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게리


(1929 ~ 현재)



2000년대 캐나다, 미국의 거장 건축가인 그는 해체주의 건축을 대표합니다.


1989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습니다. 



유명하지 않는 지역을 랜드마크로 변모하는 방법중에 하나는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건축물이 그곳에 들어서는 것일 것입니다.


그의 업적으로는 바스크 지방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도시인 빌바오에 프랭크 게리의 외장이 마구 뒤틀린 듯한 외양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한 것입니다. 미술관을 유치하면서 관광객이 급증하여 이른바 '빌바오 효과'를 일으키며 그는 일약 스타덤에 올라서게 됩니다. 


그는 약 2008년 초중반까지 전성기를 유지하였으나 현재로서는 건축계에서 사실상 흑역사로 취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건축의 3대 요소인 기능, 구조, 미 중 구조적인 측면에서 취약한 그의 건축물때문입니다. 예전의 각광받던 때와 현재의 대접은 엄청난 차이를 띄고 있습니다. 그는 설계적인 문제를 무시하고 독특하게 뒤틀린 외양에만 집착했다는 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이 건물에 물이 샌다든지 건물에 크랙이 발생하는 등의 문제가 여러 언론에 노출되었습니다. 


이렇듯 많은 비판을 받는 그이지만 그래도 그의 건축 영향력이 완전히 무시되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그의 추종자도 많이 유지되고 그의 건축론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또한 해체주의 자체가 아직도 현재진행중이고 대안이 나오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노먼 포스터


(1935년 ~ 1983년)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건축가인 그는 영국 잉글랜드 스톡포트의 레디시에서 노동자인 부모아래에서 외동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항공기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졌었었고 그 덕분에 영국 공군에 입대를 결심하게 됩니다. 


군에 제대하고 1956년 맨체스터 대학교 건축&도시설계 학부에 입학한 그는 건축과 도시계획을 공부하면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와 미스 반 데어로에, 르 꼬르 뷔지에, 오스카니 마이어 등 유명 건축가들의 작품에 큰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이후에 1961년 맨체스터 대학교를 졸업하고 예일 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며 훗날 건축 설계 파트너가 될 리처드 로서즈를 만나게 됩니다.


리처드 로저스와 일 년간 미국을 돌아보며 여행하고 돌아온후 노먼 포스터는 1963년에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여행을 하며 친해진 리처드 로저스와 건축설계팀인 'Team 4'를 결성합니다. 이들은 하이테크 산업 디자인을 바탕으로 한 디자인을 앞세워 순식간에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그 후로 Team 4가 해체되고 1967년 노먼 포스터와 그의 아내인 웬디 치즈먼은 현재의 건축설계회사 'Foster and Partners'의 전신인 'Foster Associates'를 결성하게 됩니다. 1968년 부터 미국인 건축가 리처드 버크민스터 플러와 협력하여 그가 죽기 전까지 사뮈엘 베케트의 극장 프로젝트를 포함하여 친환경적인 디자인 건축물들을 만들게 됩니다. 그 후에 다양한 건축물들을 설계하며 세계적인 건축가로 인정받게 됩니다.



홍콩의 HSBC 빌딩




385피트의 고층건물인 런던 밀레니엄 타워 - 친환경적인 건물로 유명하다


미국 뉴욕의 허스트 타워


한국타이어의 테크노돔

라파엘 비뇰리

(Rafael Vinoly, 1944 ~ 현재)

 

그는 비록 남아메리카의 가장 작은 나라중 하나이지만 교육과 문화적인 면에서 깊은 전통을 지닌 우루과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국립 오페라 극장의 감독이었으며 남미 전역을 돌아다니며 그 당시 유명했던 모든 예술가들과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비뇰리가 어렸을 적에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였고 아버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오페라극장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한편 라파엘 비뇰리의 어머니는 건축학을 공부하다가 수학으로 진로를 바꾸었고, 이러한 환경덕에 비뇰리는 일찍이 예술과 그외의 다양한 직업을 택하게 됩니다. 그는 건축가로서의 인생이 얼마나 힘이드는지 일찍이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음악보다 건축일을 하는 것이 오랜 기간동안 예술 활동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건축가로 진로를 결정하게 됩니다. 현재는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고 그가 쓰는 언어는 집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합니다. 미주 대륙을 옮겨 다니며 생활한 탓에 영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의 첫 작품은 18세때 대학에 들어갔을 때 학교에서 실시한 목공소 건물 설계였습니다. 32살이 되던해에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됩니다.

종로타워의 디자인은 건축주가 프로그램상으로 요구하는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시설로 만들기 위해 기존 구조물의 리노베이션 및 건축적인 재구성 공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복궁과 종묘 사이 서울 종로구 시내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이 건물은 원안의 기본적인 틀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기존 건물의 구조에는 최소한으로 손을 댔습니다. 도시 계획적인 관점에서보 때 부지의 코너에서 뒤로 후퇴하여 조성된 공공 공간은 건물 내에서 일어나는 각종 활동과 지하 광장과 확실한 연계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건물 디자인의 핵이 되는 건축적 해결책은 두 가지 기본 원칙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보다 공공적인 건물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 그리고 하나의 건축 구조물을 교육과 체험을 촉진시키고 회사의 전자 및 기술적인 분야의 발전상을 과시하는 매치로 변모시키는 것입니다. 많은 유동인구로 항상 붐비는 사거리에 위치한 이 건물은 대지의 한 코너를 본질적으로 공공적인 성격의 도로와 건물 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활동을 중재하는 요소로 변화시키려 합니다.

 

코너 부분이 오픈되도록 계획된 건물은 거대한 "도심 캐노피"로 덮여 야외 도심광장을 정의 내리게 됩니다. 이 철재와 유리로 이루어진 구조물은 도시와 건물 양쪽에 속하면서, 현재 건물의 에워싸인 성격을 외향적인 오픈 건축구조로 변환시키는 구역인 전이의 공공공간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이용 가능한 볼륨의 입면 최상부에서 건물 정면을 뛰어넘어 캔틸레버로 되어있습니다. 장력용 부재시스템은 캐노피 가장자리로부터 동양사이 투영되는 합성 오픈 메쉬 재료를 이용한 반투명 띠로 구성된 내부로 후퇴되는 커다란 스크린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각종 정보와 건물 내부의 활동은 건축물이 도시의 시각적인 관심거리가 되는 -"새로운 지평선"의 물질적인 표현을 통해서 도시로 디스플레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지표면 한층 반 아래 레벨에서 위와 유사한 도시와의 연계방법으로 지하 도심광장을 이용하여 건물이 기존의 지하철 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건물의 유리 입면은 하부로 연장되어 일련의 1,2층 그리고 3층 높이가 복잡하게 뛰섞여져 있는 아트리움공간을 만들어 내며, 도시와 건물 사이의 경계에서 광장 입구와 각종 상점 그리고 음식점이 들어선 지하철역으로 연결하고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그 외 아트리움 층 배면부에 위치한 거대한 멀티 비디오 스크린 시스템은 시각적으로 건물의 4개층을 연결하는 "정보의 벽"을 형성하여 건물 내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감지하는 시각적 이정표 역할을 합니다. 이정보의 벽은 선형 공간의 모체를 이루는 연속성을 확립할 뿐 아니라 건물 내 주광고판이 되어 사실 같이 느껴지는 깊이를 준다. 건물의 현태는 기존 평면모양(수직동선 코어)으로 3개의 튜브모양 부재의 수직연장과 돌출을 통해서 탄생되었으며, 이 건물을 아주 먼 거리에서도 눈에 잘 띄느 주요 랜드마크로 변모시킵니다.

