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1년 비엔나(Vienna)의 교외 펜징(Penzing)에서 출생.
1857년 빈 공과대학(Vienna University of Technology) 입학.
1860년 베를린 왕립건축학교(Berlin Bauakademie) 입학.
1861~1863년 빈 조형예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 Vienna)의 건축과에서 수학.
1863년 독립하여 건축가로서 활동 개시. 요제피네 돔하르트(Josefine Domhart)와 결혼.
1873년 테오필 한센(Theophil Hansen)과의 협동 작업으로 ‘그라벤호프(Grabenhof)’ 설계.
1880년 요제피네와 이혼. 어머니(Susanne Wagner) 사망.
1886~1888년 자신의 주택 ‘바그너 빌라(Villa WagnerⅠ)’ 건축.
1888~1889년 ‘링케 빈차일레(Linke Wienzeile) 아파트’ 건축.
1890년 비엔나 신도시 계획에 대한 의뢰를 받아 만든 작품으로 명성을 얻음.
1894~1897년 비엔나 시내 전차와 도시 철도망 작업(Viennese Stadtbahn, metropolitan railway system). 빈 조형예술 아카데미 건축학과 교수로 임용.
1894~1898년 요셉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가 그의 조수로 일함. 카를 광장 역사(Karlsplatz Stadtbahn Station) 건축.
1896년 『근대 건축 Moderne Architektur(Modern Architecture)』선언서 출간.
1898~1899년 마조리카 하우스(Majolika Haus) 건축.
1899년 ‘빈 황실 역사’ 건축. 빈 분리파 운동(Wiener Sezession)에 합류. 비엔나 제체시온 홀(Sezessionhaus/Secession Building)에서 첫 번째 제체시온 전시회를 가짐.
1902년 ‘<디 차이트>지(誌) 배달 사무실’ 건축.
1904~1906년 ‘비엔나 우체국 저축은행(Postalparkasse)’ 건축.
1905년 클림트(Gustav Klimt), 호프만(Joseph Hoffmann) 등 그 밖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분리파 운동에서 탈퇴.
1905~1907년 ‘스타인호프 교회(Kirche am Steinhof)’ 건축.
1906~1907년 비엔나 ‘슈첸 하우스(Schutzenhaus)’ 건축.
1909~1913년 비엔나 ‘베르크가 쇼룸’, ‘노이에스티프트 거리의 스튜디오’ 등 건축.
1910~1913년 결핵 환자를 위한 ‘요양원’ 건축.
1912-1913년 바그너 빌라Ⅱ(Villa Wagner II) 건축.
1918년 4월 11일 비엔나(Vienna)에서 작고.

