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2년 에스파냐(Espana) 남부 카탈루냐(Catalunya)에서 출생.
1863년 레우스 중등학교 입학.
1867년 어린이 잡지 El Arteguia 디자인.
1869년 바르셀로나 대학의 건축학과 예비과정 입학.
1871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 입학.
1872년 물탱크와 공동묘지 정문에 관한 학생프로젝트 참여.
1876년 시청사 직원과 레알 부두 건축 참가. 바르셀로나 종합병원, 대학강당 건축에 학부시절 마지막으로 참여. 건축사로 첫발을 내디딤. 모친사망.
1878년 건축사 자격 취득.
1879년 시인 비센떼 가르시아(Vicente garcia)에 기마대 디자인을 바침. 누이 사망. 조카 로시따 에헤야 입양.
1800년 호셉 세라 말레라 알레나와 함께 바르셀로나 해안도로 가로등 합작 프로젝트 추진.
1881년 그의 유일한 기고문을 La Renaixensa에 기고.
1882년 공업기술자인 Juan Martorell Montellas와 공동작업.
1883년 성가족 성당의 작품 방향 설정. 후안 마누엘 비센스 문따네르 저택 건설(1883-1888). 산딴데스 까미야스의 엘 카프리쵸 저택 건립.
1885년 성가족 성당 첫 프로젝트.
1886년 구엘 궁전, 북 람블라스 거리(1886-1888).
1887년 칼벳 저택(1898-1899).
1899년 베예스구아드트 탑 건립. 구엘공원 건설(1900-1914).
1904년 그라네르 살라 메르세 저택. 호세 바뜨요 저택(1904-1906).
1905년 아르띠가스 정원.
1906년 밀라 저택(1906-1911). 구엘공원 내의 저택 입주.
1907년 Jaime L. 하이메 기념비.
1910년 파리의 Grand paris에서 전시회 개최.
1911년 열병을 앓음.
1925년 성가족 성당 종각 완성.
1926년 6월 7일 Sagrada Familia 성당 앞에서 전차 사고. 6월 10일 산따 쿠르즈(Santa Cruzu) 병원에서 사망.
-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
본명이 안토니 가우디 이 코르네트(Antoni Gaud i Cornet)인 그는 정열의 나라 스페인이 낳은 20세기 최고의 건축가이다.
가우디는 1852년 6월 25일 에스파냐(Espana) 남부 카탈루냐(Catalunya)의 레우스(Reus)에서 구리세공업을 하는 부친 프란시스코 가우디 세라(Francisco Gaudi Serra)와 안또니아 꼬르넷 베르뜨란(Antonia Cornet Bertran)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가깝게 놀이하며 지낼만한 친구도 없었으며, 마땅한 놀이기구도 없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연스럽게 모든 자연이 친구이자 놀이기구가 되었다. 가우디의 생가는 도시에서 좀 떨어진 시골이었다. 그곳은 지중해 연안으로 자연환경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우며 경이롭기까지 한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자연과 벗이 되었으며 자연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그가 자연에 대해 놀라우리만큼 뛰어난 관찰력을 갖게 된 것은 이때 형성된 것이다. 그는 자연의 모든 것을 존중하며 이해했다. 하늘과 구름, 물과 바람, 나무와 식물, 동물과 곤충, 산과 바위 등 여러 가지를 보며 이를 통해서 건축언어에 접목해 갔다. 특히 가우디는 몬세랏(Montserrat)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며 그 산을 매우 좋아했다.
또한 가우디는 레우스 지방에서 대장간을 운영하는 삼촌에게로 가서 대장간 일을 어린시절에 배웠다. 여기서 가우디는 철을 불에 넣고 꺼내 망치로 두들겨서 철을 단련시키는 단철과정은 물론이거니와 주조술과 석고로 본을 뜨는 방법까지 배우게 된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 있는 에우달도 푼트(Eudaldo Punt)에서 건축설계와 시공에 관한 실무적인 일들을 수확한다. 그는 이곳에서 건축자재의 특성들도 함께 배웠으며 이것이 후에 가우디가 맡은 일들을 수행하는데 있어 필요한 목수, 주철공 등 건축 관련 인부들과의 관계설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가우디는 한번 인연을 맺은 기술자들과는 끝까지 함께 일을 했으며, 그들이 나이가 들어 일을 못할 시에는 그 자제(도제제도에 의한 전수자)들과 일을 함께 했다. 따라서 모든 작업을 하는데 그들도 가우디의 감각과 뜻을 이해했고, 가우디는 작업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가 있었다. 지금으로 보면 거래선을 한번도 바꾼 적이 없었던 것이다.