자하 하디드

 

(1950. 10. 31 ~2016. 03. 31)

 

 

 

 

자하 하디드는 이라크에서 태어난 영국의 건축가 입니다. 그녀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해체주의 건축으로 유명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동대문에 건축의 물결을 펼쳐놓은 주인공입니다. 서울 한복판인 동대문 지역에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가 설계하는 거대한 물결 모양의 랜드마크 건축물이 들어선다는 점에서 건축계 최고의 화두로 꼽혔었습니다.

 

그녀는 '남자판'인 건축계를 재능으로 뚫은 여성 건축가입니다. 자하 하디드는 이 시대 최고의 여성 스타 건축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보수적인 건축계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극소수 여성 건축가 가운데에서도 가장 스타급이며, 2004년 여성 건축가로는 처음으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하는 프리츠커상을 받았습니다. 또한 실험적이고 개념적인 건축 이론가로 일찌감치 스타로 떠올랐지만 좀처럼 실제 건축 작업을 하지 못하며 '건축물이 없는 건축가'로 지내다가 기회를 얻자마자 주목받는 작품들을 선보이며 스타로 떠오른 저력의 건축가 입니다.

 

1950년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태어난 자하 하디드는 수학을 전공하다가 1972년 영국의 명문 건축학교인 런던 건축협회학교(AA)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후 런던에서 활동하면서 하디드는 '페이퍼 아키텍트'로 유명해졌습니다. 페이퍼 아키텍트는 실제 지을 건물보다는 개념적이고 실험저인 건축 아이디어를 도면상으로 시도하는 건축가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새로운 건축 구상으로 여러 국제 공모전에서 잇따라 우승하며 주목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독창적인 건축물은 '실제 지을 만한' 또는 '돈 되는' 건축이 아니라는 선입견을 주는 바람에 정작 실제 건물 설계를 맡기는 건축주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자기자신을 증명해 보인 데뷔작이 바로 독일 비트라의 소방서 건물(1993년 완공) 입니다.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위치한 비트라 소방서

 

겉으로 보기에는 세련된 박물관처럼 보이지만 이곳의 원래 모습은 바로 소방서 입니다. 1992년에 지어진 이 비트라 소방서는 비트라 가구 공장에서 만들어진 건축물입니다. 건물의 각도를 급상승 하강의 모습을 띄며 강한 인상을 보여줍니다. 비트라 소방서는 현대건축물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던 회사대표의 열정 덕분에 탄생했다고 합니다. 비트라 회사 대표인 알렉산더 본 베제삭은 독일에서 스위스와 프랑스와의 경계선 부분에 있는 자신의 큰 공업 부지에 독창적인 건축물을 지어줄 감각 있는 건축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찾은 런던에서 활동하던 이라크 출신의 그당시 젊은 건축가 자하 하디드를 만나게 되었고 비트라 소방서를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독일 기업 비트라는 각종 회사건물을 세계적인 건축가들에게 맡기는 것으로 유명한데, 과감하게 하디드에게 기회를 주었고 하디드는 건축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며 마치 조각품 같은 모양의 건물로 이름값을 해낸 것이 었습니다. 이 건축물은 현대 건축의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자하 하디드의 첫 독립작품인 비트라 소방서, 그녀는 런던 건축회사에서 경력을 쌓으며 러시아 혁명 때 혼란의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들을 보며 많은 디자인 영감을 얻었습니다. 비트라 소방서는 한의 긴 덩어리로 되어있습니다. 한쪽 끝은 넓고 높은 지붕이 있는 소방차 공간이 있고 다른 한쪽은 2층으로 이뤄진 숙소와 지붕 테라스가 있습니다. 바일 암 라인 마을이 점점 발전하며 규모가 커지면서 시에서는 더 큰 소방서를 지어야 했습니다.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받은 자하 하디드의 비트라 소방서는 현재로서는 더 이상 소방서 본래 용도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비트라 미술관 소장품의 전시회가 열리는 전시 공간과 창고로 사용하며 아직까지 많은 방문객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후에 자하 하디드는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의 스키 점프대(2002), 독일 라이프치히 베엠베(BMW) 빌딩(2005) 등을 설계하며 건축주들이 가장 건물을 맡기고 싶어하는 건축가가 되었습니다.

 

하디드의 건축 디자인은 1920년대 러시아 아방가르드 건축가들의 영향을 받았는데,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반적으로 80년대를 풍미했던 '해체주의' 건축가로 꼽힙니다. 그의 건축물들이 독특한 구조나 형태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디드의 최근 작품들은 그 특유의 파격적이면서도 부드럽게 부유하는 듯한 역동적인 건물 구조가 두드러집니다. 동대문 운동장 터에 들어선 디자인 센터와 공원디자인도 하디드 특유의 미학을 담고 있습니다.

 

 

 

동대문 공원 (DDP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는 제대로 된 랜드마크인가?

 

스페인의 쇠락한 공업도시 빌바오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유명해지고, 영국 런던이 노먼 포스터가 디자인한 독특한 모양의 시청으로 도시에 명소를 더하는 등 '스타 건축물'이 도시 경쟁력을 높이는 관광ㅈ원으로 각광받는 시대가 되면서 건축에 대한 사회경제적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명 건축가의 작품을 명품 구매하듯 들여오는 것이 꼭 정답은 아니지만 서울이 세계적 도시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유명 건축가들의 화제작이 어느정도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컸습니다. 자하 하디드가 DDP의 설계를 맡은 것도 더욱 늦기 전에 그러한 흐름을 따라가려는 서울시의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리차드 마이어

(Richard Meier, 1934 ~ )

 

 

리차드 마이어는 소문 없이 자신의 건축언어를 일관성 있게 유지, 발전시켜 왔습니다. 모더니즘의 시학, 테크놀러지의 아름다움과 실용서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건축은 하나의 전통이며, 기나긴 연속체 입니다. 전통과 단절하든지 아니면 이를 강화하든지, 우리는 여전히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작업은그렇게 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르는 질서를 찾아내고 다시 정의하고, 어떤 용도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시도라고 그는 분명히 말합니다.

 

초기에는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사상과 동일 하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통하여 자신의 디자인 원리를 확고히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지속적으로 백색건축을 발전 시켜온 탓에 [게티센터]와 같은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는 행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독자적 접근 방법은 초기 주택에서부터 공공 건축이나 뮤지엄 건축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며, 그의 작품이 선명한 것은 그의 건축 이념인 논리적 사고가 정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언제나 신선하지만, 그와 반대로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간에 대한 그의 관심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공간이 아니라 분명하고 적절한 체적을 가진 공간이어서 쾌적함을 느낍니다.

 

그는 많은 뮤지엄 건축을 디자인 하면서도 백색건축으로 일관해온 건축가입니다. 특히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게티센터]는 좀 더 성숙되고 완결된 백색건축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건축이념은 르코르뷔지에와 알바 알토의 이념을 자신의 작품에 대입시켜 꾸준히 발전시키면서 이루어졌으며, 제2세대를 대표하는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로부터 사사를 받으며,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건축을 통해 실용적이면서도, 명료하고, 복합적이며, 고도로 세련되고, 절제되고, 위엄 있으면서도 편안한 시적인 공간을 실현해왔습니다.

 

그의 관심사와 연구계획은 뮤지엄 건축 및 전시 분야와 실내환경디자인 분야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새로운 문화적 경험 축적을 위한 답사 준비에 오늘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백색의 건축가 일까요??

