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1년 비엔나(Vienna)의 교외 펜징(Penzing)에서 출생.
1857년 빈 공과대학(Vienna University of Technology) 입학.
1860년 베를린 왕립건축학교(Berlin Bauakademie) 입학.
1861~1863년 빈 조형예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 Vienna)의 건축과에서 수학.
1863년 독립하여 건축가로서 활동 개시. 요제피네 돔하르트(Josefine Domhart)와 결혼.
1873년 테오필 한센(Theophil Hansen)과의 협동 작업으로 ‘그라벤호프(Grabenhof)’ 설계.
1880년 요제피네와 이혼. 어머니(Susanne Wagner) 사망.
1886~1888년 자신의 주택 ‘바그너 빌라(Villa WagnerⅠ)’ 건축.
1888~1889년 ‘링케 빈차일레(Linke Wienzeile) 아파트’ 건축.
1890년 비엔나 신도시 계획에 대한 의뢰를 받아 만든 작품으로 명성을 얻음.
1894~1897년 비엔나 시내 전차와 도시 철도망 작업(Viennese Stadtbahn, metropolitan railway system). 빈 조형예술 아카데미 건축학과 교수로 임용.
1894~1898년 요셉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가 그의 조수로 일함. 카를 광장 역사(Karlsplatz Stadtbahn Station) 건축.
1896년 『근대 건축 Moderne Architektur(Modern Architecture)』선언서 출간.
1898~1899년 마조리카 하우스(Majolika Haus) 건축.
1899년 ‘빈 황실 역사’ 건축. 빈 분리파 운동(Wiener Sezession)에 합류. 비엔나 제체시온 홀(Sezessionhaus/Secession Building)에서 첫 번째 제체시온 전시회를 가짐.
1902년 ‘<디 차이트>지(誌) 배달 사무실’ 건축.
1904~1906년 ‘비엔나 우체국 저축은행(Postalparkasse)’ 건축.
1905년 클림트(Gustav Klimt), 호프만(Joseph Hoffmann) 등 그 밖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분리파 운동에서 탈퇴.
1905~1907년 ‘스타인호프 교회(Kirche am Steinhof)’ 건축.
1906~1907년 비엔나 ‘슈첸 하우스(Schutzenhaus)’ 건축.
1909~1913년 비엔나 ‘베르크가 쇼룸’, ‘노이에스티프트 거리의 스튜디오’ 등 건축.
1910~1913년 결핵 환자를 위한 ‘요양원’ 건축.
1912-1913년 바그너 빌라Ⅱ(Villa Wagner II) 건축.
1918년 4월 11일 비엔나(Vienna)에서 작고.

- 아르누보 건축(Art Nouveau architecture)의 대가 ‘오토 바그너’ -
오토 바그너는 1841년 7월 13일 비엔나(Vienna)의 교외 펜징(Penzing)에서 태어났다. 부유 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5살에 아버지(Notary R. Wagner)를 여의고, 홀어머니(Susanne Wagner)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자녀교육에 대단히 열성적이서 바그너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졸업하기 2년 전부터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특별히 개별지도를 받도록 할 정도였다.
바그너는 1857년에 빈 공과대학(Vienna University of Technology)에 입학해 수학했다.
바그너가 빈 공과대학에 입학한 1857년도는 오스트리아 황제가 성벽 철거를 명령했던 해로, 비엔나에서 건축의 붐이 일기 시작한 해였다. 당시 무기 제조술의 발달로 인하여 도시 성벽의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바그너는 다시 1860년에 당시 문화의 중심지인 베를린으로 가서 왕립건축학교(Berlin Bauakademie)에서 공부하였다. 이 대학은 독일 고전주의 건축의 거장인 쉰켈(Schinkel:1781-1841)이 직접 강의하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바그너는 이곳에서 고전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의 초기 작품에서 이러한 고전주의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바그너는 왕립 건축학교에서의 수학 후에 비엔나로 돌아와 1861년에 빈 조형예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 Vienna)에 입학하여 비엔나 오페라 하우스(Vienna Opera House, 1861-69)를 디자인한 지카르스부르그(August von Sicardsburg) 교수와 뉠(Eduard van der Null) 교수 밑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당시에 비엔나에서는 온통 온 도시가 공사장처럼 건설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황제의 명령으로 성벽을 철거한 자리에 비엔나를 둘러싼 환상도로 링스트라세(Ringstrasse) 건설 공사가 1861년부터 5년간 계속되었고, 도로변에는 새로운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에 바그너는 푀스트(Ludwig Von Forster) 스튜디오에 합류하여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때부터 전 유럽 대륙에서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유럽을 지배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Habsburg家)는 독일 프로이센(Preussen)을 지배하고 있던 빌헬름 1세(Wilhelm I)의 ‘통일 독일’의 정책에 밀리고 있었다.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를 수상으로 내세워 강력한 통일정책을 추진했고 철혈(鐵血)정책의 일환으로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여 3번의 전쟁을 통해서 그 목적을 이루었다.
바그너는 이런 전쟁의 와중인 1868년 큰 충격을 받게 된다. 하나는 그의 은사인 뉠 교수의 자살이었고, 또 하나는 지카르스브르그 교수의 죽음이었다. 그것도 오페라하우스가 완성된 후의 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다.
비록 오스트리아 전쟁에는 패배했지만, 유럽 국가 간에 평화가 찾아오고 비엔나에서 건설 붐이 일어남에 따라 바그너는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55세가 되는 1894년 바그너는 자신의 모교인 빈 조형예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 Vienna)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전기(轉機)를 맞게 된다.
첫째로 바그너는 대학교수로 부임한 지 얼마가 지나지 않아『근대 건축 Moderne Architektur(Modern Architecture)』을 처음으로 출판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예술의 유일한 지배자는 필요다’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작품 경향도 서서히 변해갔고, 이것이 앞으로 작품 활동에 있어서 목표가 되었다.
둘째는 그가 대학교수로 재임함으로 인하여 제자와 조수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과는 단순한 제자와 조수가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동지로서의 끈끈한 관계를 맺게 되고 소위 ‘비엔나 학파(Vienna school)’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왜 우리들은 항상 다른 시대의 양식을 좇아서 건축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왜 우리들 시대에 맞는 우리들의 양식을 발견하려고 하지 않는가”라고 한 쉰켈(Karl Friedrich Schinkel)의 말처럼 기존의 관념적 전통에 반항하고 저항하여 새로움에 도전하는 일군(一群)의 무리를 형성하게 된다.
이 그룹들이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요셉 올브리히(Joseph Olblich), 아돌프 로스(Adolf loos), 요셉 호프만(Joseph Hoffmann)들이다. 이들은 대학에 반기를 들고, 분리파 운동, 즉 ‘제체시온(Sezession) 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바그너도 이 운동의 정식 멤버가 되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 경향은 초기의 역사주의 양식인 고전주의, 신 르네상스 양식에서 벗어나 간결한 양식으로 바뀌어져 갔고, 건축 재료의 선택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콘크리트에 철근을 집어넣는 것은 사실 1830년대부터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조셉 모니에가 최초로 개발하여 특허를 받은 때는 1850년대였다. 벨기에인 에느빅과 미국의 랜섬은 이 시공방법을 건축시공에 적용한 대표적인 엔지니어이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은 이러한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1904년에 마틴 하우스(D. D. Martin House)와 라킨 빌딩(Larkin Building)에서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구조를 바닥판과 보에 사용하였고, 바그너도 1906년 비엔나 우체국 건물(Postalparkasse, 1904-06)에 처음으로 콘크리트 바닥판을 사용하였다.
셋째, 바그너는 아카데미에 교수로 취임한 후 바로 2가지의 큰 프로젝트를 위촉받았다.
하나는 비엔나시의 40㎞에 지하철을 위한 36개의 지하철 역사, 플랫폼과 계단을 설계하는 것(Viennese Stadtbahn, metropolitan railway system, 1894-1902)이고, 다른 하나는 도나우 강 운하(Danube Canal)를 위한 갑문 시설(Schutzenhaus, 1906-07)의 설계였다.
특히 쉔브룬(Schonbrun)궁 앞 호프파빌리온(Hofpavillion, 1894-98)카를 광장 역사(Karlsplatz Stadtbahn Station, 1894-98)는 가장 유명한 것으로 전자는 황제를 위하여 특별히 설계된 것이며, 후자는 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폐허로 남아있던 것을 1977년에 말끔히 보수하여 현재는 박물관과 카페로 사용하고 있다.

