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국 건설의 선두주자인 대표적인 건축물 피라미드 **

< 기원전 2550년 ~ 기원전 2450년 >

 

 

https://www.youtube.com/watch?v=dro3J-ycBXE&feature=youtu.be

 

 

[ 고대 이집트 최대의 미스터리]

 

  B.C. 3000년경에 성립된 고대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과 함께 번영을 누리며 독자적인 문명을 건설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은 히에로글리프(상형문자)라는 독특한 문자와 수많은 신과 내세관을 가진 종교를 만들어냈으며, 후세까지 남아 있는 거대한 석조 건축물들도 건설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이 건설한 거대한 석조 건축물 중에 대표적인 건축물이 바로 피라미드입니다.

피라미드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고대 이집트인은 계단형 피라미드를 '이알', 사각추 피라미드를 '메르'라고 불렀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피라미드라는 명칭은 피라미스라는 사각추 모양의 빵에서 나왔다는 설, 그리스어로 불을 의미하는 '퓨르'에서 나왔다는 설 등 다양한 설이 있지만, 어원 자체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오래 전부터 사카라의 계단식 피라미드('사카라'편 참조)를 비롯해 기자, 사카라(우나스 왕), 마이둠, 다슈르 등 나일 강 서안 지역에 다수의 피라미드가 건설되었지만 그 건설 방법이나 용도에 대한 의문은 아직도 깊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고왕국에서 중왕국 시대(B.C. 2800~B.C. 1600년)를 거치는 동안에도 피라미드는 계속 건설되었지만, 신왕국 시대에는 '왕들의 계곡'에 무덤을 만들기 위해 피라미드가 만들어졌던 것 같습니다.

이집트에서 약 1,200년간 50기 이상의 피라미드가 만들어졌지만,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바로 기자의 3대 피라미드입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자의 3대 피라미드는 수도 카이로에서 남서쪽으로 13킬로미터 떨어진 기자 고원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세 개의 피라미드는 왕의 이름을 따서 쿠푸 왕의 피라미드,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로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와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라는 명칭은 주변의 유적을 통해 판단해서 붙인 것으로, 실제로 두 왕의 명령으로 건설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고 합니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에는 건설에 동원되었던 노동자들이 남겨놓은 낙서 속에 '쿠푸 왕 재위 17년'이라는 흔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피라미드 내부에는 왕의 이름이 쓰여진 경우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쿠푸 왕, 카프레 왕,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를 순서대로 제1피라미드, 제2피라미드, 제3피라미드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 피라미드 콤플렉스 *

  통상적으로 피라미드 본체와 그 주변에 있는 시설을 통칭해서 피라미드 콤플렉스(복합체)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기자의 피라미드 콤플렉스는 대개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와 그 동쪽에 있는 세 왕비의 피라미드, 사원으로 통하는 둑길, 동쪽 마스터바(이집트 왕조 시대 초기부터 알려져 있던 무덤 형태로 피라미드의 원형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진흙 벽돌이나 돌로 만든, 꼭대기가 편평한 4각추형 구조물로 지하 매장실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서쪽 마스타바.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와 남쪽에 있는 위성 피라미드, 동쪽에 있는 장제전(殿 : 장례 의식을 치르는 건물, 스핑크스와 그 남쪽에 있는 신전, 장제전과 신전을 이어주는 둑길.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와 그 남쪽에 있는 세 왕비의 피라미드, 동쪽에 있는 장제전과 신전, 신전으로 통하는 둑길.

그리고 주변에는 피라미드를 만들었던 노동자들의 주거지 흔적으로 추정되는 유적과 마스타바, 석굴 무덤 등도 존재합니다.

마스터바는 이집트 왕조 시대 초기부터 알려져 있던 무덤 형태로 피라미드의 원형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진흙 벽돌이나 돌로 죽은 자는 그 지하실에 매장되었습니다. 사각추 모양의 피라미드 상부를 수평으로 자른 형상이 이집트인들의 접대용 의자인 마스타바(mastaba)와 비슷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고, 피라미드 주위에 있는 마스타바는 쿠푸 왕 신하들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왕비의 피라미드라는 명칭 역시 후세 학자들이 붙인 것일 뿐 실제로 왕비의 무덤은 아니고, 그 규모가 작은데다 왕의 무덤 옆에 붙어 있어서 왕비의 무덤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피라미드 복합체는 피라미드 본체와 장제전, 신전, 신전으로 통하는 둑길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쿠푸 왕의 피라미드에는 장제전과 신전이 없는데, 아마 후세에 파괴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신전이 있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에는 현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촌락이 있었다고 합니다.

각 피라미드에 대한 데이터는 다음과 같다.

왕의 이름 고대의 이름 밑변(m) 높이(m) 경사각도

쿠푸 왕

지평선

230×230

146

51

카프레 왕

위대한 것

214.5×214.5

143.5

63

멘카우레 왕

신성한 것

105×105

65.5

51

 

 표에 나오는 '고대의 이름'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부를 때 사용했던 고유명사입니다.