 

미국의 현대 건축가 리차드 마이어는 로버트 벤츄리, 케빈 로쉬, 프랭크 게리와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제3세대 건축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1960년대 뉴욕의 진보적인 건축가 그룹 '뉴욕 파이브' 멤버 중의 한 사람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미국 내의 인지도를 높여 갔으며, 1980년대 부터 세계적으로 신망을 받는 건축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이는 그가 일관성 있는 작품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스타일인 백색건축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으며, 자신만의 순수한 건축 이론과 이 시대의 건축 문화를 접목시키고자 꾸준히 노력한 결과 입니다. 그의 모든 작품은 디자인 논리를 다이어 그램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모든 작품의 디자인 체계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건축가로 유명합니다. 특히 푸랑크푸르트의 [장식미술관]이나 아틀란타의 [하이뮤지엄]과 같은 세계적인 프로젝트 지명설계 경기 공모에 당선되어 21세기 건축을 이끌어 가는 세계적인 건축가로 그 명성을 더해 가고 있습니다.

 

그는 매 작품마다 자연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자연축과 주변 조건으로부터의 대지축을 찾아 배치 계획에 반영, 정확한 프로그램을 통한 공간 구성, 합리적인 건축 구조 체계, 인지도를 높인 위치에 입구 설정 등 시각, 지각적 원리를 이용한 디자인 적용, 체계적인 수직 동선의 위치 설정, 공간을 에워싸는 윤곽 등을 통해 논리적인 디자인을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논리 전개 방식은 모든 작품마다 다이어 그램을 이용하여 검증이 가능합니다.

 

마이어의 작품집 서문을 쓴 조셉 리크웰트는 그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리차드 마이어는 동시대 작가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면서도, 일관성 있게 그의 작품 특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의 비판자나 옹호자들 마저도 르코르뷔지에의 연장선에서만 마이어를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이 같은 논의를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의 스타일은 누구의 것을 계승한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그 자신의 것임을 주장해 왔습니다. 신중한 성격의 마이어는 정신적 혼란에 시달리면서도 "백색건축"에 빠져 들었으며 이를 대처할 대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백색 건축의 절정을 이룬 [하이뮤지엄]

 

마이어는 백색을 좋아 합니다. 백색에 관한 철학은 그의 작품집이나 연설문을 통하여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백색은 모든 자연색 내에 존재하는 가장 기본적인 색체로 백색표면을 이용하면 딱딱한 벽과 부드러운 개구부 그리고 빛과 그림자의 연출이 가능합니다. 백색은 전통적으로 완벽함과 순수함 그리고 명료함의 상징이며, 가장 인상적인 색채이므로 나의 작업에서 가장 개성적인 특성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백색을 이용하면 시각적인 형태의 힘이 강화되고 건축개념이 명백해집니다. 또한 백색은 추상적 공간이나 스케일 그리고 자연과의 조합과 관련 하여 공간을 정의하고 질서화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또한 "백색은 가장 아름다운 색이며, 항상 빛에 의해 전달되고 변화되며, 하늘과 구름과 태양 그리고 달이 그러하듯 백색은 항상 순결의 상장이며, 다른 색들은 그들의 배경에 의존한 상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나 백색은 절대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백색을 좋아합니다.

 

따라서 그는 규격화된 백색 재료로 일관성있게 백색건축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독특한 그의 건축기호가 되었습니다. 그의 백색건축은 낮에는 밝게 빛나고 밤에는 은빛을 내면서 항상 변화하는 힘을 가짐, 이로 인해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백색건축의 찬미자인 마이어의 주요작품은 크게 1960년대 주거건축과 1970년대 공공건축, 그리고 1980년대 이후 뮤지엄 건축으로 구분됩니다.

 

1990년대 대표적인 주거건축으로는 [스미스 하우스(Smith house)], [더그라스 하우스(Douglas House)]등 많은 백색주택을 들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쉽게 세상에 알려질 수가 있었고, 1970년대에는 브롱스에 있는 [재활센터(Bronx Developmental Center)]를 비롯한 공공 건축 작품, 그리고 1980년대 이후 프랑크푸르트의 [장식미술관(Museum for Decorative Arts)]을 비롯한 뮤지엄 건축들을 통하여 신임 있는 세계적인 건축가로 인정받게 됩니다.

 

오랫동안 일관성 있게 유지해왔던 백새건축 시대를 결산하고 방향전환을 시도하겠다던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게티센터(Getty Center)] 프로젝트도 결국은 그 동안으 백색건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건물에서 그의 백색건축은 절정을 이루었으며, 그는 백색건축의 찬미자로 인정되어집니다.

 

그가 백색 건축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것은 자연 속에서 정형적 형상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려는 의도 였으며, 그로 인해 대중들에게 큰 감명을 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게티센터]와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는 도시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디자인과 자연의 통합작업을 이루는데 성공한 사례라고 생각 됩니다.

 

 

그의 성장 배경과 건축 이념

 

리차드 마이어는 1943년 미국 뉴저지 주 뉴와크에서 태어나 코넬 대학에서 건축교육을 받았으며, 1957년 졸업 후 그림 공ㅜ를 하다가 6개월 간의 유럽여행을 통해 건축에 대해 많은 감명을 받습니다. 그 기회에 대학 재학시설부터 흠모했던 르코르뷔지에나 알바알토를 직접 만나 그들의 사무실에서 일할 것을 부탁해 보았으나 성사되지는 않았습니다.

 

마이어는 르코르뷔지에의 영향에 대해 스스로 "내가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을 모르고 애정이 없었다면 나의 건축물을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그가 공간을 창조하는 방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963년뉴욕의 [근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에서 열린 르코르뷔지에 작품전시회는 뉴욕파이브 맴버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마이어에게는 이것이 자신의 건축 사무소를 개설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마이어는 주로 표현주의적인 회화와 복잡한 콜라주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예술가인 프랭크 스텔라와 가까운 친구가 될 정도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그의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면서 필라델피아의 분수 설계 공모에 함께 참여한 일도 있습니다.

 

그는 졸업 후 1959년 데이비스, 브로디 그리고 위스니우스키 사무소에서 1년간 근무하다가 1960년에는 대형 설계사무소인 S.O.M 뉴욕사무소에서 근무하면서 대형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1961~1963년에는 제2세대 대표 건축가의 한 사람인 마르셀 브로이어에게 사사를 받으며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브로이어는 모호리나기와 함께 도일 뎃소 바우하우스 스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월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로에 그리고 조셉 알버즈가 한 것처럼 1930년대 후반에 미국에 정착했습니다.

 

 

-출처- "리차드 마이어 - 백색의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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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셰 샤프디

 

 

이스라엘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인 그는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쌍용건설이 시공하고 있는 싱가폴 마리나 베이 샌즈호텔의 설계자로도 이름을 알렸습니다.


건축가의 건축물에는 그가 추구하는 가치, 감성, 영감, 디자인 정신 등이 녹아들어져 있습니다. 모셰 샤프디가 말하는 성공적인 건축물은 건축물 자체의 목적, 그리고 그것의 장소에 대한 관념을 내재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길 건축가가 건축물을 설계할때 의도한 목적에 따라 건축물이 설계되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오로지 요구되어지는 프로그램에 맞춰 충족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행위를 수용가능한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건축물이 도시적, 전원생활에 맞춰 설계되어지거나 혹은 그 시대와 관계없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주변환경과의 자연스러움 즉 조화를 이루며 건축물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러한 건축물이 우리 즉 공동체에 어떤식으로 기여하고 또 후세에 길이 남을지 책임의식을 져야한다고 합니다.