바그너는 해가 거듭할수록 작품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는데, 첫 번째가 일명 마조리카 하우스(Majolika Haus, 1898-99)라고 불리우는 빈차일레(Wienzeile) 거리에 세워진 아파트다. 이 건물은 전형적인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으로 건물 외벽에 아름다운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두 번째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비엔나 우체국(Postalparkasse, 1904-06) 건물이다. 이것은 현상설계에 의하여 당선된 것으로 바그너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기록될 만큼 근대적이고 신성한 것이었다.
세 번째는 성 레오폴드 교회(Church of St. Leopold, 1903-07)이다. 이것은 스타인호프(Steinhof) 요양소 내에 지어졌기 때문에 일명 스타인호프 교회(Kirche am Steinhof)라고도 불리어지는데, 정신병자 요양소 내의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지어졌다.
바그너는 71세에 교수직에서 은퇴한 후 바그너 빌라Ⅱ(Villa Wagner II, 1912-13)를 설계하게 된다.
그리고 3번에 걸쳐 작품집을 발간하였다. 마지막 작품집을 발간한 해인 1914년 그 동안 유지되어 오던 평화는 깨지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구라파는 다시 혼란과 파괴가 뒤따르게 되었다.
바그너는 전쟁의 와중에서 종전을 보지 못한 채 1918년 4월 11일 향년 71세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바그너가 눈을 감기 두 달 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가 1918년 2월 6일 사망하였고, 같은 해 10월 18일에 콜로만 모제르(Koloman Moser), 10월 31일 에곤 쉴러(Egon Schiele)가 차례로 사망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재능 있는 예술가들은 바그너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차례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남겨놓은 아름다운 발자취만을 돌아볼 수 있을 뿐이다.

- 현대 건축의 선구자 ‘오토 바그너’ -
오토 바그너는 선구적 건축가일 뿐만 아니라, 교육자였으며 빈 지식사회의 리더이자 비엔나 현대화 계획의 주역이었다.
1894년 바그너가 당시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 없던 비엔나 조형예술 아카데미 교수가 되면서 쓴『근대 건축 Moderne Architektur(Modern Architecture)』이라는 책은 수개국어로 번역되면서 신건축운동의 교과서가 되었다.
바그너는 “예술가는 대중이 즐기는 것보다 대중이 즐기고 싶어 하는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괴테의 말에 동의하면서, 문외한일 수밖에 없는 국가의 역할을 질타하고, “예술 창작에 대한 우리의 출발점은 근대 생활 속에서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건축가로서 세계적 걸작을 연이어 발표하고 비엔나 교외를 둘러싸고 있는 고가철도와 지하철도망 노선상의 정차장을 포함한 모든 부분을 설계했다.

백년 전 비엔나는 세계 문명의 중심에 선 도시의 하나였다. 문명 중심의 도시에서는 모든 분야의 지식인들이 집합하고 교감한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Ludwig Josef Johann), 프로이트(Freud, Sigmund), 구스타프 말러(Mahler, Gustav) 등 현대 문명 개화기의 천재들이 비엔나에서 동시대에 활동하고 있었다.
비엔나의 지식인 사회는 19세기 말 문명의 지적 실리콘밸리 같은 곳이었다. 그 중심에 바그너가 있었다. 상류사회에서 성장한 바그너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 안주하기보다 신(新)문명의 전사로서 새로운 건축의 도래를 위한 선구자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현대 문명이 인류의 새로운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현대 건축과 도시 계획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옛 문명의 위대한 성과를 잊지 않았다. 과거의 위대함을 되살리고 과거의 모순을 초극하는 새로운 건축과 도시에 대한 그의 열정이 건축가로서 도시 계획가로서 교육자로서 저술가로서 그의 일생을 이끌어간 힘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은 피렌체(Firenze) 르네상스 형식의 아파트블록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는 오랫동안 기득권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 그가 기득권을 포기하고 비엔나의 개혁을 주장했다.
그가 명성을 크게 떨친 것은 1890년 비엔나의 신도시 계획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그가 꿈꾸던 링스트라세(Ringstrasse)를 중심으로 한 위대한 비엔나 건설의 청사진은 실현되지 않았고 그 계획의 일부인 도시철도 네트워크만 실현되었다.
이때의 철도 관련 프로젝트 중 건축사에 영원히 남은 유명한 프로젝트가 카를 광장 역사(Karlsplatz Stadtbahn Station, 1894-98)이다.
이 건물은 현대 건축의 공법과 기능 형식을 갖추었으나 제체시온(Sezession: 분리파) 스타일의 장식적 모티브가 함께한 절충적 현대 건축으로,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건축이었다.