가우디는 17세 때부터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바르셀로나의 건축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학창시절에 비라르와 폰트스레 등의 조수로서 설계활동에 종사하였다.
1878년 학교 졸업 후부터는 독자적으로 일을 시작,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많은 독창적인 건축을 남겼다. 밀가루 반죽으로 빚어 놓은 듯 구불구불한 6층 아파트 '카사 밀라', 기묘하고 아름다운 창문장식이 보는 이를 매혹시키는 '카사 바트요', 환상적인 돌조각과 타일장식이 공원 전체를 구불구불 덮고 있는 '구엘 공원' 등의 걸작을 남겼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남긴 대표작 중의 대표작은 신이 머물 지상의 유일한 공간이라 말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聖가족) 교회'이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네 개의 탑과 생동감 넘치는 우아한 조각으로 장식된 이 교회는 착공한 지 115년이 지났고 완성되려면 앞으로도 200년이 더 걸린다고 한다.

세상이 가우디를 처음 주목하게 된 것은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가우디가 출품한 독특한 디자인의 진열장이 사람들 눈을 사로잡으면서 부터였다. 그의 천재성을 일찌감치 발견한 에우세비 구엘은 최대의 스폰서가 된다.
가우디는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피카소보다 더 영웅으로 추앙하는 인물이지만, 생전의 그는 국가에 헌신적인 타입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들어 도시에 구현한 건축가이고 예술가였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다.
1883년 31살 때 그 유명한 성가족(Sagrada Familia) 성당 공사의 총감독에 취임하게 된다. 이후, 생의 만년에 기독교도로 살면서 성당에서 먹고 자며 일에 빠져 살았다. 가끔 시내로 나갈 때면 그의 부랑자 같은 행색 때문에 행인들이 푼돈을 적선해 줬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죽음도 비범했다. 1926년 6월 10일 그의 일터인 성가족 성당 바로 앞길에서 전차에 받혀 생을 마감했다. 느리디 느린 전차에 받힌 그의 마지막 순간은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며 길을 걷는 노대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사고 현장엔 <가우디 등>이 지금도 불을 밝히고 있다. 죽은 뒤 가우디를 다룬 스페인 영화가 6편 나왔으며, 그를 다룬 언론보도가 3,000여 회가 넘는다.

- 자연을 사랑한 건축가 ‘가우디’ -
가우디를 이해하려면 건축분야에만 국한하여 평가해서는 안된다. 즉, 건축사가들은 건축사에 입각하여 다른 건축물과 그의 건축물을 동시대적 관점에서 일직선상으로 동일시하며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어느 스승에게 사사 받은 일도 없고, 특정집단에서 일을 한 적도 없으며, 가족 중에 누구도 건축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작품은 어느 시대의 건축양식 및 특정분야로 분류하는 데는 난해한 부분이 많다. 그의 작품은 그 시대의 양식과 형식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무런 편견 없이 사물을 관찰하고 이를 작품화하는 능력을 그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소박했다. 그러나 대단히 명석했다. 가우디와 수년간 작업을 함께한 화가 후안 무네(Juan Munn)의 말에 의하면 "가우디는 확고하고 명석한 생각의 소유자"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가우디의 작품을 살펴보면 선은 곧은 것이 없으며, 입면은 들쑥날쑥 하고, 바로크양식으로 보이는 외관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으나 불합리한 점이 더 많다. 이로 인해 그의 정신상태가 좀 괴팍한 면과 마음이 뒤틀려 있지 않았나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판단이다. 이 시대의 건축가는 논리성을 갖는 미학과 추상화적인 과정을 거쳐 설계를 하며, 보조적인 수단으로 자와 콤파스를 사용했다. 건축자재를 자르거나 형태를 만들 때에도 이를 활용하여 2차원의 평면과 직선, 원과 다면체에서 5각형의 12면체인 3차원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가우디의 작품은 기하학적인 형태에 얽매이기 보다는 자연적이며, 변형이 많고, 쉽게 인지되지 않는 곡선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플라톤이 주장하고 이론화 한 제5의 원과 같은 형태로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가우디의 작품은 이론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형태이다. 이는 처음부터 기하학을 사용했다면 아주 단순한 기하학을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통제기하학(regulated geometry)을 응용하여 많은 부분 사용하였다. 가우디의 작품을 여러 건축가가 응용하여 모방하려고 했으나, 가우디의 작품과 같은 건축물이 완공된 것이 지금까지 없는 것으로 보아, 그가 설계한 건축물들은 가우디의 상상력이 어떠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가우디는 말한다. "건축가는 균형에 대한 타고 난 감각이 있어야 한다. 건축가는 건물의 형태를 디자인하고, 그것을 구조전문가(구조기술사)에게 구조에 대한 수학적 안전성을 검토 받는다. 