 

건축물을 만드는 데 있어서 지리적, 문화적 다양성은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세계 여러 공동체에 들어서 있는 그 장소와 문화에 특화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건축물들은 그것들이 들어서 있는 곳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사회적인 요소들에 의해 영감을 받아 그 지역과 조화를 자연스레 이루게 됩니다.

1938년 이스라엘 하이파 출신인 모세 샤프디는 캐나다로 유학을 가 몬트리올 맥길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졸업후 그는 세계적인 건축가 루이스 칸의 사무실에서 근무를 하게 됩니다. 나중에 그는 몬트리올로 와서 자신의 이름을 건 Moshe Safdie and Associate Inc. 건축사사무소를 개소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1967년 그를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게 된 몬트리올 세계박람회에서 'Habitat 67'을 선보인 이후에 세계 전역에 여러가지 모델의 habitat 주거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됩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 대두되어 지는 것들은 Telfair 예술박물관, 예루살렘 Yad Vashem박물관, 솔트레이크 시티의 공공도서관, 미국 스프링필드에 위치한 연방법원, 인도의 Khalsa 기념관, 싱가폴의 마리나베이샌즈 호텔등 세계적으로 독창적이고도 유명한 그리고 그지역의 랜드마크가 된 것들입니다.

 

해비타트67은 딱 봐도 일반 건축물들과는 다른 무질서 하면서도 하나의 유기물적인 연결을 보여주는 건축물입니다. 큐브의 집합체가 아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룹니다.

 

HABITAT67

클라이언트: 캐나다 국제엑스포67 조직위원회

건축가:Moshe Safdie and David, Barott, Boulva Associated Architects

시공사: Anglin Norcross Quebec, Ltd.

조립용 콘크리트부재 : Francon(1966), Ltd.

프로그램:365조립식모듈, 158세대, 총면적 6,690

건설비용:17,000,000캐나다 달러

완공:1967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아파트 HABITAT67

 

해비타트67은 세계적인 박람회인 캐나다 몬트리올 건축박람회에서 1967년에서 탄생합니다. 그 당시에 캐나다 몬트리올 건축박람회의 모토는 다가오는 새로운 도시주거양식에 걸맞아 떨어지는 실험적인 조립식 주택의 건축양식과 디자인을 추고하였습니다. 이때 마침 샤프디는 박람회의 테마였던 '사람과 세상'을 모티브로 하여 몬트리올 박람회의 종합 건축계획을 맡게 됩니다. 예전 대학시설 논문을 준비할 때 부터 독창적인 디자인을 추구하였던 샤프디는 그 전에는 찾아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아파트의 설계에 들어갑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해비타트 67입니다. 그 당시 모셰 샤프디는 27세의 젊은 나이로 근로자들에게 적합한 저가형 주택인 해비타트가 탄생됩니다. 기존의 계획안은 캐나다 몬트리올 아브르 도심에 1,200세대를 수용할 수 있는 12~25층 규모의 초고층 빌딩을 건축하는 것이 였지만 세계박람회의 주요 주제로 다루기 위해서는 규모를 줄여야 하였기에 해비타트를 12층 높이에 158세대를 수용가능한 규모로 조정하게 되면서 현재의 해비타트 67로 재구성 되어졌습니다.

 

해비타트 67은 각 세대, 코어(엘리베이터), 보행통로가 구조적으로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3차원의 구조로 설계되었습니다. 미리 제작되어진 365개의 세대 즉 유닛들이 높은 장력을 가진 케이블고 고도이 용접기술을 통해 안정적이게 지속적으로 서로 지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하나로 연결된 현수교식의 시스템설계이며 이것은 포스트 텐션 공법이라고 불립니다.

 

각각의 유닛은 가로,세로 겹겹히 겹쳐 있는 천장, 벽, 바닥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방음에 아주 탁월한 기능을 합니다. 각 세대는 마치 공장에서 물건 나오듯이 사전에 공장에서 제작하여 비용 절감과 공기 단축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았습니다. 미리공장에서 유닛을 제작하기 위하여 샤프디는 해비타트67 부지 바로 옆에 공장을 세웠습니다. 공장에서 유닛의 제작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하였습니다. 우선 표준형태의 금형 틀을 제작하고 그 틀에 콘트리트를 부어 굳혀서 유닛 형태를 제작하였습니다. 거기다가 전기 및 배관 설비를 설치하고 바닥은 목조로 마감하였으며, 욕조, 창틀 및 부엌가구를 유닛안에 설치하였습니다. 도시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그리고 획기적인 해비태트67를 선보인 모셰 샤프디는 캐나다 몬트리올 세계 건축박람회를 통해 그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리게 됩니다. 무명 이었던 그를 세상에 알려준 좋은 기회였습니다. 세계인들이 이 해비태트67에 크게 주목을 끌었던 이유는 바로 컨테이너 박스를 응용하여 조립한 큐브모양이었습니다.

 

해비타트67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마치 인공적으로 만든 큐브모양의 산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규격성이 강하게 나타나는 해비타트67은 크기가 조금씩 다른 박스를 쌓아올린 듯한 느낌도 들게 합니다. 또 해비타트67은 그 모양이 다양하고 입체감을 지니고 있어서 건축물을 보는 위치 및 각도에 따라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마치 12층으로서 높은 고층건물이 주는 답답한 보다는 내가 직접 살고 싶게 만드는 친근함이 물씬 풍기는 건축물입니다. 해비타트67은 독창적인 외관 디자인만 가진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쓰기도 편리한 이점들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완벽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고 언덕위세 지어져 있어서 넓은 주변경관도 제공합니다. 또한 그 옆에 세인트 로렌스 강이 아름답게 흐르고 있어 뛰어한 경관을 자아냅니다. 밖의 경관을 보기 편하게 각 유닛의 아래에 위치한 세대는 윗 세대에 정원 테라스를 제공해 주고 있으므로 햇빛 드는 날이면 편안히 일광욕을 즐길수 있는 여유로움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모셰 샤프디는 말하길 도심에 위치해 있지만 타인에게 침해받지 않는 개인적인 삶을 추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선한 공기와 집안에 충분한 햇빛을 받는 것에 초점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웃과 단위세대의 쾌적함 그리고 절제된 공간을 창조하였습니다.

 

각 유닛이 분리되어 있는 동시에 공간의 조화를 이루며 연결이 되어있는 해비타트67의 개별 거주공간은 모든 층이 연결되어있는 보행자용을 갖추고 있는데 그 외관은 전통적인 아파트의 복도를 대체하는 공용 휴게공간으로서의 활용가치가 있습니다. 각 유닛은 3면으로 테라스가 설치되어 있으며 6개의 엘리베이터와 중앙 냉 난방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3개의 승강기 코어는 매 4층마다 정지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승강기는 바로 보행자 통로와 연결되어 각 세대의 입구로의 진입이 편리하도록 되어있습니다. 평면은 56헤베 1베드룸 부터 233헤베인 4베드룸까지 15개의 각기 다른 면적으로 설계되어있습니다. 각각의 유닛은 정원을 향하도록 3방향으로 위치하고 있어서 하나의 큰 정원을 크게 바라볼수 있습니다.

 

해비타트67가 주는 영향력은 무엇일까요?

