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원전 220년 진시황(秦始皇, BC 259~BC 210)은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통합된 방어 산성을 쌓기로 하였습니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축조는 그 후 명나라 시대(1368~1644)까지 계속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장대한 규모의 군사시설물  되었습니다. 이는 역사적· 전략적으로 중요한 성벽인 동시에 건축학적으로도 탁월한 유적인 것입니다. *

 

                                               

 

 계에서 가장 긴 인공 건축물로, 가장 오래된 부분은 기원전 221년에 축조되었습니다.

 만리장성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정말로 우주에서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대단한 건축물 중 하나이다. 세계에서 가장 긴 인공 건축물인 만리장성은, 동쪽의 로프 누르에서 서쪽의 산하이관까지 중국 북부를 따라 약 6,350㎞나 뻗어 있습니다.

기원전 221년, 중국이 최초로 통일되었을 때 새로운 진 왕조의 황제는 북쪽에서 흉노족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성벽을 축조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때의 성벽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아주 적은 사료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가장 대규모였던 축조 단계는 명나라 때로, 15세기 후반이었다. 명나라 황제들은 호전적인 이웃 몽골 족을 막기 위해 성벽을 건설하기로 결심했던 것이었습니다. 성벽이 놓이는 지역에 따라 그곳에서 구할 수 있는 자재에 따라 건축 기법은 다양하지만, 벽돌과 석재를 혼합한 구조가 가장 흔했습니다.    성벽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망루가 세워졌으며, 매우 정교한 통신 체계 덕분에 적군의 움직임을 감시할 수 있었고, 성벽 그 자체도 지원군이 그 위로 달려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어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적군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성벽에 배치되는 주둔군들을 수용하기 위해 큰 요새와 병영 또한 지어졌습니다.

중국이 결국 북쪽의 만주족에게 정벌당해 1644년부터 청나라 왕조가 형성되면서, 벽은 사용되지 않고 방치하게 되었습니다. 청나라의 영토는 만리장성보다 더 북쪽으로 뻗어나갔으므로 이러한 방어벽은 거의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성벽의 일부는 잘 보존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풍상에 침식당하고 지역 주민들이 건축 자재로 쓰기 위해 뜯어간 끝에 현재 매우 열악한 상태입니다.

 

 달에서도 볼 수 있는 장대한 건축물                                                                                        

지구상에 존재하는 유적 중에 최대 규모의 유적을 들라면 단연 만리장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동쪽 하북성 산해관에서부터 서쪽 감숙성 자위관에 이르기까지 주요 부분의 길이만 3,000킬로미터로, 이는 한반도의 세 배가 넘는 거리다. 또한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만리장성의 흔적을 모두 합치면 총 길이는

무려 1만 2,000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세계 최대의 건축물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장대한 건축물은 어떤 왕이나 제후 한 사람 생각에서 비롯되었지만, 한 세대 만에 축조된 것은 아닙니다. 중국 역사 속에 등장하는 여러 왕들이 외적과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몇 세대에 걸쳐 만리장성을 건설했던 것입니다. 만리장성이라는 말은 사마천의 『사기()』에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서 사마천은 진시황제가 쌓아올렸던 만리장성이 '1만여 리'(1만 리에 가까운)의 길이를 자랑했다고 기록해놓았습니다.

 

2천 년 동안 계속 만들어진 건축물

만리장성의 기원은 B.C. 7세기 전후의 춘추·전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중원 지방에서 군웅할거하던 여러 나라는 자국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중요한 지역에 성벽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 조(), 진()은 북쪽 흉노족의 침입으로부터 영토를 지키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기도 했습니다.

B.C. 221년에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자 전국 시대 때부터 존재했던 각지의 성벽을 하나로 통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각지에 흩어져 있던 장성을 연결함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방벽이 만들었던 것입니다. 만리장성의 기초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B.C. 133년 이후, 흉노족의 침입이 다시 활발해지자 한() 무제에 의해 장성의 복원과 확장이 이루어졌고, 무제는 장성 각지에 봉화대 등의 연락망을 설치하게 하고, 방어체제를 한층 더 강화시켰습니다.

그 후 계속적인 수리와 확장이 이루어진 만리장성은 1368년 명()의 태조 주원장이 현재의 북경 주변까지 새로운 장성을 건설하여 확장시켰으며, 1567~1572년에는 융경제()가 472개의 파수대를 설치하여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실로 2,000년 이상의 긴 세월을 거쳐 완성된 만리장성은 그 대부분이 명대()의 것으로 진시황제 이전에 건설된 장성은 현재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군사 방어시설로서의 만리장성