그 후 구조전문가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건축가로서의 자질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전문가가 이상이 있다고 한다면 건축에서 손을 떼는 것이 현명하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자신에 대하여 엄격한 면이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la, 성가족 성당)의 종루는 포물선이면서 젖은 모래를 떨어뜨릴 때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를 시행할 때 가우디는 '중력의 법칙'을 엄격히 따랐다. 가우디는 설계도보다는 모형을 중요시 했다. 그 모형을 만들기 전 그는 실을 천장에 매달고 탑부분과 전체적인 모습을 모래 주머니 혹은 납을 중간 중간에 매달아 그 휨의 강도를 측정해 나갔다. 그리고 최상의 곡선과 아름다움이 나오면 이를 스케치했다. 여러 번에 걸친 반복 스케치와 모형작업을 했다. 그런 다음 건물의 형태와 구조를 결정하였다. 이렇게 한 건축구조형태에 대해 가우디는 자기 자신 스스로가 구조 계산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현대의 첨단 장비를 동원한 구조계산에서도 오류가 발견된 것은 없다. 그가 말하는 것은 완벽한 균형감각이다. 가우디의 건축형태는 그 누구도 상상도 못할 상황에서 만들어 졌으며, 가히 독창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그가 말했듯이 "자연에서 태어나고 자연이 베풀어 주는 매우 균형적인 자연적 구조"인 것이다.

가우디는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나 큰 동물에서는 얻은 것은 별로 없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용의 형상이 있으나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상에서 나왔다. 그는 아주 조그마한 곤충(파리, 모기, 들벌레 따위)과 들에 많이 나는 잡초와 나무, 잎 등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또한 동양의 미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형태를 표현해 나갔다. 가우디의 건물구성을 보면 동물의 뼈, 야자수, 곤충, 사람의 해골 등의 모습이 자주 사용됐다. 그는 나무의 줄기와 해골만큼 아름답고 완벽한 구조는 없다고 할 정도였다. 아무리 아름다운 돔이라고 할지라도 해골의 내부에 비할 수 없으며, 산이 가지고 있는 완벽한 안정성에 어떠한 건물도 따라 갈 수 없다고 가우디는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건축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가능성을 추구한다면 미를 잃게 될 것이다. 또한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면 미학, 예술 이론 또는 철학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렇게 추상적인 이론들은 나에게는 사치이며 관심도 없는 분야이다."
가우디는 일찍이 바그너가 주창했던 종합예술론과 '자연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괴테의 자연론에 영향을 받아, 스페인 고유의 고딕 양식과 이슬람 양식(무데하르 Mudejar) 양식을 재창조하여 대담하고 환상적인 건축양식을 완성했다. 피카소, 미로, 카잘스 등 동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들도 바르셀로나 곳곳에 있는 가우디의 건축물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가우디는 건축을 자연의 여러 가지 형상을 기초로 하여 구조·형태·기능·상징의 종합으로서 제시한 위대한 건축가였다. 전형적인 그의 건축은 모든 면에서 곡선이 지배적이며, 벽과 천장이 굴곡을 이루고 섬세한 장식과 색채가 넘쳐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따라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에 걸쳐 유럽을 풍미하였던 아르누보(art nouveau)의 에스파냐판(版)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1890년대를 경계로 하여 2기로 나눌 수가 있다.
전반기의 작품은 건축 그 자체의 몸체는 비교적 중후하며 극단적인 변형은 보이지 않으나 세부의 장식에는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특히 철을 사용한 곡선적인 장식은 피레네 북쪽의 아르누보의 장식과 대응관계에 있다.
그러나 가우디의 진가는 어디까지나 후반기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그의 건축장식에서 보였던 미로(迷路)와 같은 구불구불한 공간(空間)의 이미지가 전체의 건축디자인으로 확장되어, 계획부터 구조의 형태 및 세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디자인을 지배하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에는 코로니아 구엘교회의 제실(祭室:1898∼1914), 구엘공원(1900∼1914)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그의 중요한 후원자였던 구엘백작을 위한 것이었다.
주택건축으로 독특한 형태와 내부공간을 지닌 카사 바트요(1907년 완성)와 카사 밀라(1907년 완성), 1884년에 착수하여 결국 필생의 대작이 된 사그라다 파밀리아교회의 익랑(翼廊)의 정면(正面, 1908년 완성) 및 탑·조각(1903∼1926) 등은 가우디 건축의 가장 극적인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그의 건축은 아르누보의 유행을 초월하여 근대에 살았던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을 건축으로 표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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