외에도 바빌로니아 전승이 구약성경에 도입된 흔적이 많아 보이지만, 이만큼 완벽한 일치를 보이는 에피소드는 노아의 방주이야기뿐입니다. 이 발견(1872년에 해독, 1876년에 발표. 점토판의 발견 당시 아직 설형문자가 해독되지 않아서 읽지 못했다)이 밝혀졌을 때, 일대 충격이었습다. 25세기에 걸친 시간을 초월하여 성경 이야기의 뿌리가 현대에 되살아난 것이었습니다. 노아 이야기의 원전이 성경이라는 종래의 학설은 싱겁게 덮어졌습니다.
  게다가 그후, 수메르어로 씌어진 최고()의 파편이 닛프르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이 전승의 기원은 더욱 위로 거슬러올라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메르인은 바빌로니아 이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번영했던 민족으로 기원전 3500년경부터 기원전 2500년경까지 번성했다가, 그후 사막에서 습격해온 바빌로니아의 선조에게 멸망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바빌로니아인은 수메르인으로부터 문화와 신화를 차용하여 수메르어를 중세 유럽의 라틴어처럼 사용해왔습니다. 다시 말해 노아의 홍수 전설은 기원전 25세기가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5천 년 이상 옛날부터 면면히 전해져 내려온 신화였던 것이었습니다.

 수메르(닛프르)판 노아(우트나피슈팀)는 그 이름을 디우스두라라고 했습니다. 그는 대홍수 이전 시대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기본적으로 바빌로니아판과 비슷합니다. 홍수를 일으킨 것은 엔릴 신이고 그것을 몰래 디우스두라에게 가르쳐준 것은 영웅신 우투였습니다. 왕은 건조한 방주에 가족과 재산, 가축과 친구들 싣고 대홍수를 헤쳐나갔습니다. 그리고 엔릴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고 성스러운 산에서 살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대홍수 전승을 전하는 점토판은 이외에도 메소포타미아 각지에서 차례대로 발견되었습니다. 전승이 엄청난 세월, 광대한 지역에 걸쳐서 전해 내려온 증거로, 파국에서 살아남은 홍수영웅의 이름은 판에 따라서 제각각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우트나피슈팀, 아트라 하시스(최고의 현자), 디우스두라(생명을 본 자라는 의미) 왕 이외에도 우바랏츠, 카시스트라타, 바이스바라타 등으로도 불렸습니다. 노아 역시 이 중 하나에 포함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해독된 점토판에서 확인된 이름'의 일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커다란 의문이 생깁니다. 홍수 전설은 어찌하여 이토록 오랫동안 방대하고 집요하게 이어져 내려온 것일까? 해답은 역시 고고학적 발굴이 가져왔습니다. 메소포타미아 각지의 발굴 조사에 따르면 우르, 키시, 시르팍, 니네베, 우르크 등 수메르 각 도시에서 대홍수의 흔적이 발견된 것입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는 실제로 대규모의 홍수에 휩쓸린 적이 있습니다. 다만 조사 결과, 이들 홍수의 발생 연대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각지의 흔적으로 미루어보아 홍수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음이 추측되지만, 성경에 기록된 것처럼 단 한 번의 전세계적인 대재앙은아니었습니다.
  원래 남부 메소포타미아는 엄청난 저지대로 항상 홍수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던 땅입니다. 수메르인은 치수기술에 숙달되어 물을 다스리고 문명으로 단번에 비약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술이 실용화되기 시작한 때는 기원전 3500년경. 그 이전에는 자연의 맹위에 대해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홍수는 소위 매년 찾아오는 위기였고 때로는 괴멸적인 규모로 습격하기도 했을 듯합니다. 지층에 새겨진 대홍수 유적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노아 전설의 기원이 되는 대홍수는 성경에서 말하는 세계적인 규모는 아니었지만 예전에 존재했습니다. 홍수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유역에 빈번했던, 숙명이라고도 할 만한 재해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찌하여 홍수 전설이 면면히 이어져왔는가 하는 의문도 사라질 것입니다. 이 사실을 노아의 방주 문제의 해답으로 삼는 사람도 많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wzJIYGk5Tw&feature=youtu.be

 

 노아의 대홍수 전설은 지역적인 것이 아니라, 좀더 세계적인 규모로 발생한 홍수의 기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그들의 가설은 실로 천차만별인데, 가장 일반적인 것이 어떤 이유(빙하기 말이나 지축의 이동, 엇갈림)로 인해 녹은 빙하 때문에 수면이 급상승할 때 발생한 전설이라고 보는 일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반드시 예로 드는 것이 세계 각지에 존재하는 홍수 전설입니다. 확실히 모든 대륙에는 예전에 대홍수가 일어났다는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에는 데우칼리온 전설이 있고, 인도에는 마누 신화가 있습니다. 미국 원주민 사이에 폭넓게 홍수 전설이 전해진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고, 이집트, 남미, 중국에도 존재합니다.
 이들 신화는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몇 개의 패턴으로 분류 가능한데, 대홍수가 나서 인류가 전멸하고 한 가족(아니면 한 집단)만이 재난을 면한 후 인간의 자손이 되었다는 요소가 꽤 보편화되어 전설적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먼 고대의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대홍수에 있었다는 생각은 매우 로맨틱하지만, 물론 현재까지는 가설의 영역을 넘지는 않습니다.

또한 대홍수뿐만 아니라, 노아의 방주 그 자체가 예전에 실존했다고 강하게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승이 탄생한 경위를 생각해볼 때, 「창세기」가 말하듯이 아라산에 방주가 착륙한 것은 너무나 비현실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라랏산에서 방주를 보았면 그 잔해를 갖고 돌아왔다는 보고는 적지 않습니다. 아라랏산에 방주의 흔적을 찾는 탐험은, 현대에 들어와서도 가끔씩 행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슬람교도는 방주가 주디 산에 있다고 하며, 『길가메시 서사시』는 니시르 산에 있다고 씌어 있습니다. 세계의 홍수 전설을 되짚어가면 구원의 배가 멈추었다고 여겨지는 영봉()은 엄청난 숫자에 달할 것입니다. 그래도 방주를 찾아다니는 자는 아라랏산에 오르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그것은 학문적인 조사가 아니라 종교적 정열에 불붙은 일종의 순례적 행위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 이 이야기는 성경 속에 건축물이 언제부터 기원했을까? 호기심으로 시작했을 뿐 여러 유명한 학자들의 주장이 많아서 건축물의 기원이 노아때 방주가 아니였을까라고 생각되어 주관적으로 쓴 글이니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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