해비타트67은 모던하면서도 복잡함과 간결함이 동시에 그리고 명확하게 드러나는 건축물입니다. 비록 해비타트67은 몬트리올 세계 건축 박람회의 일환으로 계획된 것이었지만 또 다른 효과로 세인트 로렌스 강을 따라 도시 개발사업을 촉진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해비타트67은 세계적으로 도시에 인구밀도가 늘어나서 삭막하게 살았던 도심 거주자들에게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했습니다. 해비타트67을 보고 우리 현대인들이 박수를 아끼지 않는 것은 그 독창적인 외형 뿐만이 아니라 자연을 즐길수 있는 여유로움을 제안하고 실현했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주거공간과 대비되는 것은 바로 집이라는 것이 단순히 잠을 자기 위한 수면의 공간을 넘어 재충전과 휴식이 가능한 생태학적인 공간구성을 구현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은 해비타트67이 선보여진 이후 테라스가 달린 많은 건축물들이 대중화가 되고 발전하는데에 많은 이바지를 한 대표적인 모델입니다. 캐나다 퀘벡주 문화청에 의하여 역사적인 건물로 랜드마크로 지정된 해비타트67은 무려 40년 전의 건축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독창적인 건축물임과 동시에 쾌적한 환경,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새로운 공간 구성이라는 이전의 공동주택에서 보여주지 못한 것들을 보여준 건축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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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코르뷔지에

(1887~1965)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로 현대 건축의 모든 면에서 기초를 다졌다고 보아도 될 정도입니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프랑스를 대표하는 천재 건축가입니다.

그의 다른 수식은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었던 건축가 입니다.

 

그의 일생

그의 본명은 샤를 에두아르 쟌레 그리 입니다. 1887년 스위서 서북부의 랴쇼드퐁에서 태어난 그는 중산층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피아노 선생님이었습니다. 어머님의 가르침은 르코르뷔지에를 세계적인 건축가로 발돋움 하는데 초석을 두었습니다. 그것은 "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해 내라"였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매사에 임했습니다. 한 예로 그가 13세 일때 라쇼드퐁의 미술학교에 응시했었습니다. 과제 작품제작 마감기한으로 3일의 기간이 주어졌습니다만 그는 그 첫날 저녁에 자신의 작품을 제출하였습니다. 미술학교에서 그의 스승은 화가가 되려는 그에게 건축을 하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17세의 어린나이에 자신의 첫 주택을 설계하게 됩니다. 하지만 르코르뷔지에가 어른이 되었을때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이유는 그가 어린시절에는 스위스 전통양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그가 추구하는 모더니즘과는 정반대인 스위스 전통주택을 설계하였기 때문입니다.  17세 이후 19세 까지 그는 총 7개의 건축물을 설계를 했지만 전부 고전적인 모더니즘과는 정 반대인 고전방식의 건축물 이었기 때문에 유명한 작품들은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파리에서 그에게 영감을 준 스승을 만나게 되는게 그사람은 바로 철근 콘크리트(즉 모더니즘의 시작)의 선구자로 불리우는 오귀스트 페레입니다.  르코르뷔지에는 오귀스트 페레에게 최신 재료 즉 철근 콘크리트와 기술, 구조를 배우고 피터 베렌스의 사무실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됩니다. 건축사사무실엣 일하면서 그는 근대 건축에서 빼놓을 수없는 거장인 미스 반 데어로에(커튼월로 유명한 사람)과 발터 그로우 피우스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또 그의 건축정신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동방으로의 여행이었습니다. 베를린에서 출발하여 프라하, 빈, 부다페스트, 콘스탄티노플, 아테네, 폼페이 등을 여행하게 됩니다. 여행을 하면서 그는 위대한 고건축물들을 직접 보고 경험을 쌓습니다. 소피아 대성당과 모스트에서는 단순 기하학이 지니고 있는 강렬한 힘을 느꼈고 발칸반도의 민중예술과 토속 건축물의 자연스러움에 감탄하게 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통해 그는 기존에 그가 항상 보아왔던 유럽식 장식 예술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볼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고향인 스위스로 돌아온 르코르뷔지에는 현대적 기술(철근 콘크리트 공법)을 사용한 이론적인 건축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완성되는 것이 지금 건축을 대표하는 시스템입니다. 돔-이노 시스템으로 불리어지는 이 아이디어는 최소한의 숫자의 얇은 철근 콘크리트 기둥들이 모서리에서 지지하는 단순한 구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구조는 건축트랜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한 이유는 기존의 유럽건축물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럽건축물과 가장 큰 차이는 벽이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까지의 유럽건축은 벽으로 하중을 견뎌내었기 때문에 두꺼운 벽이 많이 필요하였고 창문도 엄청나게 작게, 혹은 위아래로 길게 내어야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스템이 있기에 우리는 벽도 창문도 지붕도 바닥도 마음대로 할수 있었습니다.

근대 건축의 5원칙

1. 철근 콘크리트기둥인 필로티로 무게를 지탱하였고 건축 구조의 대부분을 땅에서 들어올려 지표면을 자유롭게 활용할수 있도록 합니다.

2. 건축가가 원하는 대로 설계할 수 있는 구조기능을 갖지 않는 벽체를 두어 자유로운 입면이 가능하도록 합니다.

3. 채광효과가 뛰어난 길다란 "띠 유리창"을 두었습니다.

4. 기중이 있기에 지지벽이 필요 없어 바닥 공간이 방들로 자유롭게 배열된 "열린 평면"을 만듭니다.

5. 건물이 서기 전에 있었던 조경을 대체하기 위해 건물의 옥상에 옥상족경을 만듭니다.

그는 순수주의를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시트로앙 주택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이 이름은 프랑스 자동차 시트로엥의 말장난 으로서, 건축물 또한 자동차 찍어 만들어 내듯이 현대 산업 방식을 채택하여 건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공장 제작 부품을 이용하고 규격화 하면 효율적으로 양질의 주택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 이었습니다. 집 또한 자동차 처럼 기능에 충실하고 사용하기 편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건축물을 첨단 기술로 탄생한 자동차와 같은 기계와 같이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명언을 통해 그의 이러한 생각을 잘 드러냅니다. "A house is a machine for living in" 집은 살기위한 하나의 기계이다. 

그는 유럽의 도시를 바꿔놓았습니다. 당시 유럽의 도시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공간이 협소하여 좁고 열약한 주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리는 너무 더럽고 혼잡하였습니다. 이러한 요인은 바로 다름아닌 산업혁명으로 도시로 인구가 급격히 몰렸기 때문입니다. 좁은 지역으로의 인구는 급증하지만 건물들은 중세의 것들이어서 그는 유럽의 도시를 바꿔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르코르뷔지에의 도시계획은 교통수단으로 서의 자동차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자동차가 인간을 거리의 제약에서 자유롭게 한다는 생각으로 교통체계를 중요히 여기고 주거지역을 멀리 떨어뜨려 공간이 넓은 쾌적한 삶을 꿈꿨습니다. 당시에 유럽의 도시들은 이미 중세와 근대의 건물들로 넘쳐 났기 때문에 이러한 그의 도시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넓은 땅을 지닌 미국은 이러한 르코르뷔지에의 계획안에 맣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또한 개발도상국으로서 1970년대이후 만든 한국의 계획도시, 신도시 들은 이러한 르코르뷔지에의 개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차선을 중심으로 주거지역, 업무지역을 나누었으며 많은 녹지를 두는 것을 원칙으로 도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것은 도시 재개발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역시 이러한 계획안에 영향을 받은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정하기 힘들것입니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이러한 도시의 계획안은 인구가 집중된 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주택부족을 해소하여 주고 쾌적한 도시생활이 가능하도록 하였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도 야기 시킵니다. 사람보다 자동차가 우선시 되고, 업무지구는 밤에 모두 집에 가느라 도로가 정체 되고 너무나 넓고 넓은 녹지는 도시를 나누게 됩니다. 