만리장성은 평화로운 시절에는 교역시 발생하는 관세를 거둬들이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유사시에는 방위의 필수 요소인 성벽으로 기능했으며, 병사들의 군사 거점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또한 봉수대는 적의 침입이나 긴급한 상황을 통보해주는 유력한 통신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성벽의 높이는 평균 7.8미터이며, 폭은 5~10미터로 간선도로 역할도 하기도 했습니다. 즉, 자재 운반과 군대의 이동용 통로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진()·한() 시대에는 판과 판 사이에 흙을 집어넣어 위에서부터 굳게 하는 판축공법()을 사용해서 대부분의 성벽을 축조했습니다. 그리고 명대에는 벽돌과 석탄을 사용해서 쌓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만리장성은 막대한 인적 자원과 자재가 투입된, 중국 왕조의 강력한 권력을 엿볼 수 있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중국인들이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방어용 성벽을 유럽인은 ‘중국의 성벽(Wall of China)’ 혹은 ‘대성벽(Great Wall)’이라고 부릅니다. 탁월한 성벽 구축의 역사는 춘추시대(BC 722~BC 481)와 전국시대(BC 453~AD 221)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성벽 건설은 기원전 408년 위()나라가 진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은 성벽처럼 봉건적인 갈등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중국 중심부에 보존된 유적들에 따르면 기원전 300년 무렵 북방의 침략자에 대항하여 진·조()·연()나라가 축성한 성벽들보다 먼저 축성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원전 220년 통일된 진나라를 건국한 진시황은 기원전 3세기 혹은 그 이전 시대에 구축된 몇몇 성벽을 연결시켜 재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내몽골의 오르도스(Ordos)에서부터 만주까지 성벽을 증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206년 한나라가 들어서기 이전에 이미 최초의 통합 방어체계로서 성벽을 서쪽으로 확장하였고, 시대에 만들어진 성벽의 모습은 황허() 유역의 계곡 지대와 란저우()에 여전히 중요한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만리장성은 그 이후 더 확대되었는데, 한()나라의 무제(, BC 140~BC 87)는 중국 서쪽의 둔황 지역부터 동쪽의 보하이만()까지 약 6,000㎞에 해당하는 성벽을 더 지었습니다. 중국 북방 경계지역에서는 몽골족·투르크족을 비롯해 초원 지대 최초의 제국인 흉노 제국의 퉁구스족 등의 침략 위험이 커짐에 따라 이전보다 더욱 견고한 방어책이 필요했던 것이었습니다.

서기 200년 한 왕조가 몰락하자 만리장성은 중세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방어책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만리장성을 증축하거나 유지 관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몽골족의 멸망으로 오랜 갈등 기간을 끝낸 뒤 명나라는 진시황의 성벽 구축의 전통을 부활하여 5,650㎞에 이르는 성벽을 구축하게 했습니다.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만리장성은 수비대가 아닌 군이 관할하는 9개의 진() 체제로 관리되었습니다.

요새는 마을, 산길, 여울을 방어할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지었습니다. 성벽의 맨 위쪽 길은 군대가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게 하고 연락병의 이동도 가능하게 했습니다. 2개의 상징적인 기념물이 오늘날까지도 성벽의 양 끝에 서 있습니다. 동쪽 끝 산하이관()이 첫 번째 성문이고, 1949년 이후에 완전하게 복구된 요새 자위관()이 북서쪽 끝에 있는 마지막 성문입니다.

만리장성은 복합적·통시적() 문화재로서 2,000년 동안 오직 전략적 목적으로 유지된 군사 건축물의 특별한 사례입니다. 그리고 성벽 건설의 역사는 방어 기술과 정치 상황의 변화에 따라 계속 발전했습니다. 만리장성의 목적은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고, 동시에 침략자들의 관습으로부터 중국인의 문화를 보존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벽의 축조 과정 중에 백성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만리장성에 대한 이해는 중국 문학을 이해하는 필수 요소이기도 하였습니다.

명나라 시기의 만리장성은 거대한 공사를 수행하기 위한 대담성뿐 아니라 건축학적으로 완벽성을 지닌 걸작이었습니다. 광대한 대륙의 경치와 어우러진 성벽은 완벽한 건축물의 예입니다. 춘추시대 중국인들은 북쪽 변방을 따라 방어벽을 구축하면서 독자적인 건설 공법과 공간 구조를 확립하였습니다. 또한, 만리장성 공사에 동원하기 위해 인구를 이동시킴으로써 중국 인구의 확산이 두드러졌습니다. 만리장성은 탁월한 고대 중국 문명에 대한 증거입니다. 당시 명나라는 간쑤() 지역에 남아 있는 서한(西) 시대 진지 안에 흙을 다져 채워 넣는 방식으로 축성하였습니다.

등재기준

기준 (ⅰ) : 명나라 시기에 건축한 만리장성은 대담한 공사 수행의 특징뿐 아니라 건축학적 완벽성을 갖춘 절대적인 걸작입니다. 만리장성은 광대한 대륙의경치와 어우러진 완벽한 건축물의 예입니다.

기준 (ⅱ) : 춘추시대 중국인들은 북쪽 국경을 따라 방어벽을 구축하면서 독자적인 건설 공법과 공간 구조를 확립하였습니다. 중국의 확산은 만리장성 공사에 동원된 인구 이동으로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기준 (ⅲ) : 만리장성은 고대 중국 문명의 탁월한 증거입니다. 간쑤 지역에 남아 있는 서한 시대 진지 안에 흙을 다져 채워 넣는 방식으로 건축한 성벽은 명나라의 놀라우면서도 보편성을 지닌 축성술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기준 (ⅳ) : 만리장성은 복합적이고 통시적인 문화재로서 2,000년 동안 오직 전략적 목적으로 유지된 군사 건축물의 특별한 사례입니다. 하지만 성벽 건설의 역사는 방어 기술과 변화하는 정치 상황 속에서 계속 발전했음을 보여 줍니다.

기준 (ⅵ) : 만리장성은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입니다. 성벽의 목적은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는 동시에 침략자들의 관습으로부터 중국인의 문화를 보존하는 데 있었습니다. 성벽의 축조 과정에는 중국 백성들의 고난이 내포되어 있고, 그것은 중국 문학사상 중요한 작품인 진림(, AD 200년경)의 『음마장성굴행()』이나 두보(, 712~770)의 시, 명나라의 소설 등 작품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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