그의 건축적 삶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사건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의 자리에 오른 그가 젊은 건축가인 요셉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나 요셉 호프만(Joseph Hoffmann)에 자극받아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 일이다. 그때 그는 “건축가는 오십부터 시작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때 만든 링케 빈차일레(Linke Wienzeile)의 아파트(1888-89)는 고전형식에 매어 있던 그의 초기 작품과 다른 창조적 진화를 보인 작품이다.
바로 이어 도시의 삼각형 대지에 세운 비엔나 우체국 저축은행(Postalparkasse, 1904-06) 건물은 그의 이름을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만든다.
빈 우체국 저축은행은 1904년에 시작해 1906년에 완성된 가장 완숙한 바그너의 걸작이다. 이 건물은 건축의 모든 부분이 그의 의도대로 디자인된 20세기 건축의 최고 걸작 중 하나다.
빈 우체국 저축은행이 문을 열었을 때 당시 빈 사람들이 “드디어 빈은 현대 건축의 위대한 걸작을 갖게 되었다”라고 하던 그 말이 백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한 울림을 갖는다.

바그너는 20세기 현대 건축의 문을 연 선구자이면서 동시대 지식인들의 리더였으며, 현대 문명을 맞은 역사 도시 빈의 성공적 현대 도시화의 마스터플랜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빈을 누구보다 깊이 알고, 누구보다 더한 열정을 가지고서 이 도시가 가진 과거의 영광과 미래의 비전을 자신의 건축 작품과 도시 계획안을 통해 보여준 위대한 빈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료와 후배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면서, 또한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열린 사람이었다.
20세기의 빈을 바그너 없이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는 빈의 건축가로서, 도시 계획가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위대한 인간이었다.
세계적 건축가는 그가 속한 도시의 역사와 지리와 사회의 소명을 자신의 사명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바그너는 그의 생애를 통해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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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에스파냐(Espana) 남부 카탈루냐(Catalunya)에서 출생.
1863년 레우스 중등학교 입학.
1867년 어린이 잡지 El Arteguia 디자인.
1869년 바르셀로나 대학의 건축학과 예비과정 입학.
1871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 입학.
1872년 물탱크와 공동묘지 정문에 관한 학생프로젝트 참여.
1876년 시청사 직원과 레알 부두 건축 참가. 바르셀로나 종합병원, 대학강당 건축에 학부시절 마지막으로 참여. 건축사로 첫발을 내디딤. 모친사망.
1878년 건축사 자격 취득.
1879년 시인 비센떼 가르시아(Vicente garcia)에 기마대 디자인을 바침. 누이 사망. 조카 로시따 에헤야 입양.
1800년 호셉 세라 말레라 알레나와 함께 바르셀로나 해안도로 가로등 합작 프로젝트 추진.
1881년 그의 유일한 기고문을 La Renaixensa에 기고.
1882년 공업기술자인 Juan Martorell Montellas와 공동작업.
1883년 성가족 성당의 작품 방향 설정. 후안 마누엘 비센스 문따네르 저택 건설(1883-1888). 산딴데스 까미야스의 엘 카프리쵸 저택 건립.
1885년 성가족 성당 첫 프로젝트.
1886년 구엘 궁전, 북 람블라스 거리(1886-1888).
1887년 칼벳 저택(1898-1899).
1899년 베예스구아드트 탑 건립. 구엘공원 건설(1900-1914).
1904년 그라네르 살라 메르세 저택. 호세 바뜨요 저택(1904-1906).
1905년 아르띠가스 정원.
1906년 밀라 저택(1906-1911). 구엘공원 내의 저택 입주.
1907년 Jaime L. 하이메 기념비.
1910년 파리의 Grand paris에서 전시회 개최.
1911년 열병을 앓음.
1925년 성가족 성당 종각 완성.
1926년 6월 7일 Sagrada Familia 성당 앞에서 전차 사고. 6월 10일 산따 쿠르즈(Santa Cruzu) 병원에서 사망.
-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
본명이 안토니 가우디 이 코르네트(Antoni Gaud i Cornet)인 그는 정열의 나라 스페인이 낳은 20세기 최고의 건축가이다.
가우디는 1852년 6월 25일 에스파냐(Espana) 남부 카탈루냐(Catalunya)의 레우스(Reus)에서 구리세공업을 하는 부친 프란시스코 가우디 세라(Francisco Gaudi Serra)와 안또니아 꼬르넷 베르뜨란(Antonia Cornet Bertran)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가깝게 놀이하며 지낼만한 친구도 없었으며, 마땅한 놀이기구도 없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연스럽게 모든 자연이 친구이자 놀이기구가 되었다. 가우디의 생가는 도시에서 좀 떨어진 시골이었다. 그곳은 지중해 연안으로 자연환경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우며 경이롭기까지 한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자연과 벗이 되었으며 자연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그가 자연에 대해 놀라우리만큼 뛰어난 관찰력을 갖게 된 것은 이때 형성된 것이다. 그는 자연의 모든 것을 존중하며 이해했다. 하늘과 구름, 물과 바람, 나무와 식물, 동물과 곤충, 산과 바위 등 여러 가지를 보며 이를 통해서 건축언어에 접목해 갔다. 특히 가우디는 몬세랏(Montserrat)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며 그 산을 매우 좋아했다.
또한 가우디는 레우스 지방에서 대장간을 운영하는 삼촌에게로 가서 대장간 일을 어린시절에 배웠다. 여기서 가우디는 철을 불에 넣고 꺼내 망치로 두들겨서 철을 단련시키는 단철과정은 물론이거니와 주조술과 석고로 본을 뜨는 방법까지 배우게 된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 있는 에우달도 푼트(Eudaldo Punt)에서 건축설계와 시공에 관한 실무적인 일들을 수확한다. 그는 이곳에서 건축자재의 특성들도 함께 배웠으며 이것이 후에 가우디가 맡은 일들을 수행하는데 있어 필요한 목수, 주철공 등 건축 관련 인부들과의 관계설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가우디는 한번 인연을 맺은 기술자들과는 끝까지 함께 일을 했으며, 그들이 나이가 들어 일을 못할 시에는 그 자제(도제제도에 의한 전수자)들과 일을 함께 했다. 따라서 모든 작업을 하는데 그들도 가우디의 감각과 뜻을 이해했고, 가우디는 작업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가 있었다. 지금으로 보면 거래선을 한번도 바꾼 적이 없었던 것이다.