- 아르누보 건축(Art Nouveau architecture)의 대가 ‘오토 바그너’ -
오토 바그너는 1841년 7월 13일 비엔나(Vienna)의 교외 펜징(Penzing)에서 태어났다. 부유 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5살에 아버지(Notary R. Wagner)를 여의고, 홀어머니(Susanne Wagner)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자녀교육에 대단히 열성적이서 바그너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졸업하기 2년 전부터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특별히 개별지도를 받도록 할 정도였다.
바그너는 1857년에 빈 공과대학(Vienna University of Technology)에 입학해 수학했다.
바그너가 빈 공과대학에 입학한 1857년도는 오스트리아 황제가 성벽 철거를 명령했던 해로, 비엔나에서 건축의 붐이 일기 시작한 해였다. 당시 무기 제조술의 발달로 인하여 도시 성벽의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바그너는 다시 1860년에 당시 문화의 중심지인 베를린으로 가서 왕립건축학교(Berlin Bauakademie)에서 공부하였다. 이 대학은 독일 고전주의 건축의 거장인 쉰켈(Schinkel:1781-1841)이 직접 강의하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바그너는 이곳에서 고전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의 초기 작품에서 이러한 고전주의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바그너는 왕립 건축학교에서의 수학 후에 비엔나로 돌아와 1861년에 빈 조형예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 Vienna)에 입학하여 비엔나 오페라 하우스(Vienna Opera House, 1861-69)를 디자인한 지카르스부르그(August von Sicardsburg) 교수와 뉠(Eduard van der Null) 교수 밑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당시에 비엔나에서는 온통 온 도시가 공사장처럼 건설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황제의 명령으로 성벽을 철거한 자리에 비엔나를 둘러싼 환상도로 링스트라세(Ringstrasse) 건설 공사가 1861년부터 5년간 계속되었고, 도로변에는 새로운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에 바그너는 푀스트(Ludwig Von Forster) 스튜디오에 합류하여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때부터 전 유럽 대륙에서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유럽을 지배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Habsburg家)는 독일 프로이센(Preussen)을 지배하고 있던 빌헬름 1세(Wilhelm I)의 ‘통일 독일’의 정책에 밀리고 있었다.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를 수상으로 내세워 강력한 통일정책을 추진했고 철혈(鐵血)정책의 일환으로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여 3번의 전쟁을 통해서 그 목적을 이루었다.
바그너는 이런 전쟁의 와중인 1868년 큰 충격을 받게 된다. 하나는 그의 은사인 뉠 교수의 자살이었고, 또 하나는 지카르스브르그 교수의 죽음이었다. 그것도 오페라하우스가 완성된 후의 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다.
비록 오스트리아 전쟁에는 패배했지만, 유럽 국가 간에 평화가 찾아오고 비엔나에서 건설 붐이 일어남에 따라 바그너는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55세가 되는 1894년 바그너는 자신의 모교인 빈 조형예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 Vienna)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전기(轉機)를 맞게 된다.
첫째로 바그너는 대학교수로 부임한 지 얼마가 지나지 않아『근대 건축 Moderne Architektur(Modern Architecture)』을 처음으로 출판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예술의 유일한 지배자는 필요다’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작품 경향도 서서히 변해갔고, 이것이 앞으로 작품 활동에 있어서 목표가 되었다.
둘째는 그가 대학교수로 재임함으로 인하여 제자와 조수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과는 단순한 제자와 조수가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동지로서의 끈끈한 관계를 맺게 되고 소위 ‘비엔나 학파(Vienna school)’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왜 우리들은 항상 다른 시대의 양식을 좇아서 건축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왜 우리들 시대에 맞는 우리들의 양식을 발견하려고 하지 않는가”라고 한 쉰켈(Karl Friedrich Schinkel)의 말처럼 기존의 관념적 전통에 반항하고 저항하여 새로움에 도전하는 일군(一群)의 무리를 형성하게 된다.
이 그룹들이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요셉 올브리히(Joseph Olblich), 아돌프 로스(Adolf loos), 요셉 호프만(Joseph Hoffmann)들이다. 이들은 대학에 반기를 들고, 분리파 운동, 즉 ‘제체시온(Sezession) 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바그너도 이 운동의 정식 멤버가 되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 경향은 초기의 역사주의 양식인 고전주의, 신 르네상스 양식에서 벗어나 간결한 양식으로 바뀌어져 갔고, 건축 재료의 선택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콘크리트에 철근을 집어넣는 것은 사실 1830년대부터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조셉 모니에가 최초로 개발하여 특허를 받은 때는 1850년대였다. 벨기에인 에느빅과 미국의 랜섬은 이 시공방법을 건축시공에 적용한 대표적인 엔지니어이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은 이러한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1904년에 마틴 하우스(D. D. Martin House)와 라킨 빌딩(Larkin Building)에서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구조를 바닥판과 보에 사용하였고, 바그너도 1906년 비엔나 우체국 건물(Postalparkasse, 1904-06)에 처음으로 콘크리트 바닥판을 사용하였다.
셋째, 바그너는 아카데미에 교수로 취임한 후 바로 2가지의 큰 프로젝트를 위촉받았다.
하나는 비엔나시의 40㎞에 지하철을 위한 36개의 지하철 역사, 플랫폼과 계단을 설계하는 것(Viennese Stadtbahn, metropolitan railway system, 1894-1902)이고, 다른 하나는 도나우 강 운하(Danube Canal)를 위한 갑문 시설(Schutzenhaus, 1906-07)의 설계였다.
특히 쉔브룬(Schonbrun)궁 앞 호프파빌리온(Hofpavillion, 1894-98)카를 광장 역사(Karlsplatz Stadtbahn Station, 1894-98)는 가장 유명한 것으로 전자는 황제를 위하여 특별히 설계된 것이며, 후자는 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폐허로 남아있던 것을 1977년에 말끔히 보수하여 현재는 박물관과 카페로 사용하고 있다.

바그너는 해가 거듭할수록 작품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는데, 첫 번째가 일명 마조리카 하우스(Majolika Haus, 1898-99)라고 불리우는 빈차일레(Wienzeile) 거리에 세워진 아파트다. 이 건물은 전형적인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으로 건물 외벽에 아름다운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두 번째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비엔나 우체국(Postalparkasse, 1904-06) 건물이다. 이것은 현상설계에 의하여 당선된 것으로 바그너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기록될 만큼 근대적이고 신성한 것이었다.
세 번째는 성 레오폴드 교회(Church of St. Leopold, 1903-07)이다. 이것은 스타인호프(Steinhof) 요양소 내에 지어졌기 때문에 일명 스타인호프 교회(Kirche am Steinhof)라고도 불리어지는데, 정신병자 요양소 내의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지어졌다.
바그너는 71세에 교수직에서 은퇴한 후 바그너 빌라Ⅱ(Villa Wagner II, 1912-13)를 설계하게 된다.
그리고 3번에 걸쳐 작품집을 발간하였다. 마지막 작품집을 발간한 해인 1914년 그 동안 유지되어 오던 평화는 깨지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구라파는 다시 혼란과 파괴가 뒤따르게 되었다.
바그너는 전쟁의 와중에서 종전을 보지 못한 채 1918년 4월 11일 향년 71세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바그너가 눈을 감기 두 달 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가 1918년 2월 6일 사망하였고, 같은 해 10월 18일에 콜로만 모제르(Koloman Moser), 10월 31일 에곤 쉴러(Egon Schiele)가 차례로 사망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재능 있는 예술가들은 바그너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차례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남겨놓은 아름다운 발자취만을 돌아볼 수 있을 뿐이다.