르코르뷔지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가 지나치게 기능과 기술만을 바라봄으로써 인간과 도시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과 불확실성을 무시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원래 모더니즘 자체가 받는 비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은 다시 한번 변화를 가집니다. 1930년대를 기점으로 하여 르코르뷔지에는 전기와 후기로 나뉩니다. 그러한 이유는 그만큼 그가 같은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건축을 선보입니다. 그가 후기에 설계한 롱샹성당을 보면 알수있습니다. 그동안 만들어 내었던 표준적이고 안정적이고 규격화 되어진 건축이 아닌, 대지의 특별한 조건 아래 형성된 특별한 모양의 건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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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반 데어로에

(1886~1969)

그는 우리주변에 볼수 있는 커다란 커튼월(철골과 유리벽을 한 구조)을 한 높은 빌딩들이 도시에 자리잡게 한 장본인입니다.

현대 건축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거장입니다.

 

그의 일생

그는 독일 출신의 근대 건축가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석공이었며 그러한 영향 탓에  그는 어릴 적 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돌을 만졌습니다. 흥미롭게도 미스 반 데어로에는 한번도 건축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일본의 유명 건축가 노출콘크리트로도 유명한 안도 다다오 그리고 그에게 영감을 준 르코르뷔지에 와 평행선을 긋는 듯 합니다. 베를린으로 이사를 온 뒤 근대 건축의 초창기 거장인 페터 베렌스의 스튜디오에서 건축일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정규 교육이나 학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곧 재능을 인정받고 독립적으로 건축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곳에서 철골과 유리에 매료된 그는 산업주의와 신고전주의를 통합하게 됩니다. 산업의 재료와 즉 유리, 철과 고전주의의 비례와 형태에 동시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의 본명은 원래 '마리아 루트비히 미하엘 미스'였는데 자신의 이름이 촌스럽다고 항상 여겼던 그는 새로운 디자인 이론과 독일의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어머니의 성인 '반 데어 로에'와 아버지의 성을 합하여 지금의 이름인 '미스 반 데어로에'로 개명을 합니다.

그렇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독일과 미국에서 살았던 그는 건축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바로 다름아닌 모더니즘입니다. 독일에서는 바우하우스의 학장으로서, 그리고 미국에서는 일리노이 공과대학교의 학장으로서 재직하여 모더니즘 건축의 중심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지금도 화두가 되고 있는 미니멀리즘을 이끌었던 장본인입니다. 이것은 그의 명언에서 알아 볼 수 있습니다. "Less is More" 더 적은 것이 더 풍요로운 것이다. 이 말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개인적인 모토 일 뿐 아니라, 20세기 초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가치를 찾고자 했던 근대 근축가들의 이상과 맞아 떨어졌습니다. 산업화가 진행되었던 19세기 말과 20세기초 에는 기존의 역사적인 건물의 외관과 장식을 흉내내는 예전에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관습적인 건축에 대한 반항운동이 일어 났던 시기 입니다. 시대는 변하여 가는데 건축은 그대로 머물러 있고 오히려 퇴행하는 듯하여 이러한 운동이 벌어졌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1920년대에 와서 국제주의 형식이라는 사조로 통합되어 바야흐로 현대 건축의 새 장을 열게 됩니다. 그 중심에는 바로 미스 반 데어로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소재의 새로운 변화였습니다. 유리와 철 이라는 재료의 발견과 기술의 혁신이었습니다. 바로 커튼월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가치는 아방가르드 예술가와 건축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비전을 그려내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의 작품

그는 날 때부터 모더니스트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초기 건축물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스타일에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대쵸적인 예가 펄스 하우스와 후르비히 하우스 입니다. 미스 반 데어로에는 모던한 스타일로 그 건축물들을 지을려고 하였지만 건축주의 강력한 주장에 못이겨 전통적인 박공지붕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는 건축주의 의견도 반영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단순하면서도 비례감이 살아 있는 건축물을 만들어서 그의 개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처음으로 그를 세상에 알리게된 주요 작품은 완공된 것은 아니지만 그가 1922년 프리드리히가 오피스 빌딩 공모전에서 제안한 계획안 이었습니다. 그 건축물은 20층 규모의 빛나는 글라스 타워였습니다. 그 당시에 유리와 철이라는 소재는 생소하여 보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지금은 유리와 철이 커튼월이 보편적인 형태의 초고층 빌딩이지만 그당시에는 상당히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1927년에 독일 슈투트가르트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를 설계 하였을때도 사람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꽉차고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것이었습니다. 투명하고 현대적인 조형을 가진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새로운 주거형태 였습니다. 그 당시에 화려한 주택들에 비하면 바이센 호프 주거단지는 평지붕에 박스 건물이어서 초라해 보였을 것이지만 단순한 형태 안에서 최대한 동선을 줄이고 방을 기능적으로 배치하여 현대적인 삶의 방식을 담으려 그는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1920년대 부터 공간과 기능을 분리하여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점은 나중에 자신의 건축에서 중심 주제로 삼은 '무한정 공간'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바로 바르셀로나 파빌리온과 투겐트하트 주택, 그리고 수직타워의 안정적인 비례와 질서를 보여준 시그램 빌딩이다. 현대도시의 경관을 만들어 낸 시그램 빌딩은 많은 추종자와 반대자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건물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수 있는 전형적인 고층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중에 그의 제자들은 무수한 시그램 빌딩 복제품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복제품들은 미스 반 데어로에가 만들어낸 시그램 빌딩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바로 디테일에 있습니다. 그는 당시 법규가 허용하는 많은 면적을 포기하고 거리에서 27미터나 뒤로 물러난 곳에 빌딩을 위치시켰습니다. 그러한 결과 건물의 앞에는 많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광장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앞에 광장에 사용한 대리석을 로비 안까지 사용하여 마치 광장이 건물까지 연결된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건물전체의 통일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건물앞 광장은 마치 빽빽한 고층건물들이 들어서있는 사막한 가운데에 있는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시그램 빌딩을 모델로 삼은 건물이 있습니다만, (청계2가 사거리에 있는 삼일빌딩) 그 건물 후면부에 보기 싫게 붙어 있는 회색의 콘트리트 기둥과 차가 주차하여 숨막히는 듯한 비좁은 광장등 때문에 아쉬움을 남깁니다.

미스 반 데어로에 말년의 대표작은 베를린 신 국립미술관입니다. 디테일의 완성도 와 개념의 명료성에 초점을 둔 작품입니다. 관절염이 있었지만 병원에서도 도면을 검토할 정도로 그는 국립미술관에 큰 애정을 쏟았습니다. 그는 항상 그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베를린에 위대한 미술관을 짓는 것을 꿈꿔왔었기에 그러한 동기부여로 미술관 자체가 위대한 전시물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완성된 베를린 신 국립미술관의 포디움은 예술품을 지지하는 전시대와 같은 역할을 하며 유리로만 둘어싸인 내부는 안과 밖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지분을 떠받치는 십자 모양의 철골 기둥 8개는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 지는데, 이런 섬세한 디테일들이 모여모여 위대한 하나의 예술 작품을 이루게 됩니다.

그의 건축은 절제를 통하여 공간이라는 건축의 본질과 시대정신 그리고 그 시대의 산업재료(유리,철)로 구축한 진정성으로 건축의 의미를 드러내려 하였으며, 시대를 꿰뚫어보는 절제의 미학 미니멀리즘을 지님으로서 현대인들의 감성을 자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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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다다오


(1941년~현재)

그는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입니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하였습니다. 그는 마치 한 편의 소설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뜻대로 되는 것은 별로 없다. 시도한 건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회를 잡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고 그리고 그 기회를 잡은 뒤에는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건축가가 되기 이전에 치열한 삶을 살았습니다. 트럭운전사도 하였고 권투선수로서의 삶을 살았었고 공사판에 나와 노역도 마다 하지 않았습니다.