가우디는 17세 때부터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바르셀로나의 건축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학창시절에 비라르와 폰트스레 등의 조수로서 설계활동에 종사하였다.
1878년 학교 졸업 후부터는 독자적으로 일을 시작,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많은 독창적인 건축을 남겼다. 밀가루 반죽으로 빚어 놓은 듯 구불구불한 6층 아파트 '카사 밀라', 기묘하고 아름다운 창문장식이 보는 이를 매혹시키는 '카사 바트요', 환상적인 돌조각과 타일장식이 공원 전체를 구불구불 덮고 있는 '구엘 공원' 등의 걸작을 남겼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남긴 대표작 중의 대표작은 신이 머물 지상의 유일한 공간이라 말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聖가족) 교회'이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네 개의 탑과 생동감 넘치는 우아한 조각으로 장식된 이 교회는 착공한 지 115년이 지났고 완성되려면 앞으로도 200년이 더 걸린다고 한다.

세상이 가우디를 처음 주목하게 된 것은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가우디가 출품한 독특한 디자인의 진열장이 사람들 눈을 사로잡으면서 부터였다. 그의 천재성을 일찌감치 발견한 에우세비 구엘은 최대의 스폰서가 된다.
가우디는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피카소보다 더 영웅으로 추앙하는 인물이지만, 생전의 그는 국가에 헌신적인 타입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들어 도시에 구현한 건축가이고 예술가였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다.
1883년 31살 때 그 유명한 성가족(Sagrada Familia) 성당 공사의 총감독에 취임하게 된다. 이후, 생의 만년에 기독교도로 살면서 성당에서 먹고 자며 일에 빠져 살았다. 가끔 시내로 나갈 때면 그의 부랑자 같은 행색 때문에 행인들이 푼돈을 적선해 줬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죽음도 비범했다. 1926년 6월 10일 그의 일터인 성가족 성당 바로 앞길에서 전차에 받혀 생을 마감했다. 느리디 느린 전차에 받힌 그의 마지막 순간은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며 길을 걷는 노대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사고 현장엔 <가우디 등>이 지금도 불을 밝히고 있다. 죽은 뒤 가우디를 다룬 스페인 영화가 6편 나왔으며, 그를 다룬 언론보도가 3,000여 회가 넘는다.

- 자연을 사랑한 건축가 ‘가우디’ -
가우디를 이해하려면 건축분야에만 국한하여 평가해서는 안된다. 즉, 건축사가들은 건축사에 입각하여 다른 건축물과 그의 건축물을 동시대적 관점에서 일직선상으로 동일시하며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어느 스승에게 사사 받은 일도 없고, 특정집단에서 일을 한 적도 없으며, 가족 중에 누구도 건축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작품은 어느 시대의 건축양식 및 특정분야로 분류하는 데는 난해한 부분이 많다. 그의 작품은 그 시대의 양식과 형식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무런 편견 없이 사물을 관찰하고 이를 작품화하는 능력을 그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소박했다. 그러나 대단히 명석했다. 가우디와 수년간 작업을 함께한 화가 후안 무네(Juan Munn)의 말에 의하면 "가우디는 확고하고 명석한 생각의 소유자"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가우디의 작품을 살펴보면 선은 곧은 것이 없으며, 입면은 들쑥날쑥 하고, 바로크양식으로 보이는 외관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으나 불합리한 점이 더 많다. 이로 인해 그의 정신상태가 좀 괴팍한 면과 마음이 뒤틀려 있지 않았나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판단이다. 이 시대의 건축가는 논리성을 갖는 미학과 추상화적인 과정을 거쳐 설계를 하며, 보조적인 수단으로 자와 콤파스를 사용했다. 건축자재를 자르거나 형태를 만들 때에도 이를 활용하여 2차원의 평면과 직선, 원과 다면체에서 5각형의 12면체인 3차원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가우디의 작품은 기하학적인 형태에 얽매이기 보다는 자연적이며, 변형이 많고, 쉽게 인지되지 않는 곡선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플라톤이 주장하고 이론화 한 제5의 원과 같은 형태로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가우디의 작품은 이론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형태이다. 이는 처음부터 기하학을 사용했다면 아주 단순한 기하학을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통제기하학(regulated geometry)을 응용하여 많은 부분 사용하였다. 가우디의 작품을 여러 건축가가 응용하여 모방하려고 했으나, 가우디의 작품과 같은 건축물이 완공된 것이 지금까지 없는 것으로 보아, 그가 설계한 건축물들은 가우디의 상상력이 어떠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가우디는 말한다. "건축가는 균형에 대한 타고 난 감각이 있어야 한다. 건축가는 건물의 형태를 디자인하고, 그것을 구조전문가(구조기술사)에게 구조에 대한 수학적 안전성을 검토 받는다. 그 후 구조전문가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건축가로서의 자질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전문가가 이상이 있다고 한다면 건축에서 손을 떼는 것이 현명하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자신에 대하여 엄격한 면이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la, 성가족 성당)의 종루는 포물선이면서 젖은 모래를 떨어뜨릴 때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를 시행할 때 가우디는 '중력의 법칙'을 엄격히 따랐다. 가우디는 설계도보다는 모형을 중요시 했다. 그 모형을 만들기 전 그는 실을 천장에 매달고 탑부분과 전체적인 모습을 모래 주머니 혹은 납을 중간 중간에 매달아 그 휨의 강도를 측정해 나갔다. 그리고 최상의 곡선과 아름다움이 나오면 이를 스케치했다. 여러 번에 걸친 반복 스케치와 모형작업을 했다. 그런 다음 건물의 형태와 구조를 결정하였다. 이렇게 한 건축구조형태에 대해 가우디는 자기 자신 스스로가 구조 계산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현대의 첨단 장비를 동원한 구조계산에서도 오류가 발견된 것은 없다. 그가 말하는 것은 완벽한 균형감각이다. 가우디의 건축형태는 그 누구도 상상도 못할 상황에서 만들어 졌으며, 가히 독창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그가 말했듯이 "자연에서 태어나고 자연이 베풀어 주는 매우 균형적인 자연적 구조"인 것이다.