- 현대 건축의 선구자 ‘오토 바그너’ -
오토 바그너는 선구적 건축가일 뿐만 아니라, 교육자였으며 빈 지식사회의 리더이자 비엔나 현대화 계획의 주역이었다.
1894년 바그너가 당시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 없던 비엔나 조형예술 아카데미 교수가 되면서 쓴『근대 건축 Moderne Architektur(Modern Architecture)』이라는 책은 수개국어로 번역되면서 신건축운동의 교과서가 되었다.
바그너는 “예술가는 대중이 즐기는 것보다 대중이 즐기고 싶어 하는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괴테의 말에 동의하면서, 문외한일 수밖에 없는 국가의 역할을 질타하고, “예술 창작에 대한 우리의 출발점은 근대 생활 속에서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건축가로서 세계적 걸작을 연이어 발표하고 비엔나 교외를 둘러싸고 있는 고가철도와 지하철도망 노선상의 정차장을 포함한 모든 부분을 설계했다.

백년 전 비엔나는 세계 문명의 중심에 선 도시의 하나였다. 문명 중심의 도시에서는 모든 분야의 지식인들이 집합하고 교감한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Ludwig Josef Johann), 프로이트(Freud, Sigmund), 구스타프 말러(Mahler, Gustav) 등 현대 문명 개화기의 천재들이 비엔나에서 동시대에 활동하고 있었다.
비엔나의 지식인 사회는 19세기 말 문명의 지적 실리콘밸리 같은 곳이었다. 그 중심에 바그너가 있었다. 상류사회에서 성장한 바그너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 안주하기보다 신(新)문명의 전사로서 새로운 건축의 도래를 위한 선구자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현대 문명이 인류의 새로운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현대 건축과 도시 계획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옛 문명의 위대한 성과를 잊지 않았다. 과거의 위대함을 되살리고 과거의 모순을 초극하는 새로운 건축과 도시에 대한 그의 열정이 건축가로서 도시 계획가로서 교육자로서 저술가로서 그의 일생을 이끌어간 힘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은 피렌체(Firenze) 르네상스 형식의 아파트블록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는 오랫동안 기득권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 그가 기득권을 포기하고 비엔나의 개혁을 주장했다.
그가 명성을 크게 떨친 것은 1890년 비엔나의 신도시 계획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그가 꿈꾸던 링스트라세(Ringstrasse)를 중심으로 한 위대한 비엔나 건설의 청사진은 실현되지 않았고 그 계획의 일부인 도시철도 네트워크만 실현되었다.
이때의 철도 관련 프로젝트 중 건축사에 영원히 남은 유명한 프로젝트가 카를 광장 역사(Karlsplatz Stadtbahn Station, 1894-98)이다.
이 건물은 현대 건축의 공법과 기능 형식을 갖추었으나 제체시온(Sezession: 분리파) 스타일의 장식적 모티브가 함께한 절충적 현대 건축으로,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건축이었다.

그의 건축적 삶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사건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의 자리에 오른 그가 젊은 건축가인 요셉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나 요셉 호프만(Joseph Hoffmann)에 자극받아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 일이다. 그때 그는 “건축가는 오십부터 시작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때 만든 링케 빈차일레(Linke Wienzeile)의 아파트(1888-89)는 고전형식에 매어 있던 그의 초기 작품과 다른 창조적 진화를 보인 작품이다.
바로 이어 도시의 삼각형 대지에 세운 비엔나 우체국 저축은행(Postalparkasse, 1904-06) 건물은 그의 이름을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만든다.
빈 우체국 저축은행은 1904년에 시작해 1906년에 완성된 가장 완숙한 바그너의 걸작이다. 이 건물은 건축의 모든 부분이 그의 의도대로 디자인된 20세기 건축의 최고 걸작 중 하나다.
빈 우체국 저축은행이 문을 열었을 때 당시 빈 사람들이 “드디어 빈은 현대 건축의 위대한 걸작을 갖게 되었다”라고 하던 그 말이 백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한 울림을 갖는다.

바그너는 20세기 현대 건축의 문을 연 선구자이면서 동시대 지식인들의 리더였으며, 현대 문명을 맞은 역사 도시 빈의 성공적 현대 도시화의 마스터플랜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빈을 누구보다 깊이 알고, 누구보다 더한 열정을 가지고서 이 도시가 가진 과거의 영광과 미래의 비전을 자신의 건축 작품과 도시 계획안을 통해 보여준 위대한 빈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료와 후배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면서, 또한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열린 사람이었다.
20세기의 빈을 바그너 없이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는 빈의 건축가로서, 도시 계획가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위대한 인간이었다.
세계적 건축가는 그가 속한 도시의 역사와 지리와 사회의 소명을 자신의 사명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바그너는 그의 생애를 통해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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