쿠푸 왕과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가 거의 같은 크기인 것에 비해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는 약 2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는 작은 것일까? 자금난 때문에? 왕의 권력이 약해서 노동력 확보가 어려웠기 때문에? 여러 설들이 분분하지만 확실한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직접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현지인들에게 들은 피라미드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놓았습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피라미드 건설을 지시한 쿠푸 왕은 전국민을 노예처럼 부렸다고 합니다. 10만 명을 3개월간 교대로 동원해서, 돌 나르는 도로를 건설하는 데 10년, 피라미드 본체를 건설하는 데 20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민들을 노예로 부린 것이 아니라 농한기의 실업 대책으로 대규모 건설 사업을 일으켰다는 것이 현재의 유력한 설입니다. 그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한 가지 증거로, 피라미드 건설용 석재를 채취한 채석장에는 노동자들이 써놓은 것으로 보이는 쿠푸 왕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이 어떻게 해서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있었는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길이가 짧은 나무로 만든 기중장치'를 사용했다고만 간단히 언급했을 뿐 상세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피라미드는 주로 석회암과 일부 화강암을 사용해서 만들었습니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에만 약 270만 개, 약 600만 톤의 돌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돌을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쌓아올렸을까요?

피라미드 경사면 앞에 흙을 높이 쌓아서 완만한 경사를 만든 다음 돌을 운반했다는 설과 피라미드 경사면에 나선을 그리듯 흙을 쌓아서 돌을 운반하는 길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일단 정상까지 돌을 쌓아올린 후에는 위에서부터 경사면으로 난 길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피라미드를 완성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 경사면을 이용해 한 단씩 쌓아올렸다는 설이 현재는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경사면에는 돌을 운반하기 쉽도록 나무로 만든 지지대를 설치한 후 로프로 끌어올렸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피라미드 주변에서 발견된 반원형 나무조각을 심도 있게 조사한 고고학자들은 돌 테두리에 반원형 바퀴를 만들어서 운반했을 수도 있다는 추정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즉, 운반할 만한 돌을 바퀴 삼아 운반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상 부근으로 올라갈수록 경사가 급해지기 때문에 이런 방법으로 돌을 운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현대의 건축가들은 헬리콥터처럼 공중에서 돌을 들어올린 다음, 밑에서부터 쌓아올리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하고 있습니다.

 건축 방법 외에도 문제가 있고, 이처럼 거대한 건축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떻게 인력을 관리했느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재 조달이나 운반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다 작업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식량이나 주거공간 확보, 도량형의 통일, 건축가 육성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문제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를 건설에는 지금 기준으로도 몇조 원의 비용이 든다고 합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현대에서도 해결하기 어려운 수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힘이 있었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가 번영을 누렸던 것은 아닐까요?

무엇을 위해 만들었던 것일까요?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이라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전설입니다. 하지만 피라미드가 정말 '왕의 무덤'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피라미드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주장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왕의 무덤이라는 설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은 헤로도토스에 의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역사』 속에서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실제로 피라미드 속에서 석관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의 주장은 피라미드가 만들어지지 않았던 시대의 소문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며, 고대 이집트의 유적지에서 피라미드가 무덤이라고 기록한 문헌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기자의 피라미드뿐만 아니라 이집트 전역에 있는 피라미드 내부에서 유체가 발견된 적도 없다. 더구나 제4왕조의 초대 왕인 스네프루는 다슈르 지역에 '붉은 피라미드(바깥쪽으로 붉은 빛이 나는 석회암을 사용했기 때문에 붉게 보인다)'와 '굴절 피라미드(피라미드의 경사가 도중에 완만해지기 때문에)'를, 마이둠 지역에 '붕괴된 피라미드(피라미드 바깥쪽에 쌓은 돌들이 무너졌기 때문에)'를 건설했습니다. 이 모두는 스네푸르 왕이 만든 것으로, 만약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이었다면 혼자서 세 개의 피라미드를 만들었을 리는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2. 태양신 전설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인 앙드레 포샹은 쿠푸 왕이 태양신을 믿었고, 또 쿠푸 왕의 별명이 '크눔은 나를 비켜준다(하르 크눔 쿠푸)'인 것에 착안해 피라미드는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전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3. 오리온 신앙설
3대 피라미드의 배치에 주목한 이집트의 건설기사인 로버트 보봐르는 피라미드를 오리온자리의 삼성('오리온 삼성')과 연관지어 고대 이집트인들이 오리온을 숭배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피라미드를 지상에 만든 것은 천상을 지상에 재현시키기 위함이었다는 설도 내놓고 있습니다.

앞에 소개한 세 가지 주장 외에도 고대 아틀란티스 문명이 건설했다는 설, 강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만든 거대한 테트라포트(tetra pod : 콘크리트로 만든 물막이용 블록)이라는 설, 신이 남겨놓은 성서라는 '돌의 성서'설, 고대 천문대설 등 황당무계한 것에서부터 충분히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었습니다.

이집트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피라미드가 수십 개나 더 있다고 합니다. 그런 피라미드 속에 피라미드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그 어떤 것들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 것입니다.

 

                     ** 세계 7대 불가사의 피라미드 **

       https://www.youtube.com/watch?v=v-knBX_PR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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