가우디는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나 큰 동물에서는 얻은 것은 별로 없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용의 형상이 있으나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상에서 나왔다. 그는 아주 조그마한 곤충(파리, 모기, 들벌레 따위)과 들에 많이 나는 잡초와 나무, 잎 등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또한 동양의 미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형태를 표현해 나갔다. 가우디의 건물구성을 보면 동물의 뼈, 야자수, 곤충, 사람의 해골 등의 모습이 자주 사용됐다. 그는 나무의 줄기와 해골만큼 아름답고 완벽한 구조는 없다고 할 정도였다. 아무리 아름다운 돔이라고 할지라도 해골의 내부에 비할 수 없으며, 산이 가지고 있는 완벽한 안정성에 어떠한 건물도 따라 갈 수 없다고 가우디는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건축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가능성을 추구한다면 미를 잃게 될 것이다. 또한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면 미학, 예술 이론 또는 철학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렇게 추상적인 이론들은 나에게는 사치이며 관심도 없는 분야이다."
가우디는 일찍이 바그너가 주창했던 종합예술론과 '자연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괴테의 자연론에 영향을 받아, 스페인 고유의 고딕 양식과 이슬람 양식(무데하르 Mudejar) 양식을 재창조하여 대담하고 환상적인 건축양식을 완성했다. 피카소, 미로, 카잘스 등 동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들도 바르셀로나 곳곳에 있는 가우디의 건축물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가우디는 건축을 자연의 여러 가지 형상을 기초로 하여 구조·형태·기능·상징의 종합으로서 제시한 위대한 건축가였다. 전형적인 그의 건축은 모든 면에서 곡선이 지배적이며, 벽과 천장이 굴곡을 이루고 섬세한 장식과 색채가 넘쳐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따라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에 걸쳐 유럽을 풍미하였던 아르누보(art nouveau)의 에스파냐판(版)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1890년대를 경계로 하여 2기로 나눌 수가 있다.
전반기의 작품은 건축 그 자체의 몸체는 비교적 중후하며 극단적인 변형은 보이지 않으나 세부의 장식에는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특히 철을 사용한 곡선적인 장식은 피레네 북쪽의 아르누보의 장식과 대응관계에 있다.
그러나 가우디의 진가는 어디까지나 후반기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그의 건축장식에서 보였던 미로(迷路)와 같은 구불구불한 공간(空間)의 이미지가 전체의 건축디자인으로 확장되어, 계획부터 구조의 형태 및 세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디자인을 지배하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에는 코로니아 구엘교회의 제실(祭室:1898∼1914), 구엘공원(1900∼1914)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그의 중요한 후원자였던 구엘백작을 위한 것이었다.
주택건축으로 독특한 형태와 내부공간을 지닌 카사 바트요(1907년 완성)와 카사 밀라(1907년 완성), 1884년에 착수하여 결국 필생의 대작이 된 사그라다 파밀리아교회의 익랑(翼廊)의 정면(正面, 1908년 완성) 및 탑·조각(1903∼1926) 등은 가우디 건축의 가장 극적인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그의 건축은 아르누보의 유행을 초월하여 근대에 살았던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을 건축으로 표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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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베를린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출생.
1903-1907년 뮌헨 공과대학, 베를린 샤를로렌 부르크 공과대학에서 건축 수학.
1907-1910년 피터 베렌스 설계사무소에서 르 꼬르뷔제, 미스 반 데어로에와 함께 근무.
1911년 독일공작연맹에 참여하여 부재의 부품화와 현장조립 주장. 파구스 제화 공장 (Fagus shoe factory)
1915년 바이마르에 소재한 '작센 대공 공예학교'와 '작센 대공 건축전문학교' 교장에 임명.
1919년 위 두 학교를 '바우하우스 바이마르'로 통합, 1925년까지 교장 역임.
1925-1928년 바우하우스를 데사우로 옮기고 교장 역임.
1926년 데사우 바우하우스 교사 및 교사용 주거.
1933년 나치 정권 때문에 영국으로 이주.
1937년 하버드대학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하버드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역임.
1946년 하버드 제자 6인과 함께 건축가 협동단체인 TAC(The Architect`s Collaborative)를 설립.
1950년 하버드대학원 센타(Harvard Graduate Center, at Cambridge, Massachusetts), 아테네 미국대사관
1952년 하버드대학 은퇴.
1956년 영국 왕립건축학회(RIBA) 골드메달 수상. 미국 건축가협회(AIA) 골드메달 수상.
1969년 메사추세스주 보스턴에서 사망.

- 현대건축의 선구자, 발터 그로피우스 -
발터 그로피우스는 1883년 5월 18일 독일의 베를린에서 공직에 몸담고 있던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삼촌인 M.그로피우스는 건축가로서도 그 명성을 얻고 있었고, 베를린 소재 미술공예학교의 교장과 프러시아의 미술 교육감을 역임하였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유명한 바우하우스(Bauhaus)의 창시자이며, 건축학 교수이자 수많은 작품을 발표한 건축가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을 국제 건축을 육성하는데 보내면서 세 가지 서로 다른 역할 - 물론, 서로 관련 있는 분야이기는 하지만 - 즉, 건축가, 교육자, 비평가로 일했다.
1901년 샤로텐부르크와 뮤니히에서 처음으로 건축교육을 받았으며, 러스킨(I.Ruskin)과 모리스(W.Morris)의 영향을 받았다. 1911년에 설계한 파구스 제화공장(Fagus Werke)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벽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우수와 추위, 그리고 소음을 배제하기 위해 가구의 직립주 사이에 친 스크린으로 벽을 대신하였다.