1941년 일본 오사카 시에서 태어나서, 후리츠 죠토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62년부터 1969년 까지 세계각지를 여행하며 독학으로 건축을 배웠습니다. 특히 그가 흥미를 보였던 것은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이었습니다. 1969년 안도 타다오 건축연구소를 설립하여 지금의 그를 있게 만들어준 "스미요시의 연립주택"으로 일본 건축 학회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노출콘크리트 기법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미술관, 공공건물, 교회나 절 등을 많이 지으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안도 다다오가 르코르뷔지에를 얼마나 존경하는지는 그가 키우던 개의 이름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그가 키웠던 개의 이름은 바로 '르코르뷔지에'였던 것입니다. 그 개가 죽고 또 다른 개를 키웠지만 그 개의 이름 역시 '르코르뷔지에'이었습니다. 안도를 건축의 길로 이끈 사람이 바로 르코르뷔지에 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안도 다다오가 그을 얼마나 존경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안도 다다오가 말하는 르코르뷔지에는 건축가이면서 화가이며 조각가이고 작가이며 사상가라고 일컫습니다. 그의 인터뷰에서 그는 르코르뷔지에를 "아마 500년에 한 번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의 건축가와 미켈란젤로 다음에 르코르뷔지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단순히 건축가라고 말하기 어려울만큼 그들은 위대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안도다다오는 어려웠던 집안 형편상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비록 그는 정식으로 건축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에 푹 빠져 그의 작품집을 헌책방에서 발견하여 책속의 드로잉을 수없이 따라 그리는 것으로 건축가의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말하길 그는 르코르뷔지에의 건축도 존경하지만 그의 삶과 정신을 흠모한다고 말합니다. "르코르뷔지에 처럼 저는 건축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습니다. 대학에도 가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무작정 책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건축물을 보러 세계로 다녔습니다. 그 과정에서 건축이 점점 저의 몸안으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세상에는 엘리트도 많이 있지만 엘리트가 아닌 사람도 많이 존재합니다. 더군다나 일본은 학력사회 이기 때문에 그 격차를 잡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실인 기회는 반드시 우리에게 옵니다. 그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일에 관해 계속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집중하여 계속 생각한다면 자신에게 오는 기회를 반드시 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잡았다면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합니다."

안도가 말하는 르코르뷔지에는 프랑스에서 살았지만 스위스 태생이고, 건축학을 정식으로 공부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의지만으로 대규모 파리도시계획을 비롯해 평생 동안 전 세계에서 많은 계획을 하였지만 안타깝게 모두 실현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의 사망 당시에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었던 안드레 말로는 장례식 조사에서 르코르뷔지에를 일컫길 "그토록 오랫동안, 끈질기게 사람들에게 숱한 모역을 당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로지 그는 인간과 건축만을 위하여 계속 싸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안도가 바라본 르코르뷔지에의 인생은 자신과 같다고 느꼈습니다. 안도 다다오는 항상 힘들때 마다 르코르뷔지에가 실패하였던 일들을 뒤로한체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였던 모습이 늘 귀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만나보지 못하였던 책으로만 보던 르코르뷔지에의 건축물을 실제로 보기 위하여 그는 푼돈을 열심히 모아 24세의 젊은 나이게 프랑스에 가서 롱샹 성당을 보았던 감동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는 막상 롱샹성당에 도착하였는데 사방에서 무참히 쏟아져 내리는 빛을 견디지 못해 1시간도 채 안되 밖으로 뛰쳐 나오다 싶이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건축에서 빛을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중요한가를 뼈져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설계작품으로는 고베(神戶)의 로코 하우징 II(1993)과 오사카의 산토리 박물관(1994), 가고시마대학의 이나모리(稻盛)회관(1994), 오사카의 맥스레이(Maxray) 본사 사옥(1994), 나라(奈良)의 고조문화박물관(1995), 오카야마(岡山)의 나리와 미술관(1994)과 효고(兵庫)의 초등학교 등이 있습니다. 1985년 교토(京都) Times I(1985), Times II(1991), 1988년에 지은 오사카의 갤러리아 아카와 1989년에 건설된 '빛의 교회' 는 그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연과의 조화가 잘 나타난 건축물로는 치카츠 아스카 역사박물관, 구마모토현의 장식고분관, 그리고 히메지의 문학관, 물의 교회, 물의 절 등이 있다. 2007, 2008년 완공 예정인 상하이 디자인 센터(중국)의 설계를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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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칸


1974년 3월 17일 뉴욕 펜실베이니아 역 화장실에서 한 노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여원에서 주소가 지워졌기 때문에 신원을 확인하는 데만 무려 3일이나 걸린 이 노인이 바로 인도에서 돌아오던 세계적인 건축가 루이스 칸(1901-1974)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근, 여전히 칸의 건축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의 건축이 보여주는 견고함, 안정성, 세월의 깊이, 공간의 무게, 그리고 지속적인 감동 때문은 아닐까요? 당시의 건축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 칸 건축물의 중요성은 아마도 그것이 과거의 건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일것입니다. 사실 그의 건축에서는 현대 건축이 보여주는 재치, 발랄함, 경쾌함 및 형태의 자유분방함을 찾아볼 수 는 없습니다. 그의 건축은 마치 장중함과 여유를 보여주는 고전 음악과도 유사합니다. 굳건하고 감동적이기까지 한 칸의 건축은 시간과 유행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이 시대 건축의 고전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는 칸 고유의 건축 이론과 실천 체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칸의 독특한 사고 체계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칸 특유의 사고 체계와 언어사용은 칸에 대한 신비감을 가져다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칸을 이해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는 칸이 한 말을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차분히 숨을 가다듬고 칸의 건축과 그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 그의 말 속에 숨은 진정한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칸의 생애와 작품을 훑어 내려가면서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데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마치 그가 건축의 본질을 향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졌듯이 말입니다. 


칸이라는 건축가

칸의 직업을 이해하는 첫걸음

160센티미터가 간신히 넘는 왜소한 체구, 화상 때문에 흉터가 난 얼굴, 보잘것 없는 배경을 가진 가난한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 끝없이 열심히 작업했지만 파산에 몰리고 만 건축가 루이스 칸. 그런데 그의 사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왜 우리는 이 건축가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밖에 없는가? 건축가 루이스 칸의 삶은 극적이었습니다. 그는 불우했던 어린시절, 사고로 인한 화상의 기억, 그리고 평탄치 않았던 사생활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칸은 5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렸습니다. 부단히도 자신만의 건축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칸은 그동안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건축가로 알려져 왔습니다. 사실 건축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칸에 대해서는 쉽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칸의 생각과 건축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반증입니다. 그의 말이나 글은 직접적이지 않고 은유적이어서 마치 어느 경지에 다다른 철학자와 같이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그의 일생과 사유 과정 그리고 건축에 반영된 그의 사고를 찬찬히 살펴보면 칸의 작업을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압니다. 일견 난해하고 철학적으로 보이는 그의 사고체계는 사실 건축의 본질을 향한 그의 노력과 자신의 생각을 건축에 그대로 표현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따라서 칸 건축의 이해를 돕는 실마리는 바로 칸 자신의 일생에 걸친 생각과 그것을 표현하는 건물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술의 경지에 오른 대가의 숨결을 찾아서

칸의 활동 기간은 시기상으로는 근대 건축의 흥망성쇠와 거의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지만 내용적 측면에서는 완전히 다른면을 보여줍니다. 사실 건축은 타 예술 분야에 비해 현실의 상황과 조건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건축가의 개념을 실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칸은 빛과 공간을 통해 자신의 건축을 예술의 경지까지 승화시켰습니다. 근현대 건축을 통해 수많은 건축가들이 등장했지만 이른바 스승의 반열에 오른 건축가는 그다지 많지 않은듯 합니다. 이를 테면 르 코르뷔지에나 미스 반 데어 로에 등의 거장을 예로 들 수 있지만 시대를 초월한다는 측면에서는 칸을 첫 번째로 친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그만큼 칸의 건축은 시간과 지역의 차이를 넘어선 건축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즉 루이스 칸만큼 근대 건축의 역사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건축가는 많지 않았습니다. 

