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 문명의 피라미드의 역사>   

 

 

                                                                            

* 기자에 있는 쿠푸, 카프라, 멘카우레의 피라미드 * 

 

 https://www.youtube.com/watch?v=ycPARB3eaS8&feature=youtu.be

 

 

 

  조세르의 뒤를 이은 파라오들은 계속해서 피라미드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임호테프와 같이 뛰어난 건축가가 없어서인지 그 중에 많은 것이 미완성으로 그쳤거나 또는 공사가 조잡해 세월의 흐름과 함께 단순한 돌무지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제3왕조의 마지막 왕인 후니(기원전 2575년경)가 계단식 피라미드를 완성한 후에, 그 계단을 메워 나가는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형태의 피라미드를 처음으로 만들게 됩니다.

 뒤를 이은 제4왕조의 첫 왕인 스노페루는, 다슈르에 반쯤 완성되었다가 말았지만, 큰 피라미드 위에 작은 피라미드를 얹은 모습의 과도기 형태의 벤트 피라미드(Bent Pyramid)를 건립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슈르에서 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자신이 묻힐 피라미드를 세웠는데, 그래도 이러한 피라미드들은 피라미드 건설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고, 그의 아들 쿠푸 왕의 등극과 함께 드디어 피라미드 시대는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게 됩니다.

쿠푸는 현재 카이로 교외에 있는 기자에 대() 피라미드를 세운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인류 문화유산의 최대의 불가사의로 꼽는 바로 그 피라미드인 것입니다. 이것은 폭이 233m나 되며 면적은 12. 5에이커에 이릅니다. 또한 높이는 144m에다 총 201층의 거대한 바위벽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제일 아래층의 벽돌 1개의 높이가 1.5m로 가장 높고, 점점 올라갈수록 작아져서 제일 꼭대기에 쌓인 벽돌의 높이는 53㎝입니다.
이 피라미드를 세우는 데 총 260만 개의 돌이 사용되었고, 그 무게는 700만 톤에 이릅니다. 이 바위벽돌들은 주위의 돌산에서 잘라, 피라미드가 세워질 장소로 옮긴 뒤에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그렇다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와 같이 거대한 돌을 어떻게 쌓아 올렸을까요?

당시는 아직 철기 또는 청동기가 본격적으로 발명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러나 제2왕조 때부터 석재 건축일을 해온 고대 이집트 석공들은 가히 최고의 경지라고 할 만한 석재기술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돌로 만든 망치와 돌보다 부드러운 구리로 만든 정과 톱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은 먼저 사용할 돌의 눈을 유심히 주목한 다음에 돌망치로 돌 눈의 방향에 구멍을 깊게 팠습니다. 구멍이 파이면 그곳에 단단한 나무로 쐐기를 박았고, 다음 위에 가만히 물을 부으면 나무가 팽창하면서 그 힘에 의해 돌 눈이 쪼개져 나왔습니다.

 석재는 풍부했습니다. 대부분의 석재는 기자 부근에서 구했고, 피라미드의 겉을 장식할 아름다운 석회암은 나일 강가에서 구해 배로 실어왔습니다. 또 현실()에 쓰일 화강암은 남쪽의 아스완에서 배로 실어왔습니다. 실어온 돌을 아름답게 깎고 다듬는 데는 구리톱이 사용되었습니다. 구리톱으로 돌을 자르면 톱날은 쉽게 못 쓰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르는 부분에 수정가루와 특수한 모래를 바르고 물을 뿌려가면서 잘랐습니다.

 이렇게 가공된 돌을 사막 위에 그냥 쌓아 올리면 무너지기 때문에, 사막보다 높은 암석지대를 평평하게 만들어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각각 가로, 세로가 230m 이상이나 되는 암석지대를 평평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밑바닥이 평평하지 않으면 돌을 쌓아 올려도 무너져버릴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암석지대를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석공들은 피라미드를 4각으로 에워싼 입 구()자 모양의 수로를 어망의 눈처럼 가로와 세로로 파 이곳에 물을 부었습니다. 수면을 기준으로 암석을 평평하게 깎는 것입니다. 현대의 기술로 이 수평면을 측량해보면 남동쪽의 모퉁이와 북서쪽 모퉁이의 오차는 불과 20㎝이며, 방위의 오차는 2~5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10만 명의 노예들과 4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현대의 고고학자들은 피라미드의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 수는 약 4,000명 정도이며, 그들의 신분도 노예가 아니라 공공사업에 징발된 자유인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피라미드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쌓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먼저 피라미드 위쪽에 돌을 쌓아올리기 위해 피라미드의 네 변을 따라 벽돌과 돌로 비탈길을 닦았습니다. 비탈길은 모두 피라미드 네 변에서 시작해 각각 꼭대기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중에 3개의 비탈길은 돌을 운반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일을 마친 사람들이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20명씩 한 조를 이루어 무거운 돌을 끌어올렸습니다.

 그러나 수 톤이나 되는 돌도, 통나무 2개를 나란히 깔고 삼나무 열매기름을 부어가며 수레에 실어 끌면 많은 힘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정원석을 옮길 때 곧잘 쓰이는 방법입니다. 노동은 고되었지만 파라오를 위한 노동에 오히려 즐거움을 찾는 충성스런 노동자들이 많았습니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문서 가운데는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 신을 위해 드리는 근사한 제사 때처럼 빵을 배부르도록 먹고 맥주를 마셨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피라미드 건설은 이집트의 왕 파라오가 전력을 기울인 대사업이었습니다. 쿠푸 왕의 뒤를 이은 제4왕조의 제드흐라 · 카프라 · 멘카우레 · 세프세스카프 왕들도 연이어서 제각기 피라미드를 건설했습니다. 그중에서 쿠푸의 피라미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외관상의 아름다움은 물론 복잡한 내부구조도 가장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조금씩 크기가 작은 카프라와 멘카우레의 피라미드들이 이어져 있는데, 이 세 피라미드들이 바로 대표적인 기자의 대 피라미드들로 가장 유명합니다.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만으로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외적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이끌어줄 지도자로서의 파라오가 필요했습니다. 이집트 전역은 '파라오의 토지'였고 이집트 농민은 '파라오의 백성'이었습니다. '나일 강의 선물' 이라고 일컬어지는 기름진 토지도 저수지와 관개용수가 없으면 많은 수확량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해마다 사막의 모래에 묻힌 저수지와 운하를 수리해 새 운하를 만드는 일은 파라오 휘하에 직속된 토지관리부서의 일이었습니다. 또한 이집트는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생활에 필요한 금, 은, 동, 나무, 보석 등을 외국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역로의 안전을 위해 대상과 상선들은 군대의 보호를 받아야 했습니다. 군대는 파라오가 임명한 장군이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에 매장된 구리산을 독점할 수 있었던 것도 파라오의 군대 덕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파라오는 이집트 번영의 근간이자 기초였습니다.

  현재 이집트에 남아 있는 피라미드의 수는 약 80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 왕국 5천 년 역사에 기록된 파라오들의 숫자에 비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였습니다. 왜냐하면 피라미드가 한창 만들어진 시대는 500년간의 고왕국 시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피라미드 건설은 대 역사였습니다. 가장 규모가 큰 쿠푸 왕의 피라미드가 만들어지고 나서 60년 후에 즉위한 파라오조차 피라미드 건설을 단념하고 옛날의 마스타바 식()의 무덤으로 만족해야 했다. 피라미드 건설과 유지가 국가 경제에 너무나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