그의 활동은 4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근대적인 구조로서의 건축의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추구한 시기, 즉 1907년 P.베렌스의 사무소에 들어가 10년 동안 근무한 후 독립하면서 파구스구두공장(1911) · 독일공작연맹(DWB) 박람회의 공장 및 사무소(1914)를 설계하였다. 특히 유리로 만든 커튼 월의 대담한 사용법이 주목을 끌었다.

제2기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9~1928년에 이르는 바우하우스의 교장시절이었다.
유능한 디자이너를 많이 육성할 목적으로 바이마르(Weimar)에서 출발하여 1925년 데사우로 이전(바우하우스 신교사는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하였으며, 근대 디자인운동 메이커로서의 디자인 교육의 기초자세를 세계에 과시하였다.
제 1차 대전 중에는 기병대로 종군하였고, 이때 그는 "예술노동 평의회", "11월 그룹", "유리의 사슬" 등 수많은 좌익계 미술가들의 조직에 관여하게 되었으며 일시적으로 표현주의 관련을 맺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19년 바이마르 시의 초청을 받으며, 공예학교와 미술학교를 합병하여 국립 바이마르 바우하우스를 창설하고 이 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어 새로운 조형 교육을 실천하였다.

제3기는 바우하우스의 교장을 사임하고, 1928∼1934년까지 도시문제, 특히 집단주거 건축의 실제적인 해결을 모색하였다. 판자 모양의 고층아파트의 제안이나, 베를린 및 카를스루에(Karlsruhe)에서의 주택단지 건설에 참가하였다.

제4기는 나치스의 대두로 독일을 떠나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한 시절인데, 영국에서는 M.플라이와 협동하여 몇 개의 건축을 이룩하고, 1937년에 도미하여 하버드대학 건축과 대학원 교수로 많은 건축가를 육성하였다.
그의 생애는 바로 계몽가로서의 기본노선을 따라 전개되었으며, 미정리 부분을 재빨리 찾아내어 정확한 해결을 제시하고 실제로 창조해보이는 능력이 뛰어났다.

- 발터 그로피우스와 바우하우스 -
"왜 오늘날의 스타일을 옛날로부터 빌어오는가? 모든 물건의 겉모습은, 그것이 등잔이건 의자건 건물이건 간에 쓰임새에 알맞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건축가나 디자이너는 지금이라도 속임수와 꾸밈을 버려라. 재료의 특성을 정직하게 살리고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 있는 미술·건축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의 교장이 되었다. 취임식 날 그가 한 이 말은 20세기 건축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바우하우스 이전의 건물 생김새를 보면 거의 모두가 로마 궁전이나 고딕식 대성당 같은 아름답고 웅장한 것들과 어딘지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아주 세세한 곳까지도 오밀조밀하게 꾸며 아름답기는 했지만 이것들은 쓸모보다 눈요기감이었다.
요즘도 음악당이나 교회 · 미술관 같이 예술성 있는 건물들은 예쁜 모양으로 짓는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이런 곳에서 살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사는 튼튼하고 값싸며 편리한 집, 꾸밈새가 적고 단출한 현대식 건축이 맨 처음 태어난 곳이 바로 바우하우스였다.

아름다움과 쓸모가 제대로 어울린 것만이 참된 디자인이라고 생각한 그로피우스에게 보기에만 좋은 것이 한심하게 느껴졌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정말로 쓰임새 있는 건물을 지을 수 있게끔 하겠다고 굳게 마음 억었다.
그의 생각은 열매를 맺었다. 그로피우스라는 사람을 말하며 바우하우스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바우하우스는 그로피우스의 뜻과 꿈이 펼쳐진 곳이며, 바우하우스가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그로피우스의 고집과 끈기 덕분이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는 본디 두 개로 나뉘어져 있던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합한 것이다. 낮은 신분으로 인식되어지는 직공과 고귀한 예술가의 구분을 없애려는 뜻에서였다.
그로피우스는 그림을 그리고 조각하며 디자인 하는 것이 사실은 기술이며, 이것이 좋은 조건에서는 예술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믿음에 따라 그로피우스는 모든 학생들을 작업장으로 보내 기술자에게 기술을 배우고 직접 만들도록 시켰다. 창조적인 힘을 갖게 하는 공부도 같이 가르쳤다.

바우하우스의 교수들 가운데는 칸딘스키, 폴 끌레, 알베르스 같이 현대 미술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이들이 많았다. 바우하우스는 곧 20세기 초,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려는 꿈을 가진 교수들과 학생이 마음으로 뭉쳐진 혁신적인 학교였다.
이를테면 의자를 만든다고 하자.
옛날에는 보기 좋은 것이 디자인의 으뜸 조건이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에서는 디자이너가 의자 만드는 법을 먼저 배우게 한다. 또 의자는 어떻게 생겨야 앉기 편한가를 연구하도록 한다.
이와 함께 일일이 손으로 만들지 않고 기계로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 내려면 어떤 재료를 쓸 것인가 생각하게 한다. 그런 일을 거쳐 바우하우스의 의자는 튼튼하고 편하며 날씬하고 산뜻한 모양으로 태어나게 된다. 쓰임과 모양이 잘 섞인 바우하우스식이 되는 것이다.

그로피우스는 1928년까지 9년 동안 바우하우스의 교장으로 있었다. 그 사이 바우하우스는 새롭고 뛰어난 감각을 만들어내는 요람이 되었다. 학교를 그만둔 그로피우스는 원래 그의 일인 건축설계 쪽으로 돌아갔다. 바우하우스에서는 그의 몫을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건축에서도 그는 '기계와 예술의 슬기로운 조화'를 실현했으며 그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낯익은 수많은 물건 가운데는 바우하우스에서 디자인한 것이 꽤 많다. 벽을 따라 위아래에 찬장을 붙여놓은 싱크대, 쇠파이프로 만들어진 의자 따위의 가구, 이동식 벽, 조립식 건축 자재, 소리를 흡수하는 천 등이 그것이다. 모두 바우하우스와 그로피우스가 남긴 훌륭한 유산이다.