칸의 가계와 영향

칸은 1901년 2월 20일 제정 러시아의 에스토니아 지방에서 에스토니아계 유대인이었던 가난한 공예가인 아버지 레오폴드 칸과 라트비아계 유대인으로서 하프주자였던 어머니 베르사 멘델손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칸의 아버지 레오폴드 칸은 1904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1906년에 가족 전체를 미국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칸의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한 것은 당시 러시아에서 진행되었던 유대인 박해와 1905년에 발생한 유대인 대학살과 관련이 있습니다. 칸의 가족은 이런 시대적 혼란속에서 아버지를 따라 필라델피아의 빈민가에 정착하게 됩니다.

어린시절

칸은 아직 미국으로 오기 전이었던 3살 즈음 자신의 집에서 큰 화상을 입습니다. 아른다워 보이는 불꽃을 잡으려다 화로의 불이 옷에 옮겨 붙으면서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공예 기술자였지만 레오폴드는 실제로 고정적인 직업을 갖지 못했고 대신 어머니인 베르사가 재봉사로서 전체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칸은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과 내성적 성격 때문에 순탄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더욱이 사고로 입은 얼굴과 손의 화상 때문에 주위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되었고, 이는 칸을 좀 더 깊은 자의식의 세계로 빠지게 했습니다. 흉터가 있는 흉한 외모에다, 백인 사회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은 칸을 어렸을 때부터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미술과 음악에서 나타난 칸의 예술적 재능이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극복하는 계기가 됩니다. 펜실베이니아 시 주최 미술 대회에서 수상할 정도로 실력이 있었던 칸은 시가 운영하는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능력을 쌓아 나갔고 고등학생 사생 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의 실력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칸의 미술적 재능은 이후 그의 스케치 등을 통해 잘 나타납니다.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 분야에서도 재능이 있었던 칸은 이미 10대 시절에 무성영화관에서 오르간 연주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대학시절

칸은 비록 가난하고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1920년 가을, 이른바 아이비리그로 불리는 미국 동부 명문 대학중의 하나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여 건축 공부를 시작합니다. 칸이 대학교육을 받던 1920년대는 유럽에서 근대 건축 운동이 태동기를 지나 막 발전하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19세기 말 유럽 건축을 이끌었던 절충주의나 신고전주의 양식이 완전히 힘을 잃은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문화의 중심지인 유럽에 비하여 마치 변방과도 같았던 미국에서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같은 일부 건축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메리칸 보자르 양식이라 불리는 신고전주의 양식에 매몰되었습니다. 근대 건축 운동의 중심지인 유럽에서도 1919년 바우하우스가 개교하여 근대적 교육을 시작할 때까지 신고전주의 양식에 근거한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미국 건축 대학이 모두 그러했듯이 펜실베이니아 대학이 보자르식 교육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학에서 칸은 이후 자신의 건축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 스승 폴 크레를 만납니다. 프랑스인으로서 에콜 데 보자르 출신인 크레는 근대 건축의 원리가 아니라 신고전주의 양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당시에는 유럽의 건축이 향후 세계 건축을 주도할 근대 건축으로 나아가고 있던 반면, 미국의 건축교육은 여전히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컨이 받은 건축교육은 전형적인 에콜 데 보자르 식 교육으로서 정형화된 방법과 과정을 통한 설계 방법론과 비례, 대칭등 고전 건축의 원리를 중시했습니다. 따라서 칸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서 비로서 근대 건추축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대학 시절의 교육 내용을 의도적으로 외면할 정도로 근대 건축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특히 근대 건축의 특징 중 하나인 사회에 대한 건축의 역할 에 큰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그렇지만 애써 외면하였던 보자르 식 설계 방법은 아이러니 하게도 이후 칸이 자신만의 건축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스승이었던 크레는 건축의 전체 역사를 통하여 불변하는 건축의 본질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자연스럽게 고대 기념비적 건축물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이러한 점에서 건축의 본질 그리고 기념비적 건축의 가치에 대한 칸의 생각은 그의 대학 시절 스승인 크레의 생각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겠다. 대학 시절 칸의 학업 성적은 우수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최고는 아니었으며, 설계역시 좋은 성적을 받기는 했으나 자신의 동기 중 최우수 학생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사무소 시절, 대공황 그리고 전쟁

1924년에 대학을 졸업한 칸은 여러 사무소에서 실무 수련을 쌓습니다. 이때 그가 맡은 주된 역할은 제도사로서 도면을 그리는 작업이었다. 3년간의 수련 기간을 통해 모은 돈으로 칸은 당시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대 건축의 흐름을 접하기는 하였지만 주로 그리스나 이탈리아 같은 고전 건추겡 대한 답사가 중심이었습니다. 당시 칸의 스케치는 방문했던 여행지의 건물이 무엇이었는지 잘 보여 줍니다. 물론 독일과 같이 당시 근대 건축이 활발했던 곳을 방문했고, 르 코르 뷔지에의 사무실에서 일하던 대학 동기 노만 라이스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적어도 이 시기까지 칸은 근대 건추그이 영향력에 대해서 크게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유럽여행 이후 칸의 사무소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미 1920년대 중반부터 불경기 조짐을 보였던 미국 경제는 1920년대 말 본격적으로 대공황에 들어섭니다. 유럽여행을 마친 1929년, 칸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폴 크레의 사무소에 취직하였으나 이곳 역시 사저잉 어려워 입사 1년 4개월 만에 1930년 자진 퇴사하였고, 그 이후로는 퇴사 한달전 결혼한 아내 처가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후 수년간 취업과 실업을 번갈아 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칸은 비슷한 처지의 젋은 건축가 30여 명과 건축연구회를 결성하여 공부와 연구를 병행하였습니다. 이곳의활동을 주도하면서 칸은 근대 건축운동을 수용하게 되었고 이를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였습니다. 때 마침 루스벨트 대통령이 공황 타개책으로 주도한 공공 주거 프로젝트가 필라델피아 싱에서도 시작되었고, 칸은 정부의 공공 건축가 고용 프로그램에 따라 몇 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할수 있었습니다. 특히 1937년에는 미 연방 주택청이 신설되어 주도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건축가로서의 명성을 얻는다. 그러다 미국이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칸은 제한 종류의 프로젝트만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칸은 1940년대에 미국 계획가 및 건축가 협회의 창설을 주도하였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도시계획 관련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칸이 수행한 주거 프로젝트는 대부분 파트너인 스토노로프에 의해 수주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몇 가지 사건이 불거져 불화가 발생하자 1947년 스토노로프와 결별하고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 독립이 계기가 되어 칸의 작업에서 대규모 주거 프로제트는 사라졌고 대신 단독주택 프로젝트만 남아 있었습니다. 칸은 이 기간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 더 중요하게는 1940년대 중방에서 1950년대 초 까지 작업과 삶 양 측면모두에서 칸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앤 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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