바우하우스의 정신은 한마디로 기능주의(機能主義; 건축 · 공예의 모양과 재료는 모름지기 쓰임새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생각)라고 할 수 있다. 만일 1919년 바우하우스가 발터 그로피우스의 손으로 열리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아름답지만 불편한 그림같은 집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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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미국 위스콘신주(州) 리치랜드센터에서 출생.
1885년 15세 때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어 위스콘신대학을 고학으로 졸업.
1887년 근대건축의 선구자인 루이스 헨리 설리반의 설계사무소에서 근무.
1893년 시카고에 자신의 사무실 개설. 만국박람회를 통하여 일본과 동양의 건축에 관심을 갖기 시작.
1893-1911년 유기적 건축 이론에 바탕을 둔 ‘대 초원 양식(prairie style)' 시리즈를 통해 주택 중심의 많은 걸작을 선보임. 윈슬로 주택(1893), 하트레이 저택(1902), 마틴 저택 (1904), 쿤레이 저택(1908), 로비 저택(1909), 탈레신의 자택(1911년 이후).
1904-1910년 주택 이외에도 라킨사(社) 빌딩(1904), 유니테리언교회(1906) 등이 있음. 1910년 베를린에서 작품집 출간.
1911-1935년 침묵의 시기. 해외 도피 및 은둔 생활로 작품 활동이 전 시대에 비해 거의 없었다. 미드웨이 가든, 일본의 제국 호텔, 탈리아신 이스트 등. 1936-1939년 1936년 '낙수장(Falling water)’이라고 명명된 카프만 저택, 1939년 존슨 왁스본사 건축물을 통해 당시 세계적으로 파급되던 국제건축 양식(international style)을 받아들이면서 제2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1938-1939년 이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1938년부터의 탈레신 웨스트 주택 건설을 시작으로, 제2제이콥스 저택(1948), D.라이트 저택(1952), 프라이스 타워(1956), 베스 쇼롬 유대교회(1955), 마천루 계획안.
1959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1959)을 완성하기 직전 애리조나주(州) 피닉스에서 사망.

 

 -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유기적인 건축의 기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프랭크 라이트는 유럽 중심의 근대 건축의 흐름에서 당당하게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지니고 유럽 건축에 영향을 미친 미국의 자존심이었다.
그는 자연을 통하여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유기적인 건축의 기수이며, 기하학적인 수평선과 자연의 조화, 내부 공간의 리듬, 반복과 대립의 적절한 구성 등 현대 건축의 중심 언어를 훌륭히 사용한 건축가이다.

라이트는 위스콘신주 리릴랜드센터에서 1869년 6월 8일 음악가겸 목사인 윌리암 C.라이트와 웨일즈 출신의 안나 로이드 라이트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라이트는 태어나서 처음 20년은 위스콘신의 남서부에서 보냈다. 부모님 모두 교육을 많이 받으셨던 분이었다. 어머니는 독일 교육자인 프리드리히 프뢰벨에게 자식을 교육시켰다. 프뢰벨은 자연을 모방하게 시키기보다는 나무 상자, 큐빅 그리고 구들을 이용해 확장시키면서 시각 훈련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라이트에겐 평생 잊지 못할 기억들이었다.
또한, 삼촌의 농장에서 라이트는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를 했다. 그리고 시골의 삶에 대한 영원한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라이트가 태어나기도 전에 자식이 남자아이일 것이며 그는 아름다운 건물을 지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스스로 건축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그가 애들러와 설리반 밑에서 배웠던 것과는 색다른 주거 건축을 시작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사무실을 연지 6년 만에 그는 주거 건축의 디자인을 변화시키는데 성공했고, 삶의 새로운 패턴을 창조해 냈다. 이러한 혁명적인 스타일을 -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모방되어지기도 했던 - 프래리 하우스(prairie house)라고 부른다.
현재의 집들은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다. 창문은 벽에 난 작은 구멍과도 같고, 재료는 나름대로의 성질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주거 건축에서 새로운 언어를 찾고자 노력했던 그는 프래리 하우스를 개발했다. 그는 대평원에 걸맞다고 생각하는 길고, 낮은 라인을 형성하는 주택을 원했다. 그는 다락방과 지하실을 없앴으며, 지붕선을 조용하고 우아하게 만들고자 했다.
"어쩌면 본능 깊숙이 자리 잡은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어떠한 주거라도 shelter(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가 본질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낮고 넓게 퍼지는 지붕을 설치했습니다(그것이 납작하거나 어떻든 간에). 나는 건물을 동굴이 아니라 넓고 그 장소와 관련된, 하나의 shelter라고 보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난 땅과 평행한 면이 그 자신을 땅과 경계 지으면서도 건물이 땅에 소속되게 만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개념을 건물에 넣었습니다."
그는 prairie house를 짓는데 있어서 뚜렷한 원칙과 기준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건축주의 요구와 그 땅의 언어에 맞게 지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집이 "box"형태로 되는 것을 매우 꺼려했다. 이 말은 즉, 방은 서로 불필요한 벽과 문을 없애서 방끼리 서로 유동성이 있어야 하고 부드러운 유리 영역을 통해 빛과 공기가 흘러 들어와야 한다는 말이다.

"모든 위대한 건축가는 분명히 위대한 시인이다. 그는 분명 그의 시대와 그의 삶, 그리고 그의 나이에 대한 뛰어난 해석자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이 있었다. 이러한 경제 공황은 국가의 가능성과 국가성을 재평가하게 했던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의 라이트의 주요 관심사는 도시 집중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계획의 수립과 미국 중산 가정이 살 수 있는 housing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 해결책으로 Broadacre City와 Usonian House가 제안되었다.
Usonia라는 단어는 1925년 라이트의 기록물에 최초로 나온다. 미국을 위한 자신의 건축적 제안을 구체화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
이 시기의 약 16년 동안 라이트는 거의 500점에 해당하는 프로젝트들을 설계했다. 이 시기 동안인 1943년에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시작했으며, 그의 전 작품의 거의 절반에 해당되는 정렬적인 창의성을 보여주었다.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기적 건축 -
자연에서 추출된 그의 건축적 모티브는 가장 원초적인 개념으로 읽을 수 있으며, 이러한 자연에 대한 직관은 자연의 자태에서 형상화된 구조의 시스템을 비롯하여 형태, 내부와 외부공간의 관입, 수직과 수평의 상호 연관관계 및 연속과 확장, 반복 및 대립의 관계로 이어져 각각의 개체가 결합되면서 일체로 표현되는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의 맥을 이루고 있다.

라이트는 그가 평생 스승으로 생각한 당시 시카고학파의 거장인 루이스 셀리반 사무소에 입사하면서 '미'라는 것은 기능이나 형태에 내재하고 있다는 유기론(자연적이며 생물적인 것으로 유기적 인간성으로 연결되며, 서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사상이나 사물의 파악)을 계승 발전시켰다.
라이트는 140개 정도의 주택설계, 50여개에 가까운 계획안 등 다작의 주택 설계를 했으며 이를 통해 건물의 진실성은 건물의 지붕과 벽에 있는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 수 있는 내부공간에 있음을 제시했다.

초기의 계획에서는 좌우대칭의 엄격한 고전주의(classicism)에 의하여 구성하였으나 묵직한 평면 및 단면을 단순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유틸리티 코어(utility core: 주방, 세탁실, 화장실 등 물을 쓰는 공간을 한데 모아 설비에 대한 처리를 간편하게 함)가 주택의 중심적 요소로서 평면의 가동 칸막이와 다양한 높이의 천정으로 공간의 변화를 꾀하는 등 인간적인 스케일을 채택하였으며, 다양한 높이의 내부 공간감은 건물 외관에서 볼륨감의 변화가 솔직하게 표현되었다.
또한 수평선을 강조하여 대지에 펼쳐지는 듯한 공간을 전개하여 자연과의 융합을 시도하였으며, 매개공간의 효과와 평면형식은 세로와 가로로 직교하는 축선에 의해서 십자형플랜을 이루어 교차되는 두개의 축에 의해 결정되었다.
벽으로 구획된 각각의 방도 창문에 의해 차단되지 않고 자유롭게 유통되며, 칸막이 역할의 벽은 드라마틱한 공간을 연출한다. 실내공간은 어느 방으로도 확산되어 공간의 연속성이 확연하며 창문은 프뢰벨 가베의 영향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형성하고 크게 열린 개구부를 통하여 테라스나 발코니가 정원 등 외부공간과 융합해서 각 실의 연속성과 아울러 내부와 외부공간이 상호관입한 유기적 건축의 실체가 되도록 하였다.

라이트는 시대적 흐름의 격동과 역경 속에서도 많은 작품 활동을 통하여 자신의 건축적 사고의 근본인 유기적 건축론을 실재화하면서 이론과 실체를 겸비하며 충실하게 표현한 건축가로서, 자연을 디자인의 모든 원리, 결과의 내부적인 요소로서 이해하였으며, 그러한 건축이념은 생명 그 자체로서 내부적 유기체이며 형태와 기능을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여 부분은 전체를 구성하기 위해 중요할 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과도 융합해야 되며, 공간은 그 생활을 구성하는 중요한 성분으로서 외부로 향하고 또한 내부로 향해 흐르는 것으로 모든 것을 제 3차원으로 하여 느끼고 보며 사용하는 것으로 확립하였다.

1. 유기적 건축 : 단위, 요소 - 신진대사

1894년 공공 연설에서 처음으로 '유기적(organic)'이라는 말을 썼다.
"당신의 주택이 그것의 장소로부터 쉽게 확장될 수 있고, 그곳 자연이 근사하다면, 그곳의 환경과 호흡을 같이 하도록 하게하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건축물이 마치 그러한 기회를 가졌던 것처럼 그 장소에서 조용하게 자리를 잡고 있도록 하라."


2. 라이트의 세가지 유기적 건축 원리

유기적건축의 정의 : 시간의 흐름, 장소적 특성, 인간적 요구(기능)

  • ㆍ시간적 흐름 - 20세기 건물은 17세기 건물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 과거의 건물은 현대에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과거만 삶의 방식과 사회양식 등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 ㆍ장소적 특성 - 장소에 적합하려면 그것은 주위 환경, 경관을 가장 잘 이용해야한다. 그 예로 pairie house, 지평선을 따라 확장되도록 만들었다. 주거층은 위로 올려서 주변 환경의 경치를 제공했다. 대표적인 예로 낙수장, 그것은 건물과 장소가 조화롭게 엉켜있는 궁극적인 예이다.
  • ㆍ인간적 요구 - 건물의 목적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조에서도 인간을 단위 길이로 사용했다. 그리고 건물의 리얼리티는 벽이나 천장이 아니라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의 "공간"이다. 그는 초기 집에서 건축적 공간을 자유화시켰다. 불필요한 파티션은 없앴다. 즉, family house에 open plan을 제공했다.


3. 라이트의 주거디자인 지침 원리

  • ㆍ주택에 필요로 하고 있는 부분의 수를 적게, 분리된 방의 수를 최소화.
  • ㆍ대지에 수평인 평면을 늘리고 이것을 강조, 건물 전체를 그 대지와 연결시킬 것.
  • ㆍ상자와 같은 방, 모든 벽을 단순히 둘러싸는 막으로 활용하고 있는 주택을 배제할 것.
  • ㆍ불건전한 지하실을 모두 지상에 위치시킬 것.
  • ㆍ안팎의 필요한 모든 개구부를 인간적인 비례로 조화시켜 그것들이 극히 자연스럽고 일련의 전체적 건물로 존재하도록 할 것.
  • ㆍ잡다하게 서로 다른 재료들 조합시키는 것을 그만두고 가능한 단일 소재를 사용할 것.
  • ㆍ난방, 조명, 베란다 같은 것을 모두 통합시킬 것.
  • ㆍ실내장비를 건물 그 자체와 일체화, 그들 비품을 기계작업에서 제작하기 쉽도록 디자인하며 이로 인하여 실내 장비를 가능한한 유기적 건축의 일부로 통합.
  • ㆍ장식을 축출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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