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반 데어로에

(1886~1969)

그는 우리주변에 볼수 있는 커다란 커튼월(철골과 유리벽을 한 구조)을 한 높은 빌딩들이 도시에 자리잡게 한 장본인입니다.

현대 건축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거장입니다.

 

그의 일생

그는 독일 출신의 근대 건축가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석공이었며 그러한 영향 탓에  그는 어릴 적 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돌을 만졌습니다. 흥미롭게도 미스 반 데어로에는 한번도 건축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일본의 유명 건축가 노출콘크리트로도 유명한 안도 다다오 그리고 그에게 영감을 준 르코르뷔지에 와 평행선을 긋는 듯 합니다. 베를린으로 이사를 온 뒤 근대 건축의 초창기 거장인 페터 베렌스의 스튜디오에서 건축일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정규 교육이나 학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곧 재능을 인정받고 독립적으로 건축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곳에서 철골과 유리에 매료된 그는 산업주의와 신고전주의를 통합하게 됩니다. 산업의 재료와 즉 유리, 철과 고전주의의 비례와 형태에 동시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의 본명은 원래 '마리아 루트비히 미하엘 미스'였는데 자신의 이름이 촌스럽다고 항상 여겼던 그는 새로운 디자인 이론과 독일의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어머니의 성인 '반 데어 로에'와 아버지의 성을 합하여 지금의 이름인 '미스 반 데어로에'로 개명을 합니다.

그렇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독일과 미국에서 살았던 그는 건축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바로 다름아닌 모더니즘입니다. 독일에서는 바우하우스의 학장으로서, 그리고 미국에서는 일리노이 공과대학교의 학장으로서 재직하여 모더니즘 건축의 중심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지금도 화두가 되고 있는 미니멀리즘을 이끌었던 장본인입니다. 이것은 그의 명언에서 알아 볼 수 있습니다. "Less is More" 더 적은 것이 더 풍요로운 것이다. 이 말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개인적인 모토 일 뿐 아니라, 20세기 초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가치를 찾고자 했던 근대 근축가들의 이상과 맞아 떨어졌습니다. 산업화가 진행되었던 19세기 말과 20세기초 에는 기존의 역사적인 건물의 외관과 장식을 흉내내는 예전에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관습적인 건축에 대한 반항운동이 일어 났던 시기 입니다. 시대는 변하여 가는데 건축은 그대로 머물러 있고 오히려 퇴행하는 듯하여 이러한 운동이 벌어졌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1920년대에 와서 국제주의 형식이라는 사조로 통합되어 바야흐로 현대 건축의 새 장을 열게 됩니다. 그 중심에는 바로 미스 반 데어로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소재의 새로운 변화였습니다. 유리와 철 이라는 재료의 발견과 기술의 혁신이었습니다. 바로 커튼월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가치는 아방가르드 예술가와 건축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비전을 그려내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의 작품

그는 날 때부터 모더니스트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초기 건축물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스타일에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대쵸적인 예가 펄스 하우스와 후르비히 하우스 입니다. 미스 반 데어로에는 모던한 스타일로 그 건축물들을 지을려고 하였지만 건축주의 강력한 주장에 못이겨 전통적인 박공지붕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는 건축주의 의견도 반영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단순하면서도 비례감이 살아 있는 건축물을 만들어서 그의 개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처음으로 그를 세상에 알리게된 주요 작품은 완공된 것은 아니지만 그가 1922년 프리드리히가 오피스 빌딩 공모전에서 제안한 계획안 이었습니다. 그 건축물은 20층 규모의 빛나는 글라스 타워였습니다. 그 당시에 유리와 철이라는 소재는 생소하여 보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지금은 유리와 철이 커튼월이 보편적인 형태의 초고층 빌딩이지만 그당시에는 상당히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1927년에 독일 슈투트가르트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를 설계 하였을때도 사람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꽉차고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것이었습니다. 투명하고 현대적인 조형을 가진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새로운 주거형태 였습니다. 그 당시에 화려한 주택들에 비하면 바이센 호프 주거단지는 평지붕에 박스 건물이어서 초라해 보였을 것이지만 단순한 형태 안에서 최대한 동선을 줄이고 방을 기능적으로 배치하여 현대적인 삶의 방식을 담으려 그는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1920년대 부터 공간과 기능을 분리하여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점은 나중에 자신의 건축에서 중심 주제로 삼은 '무한정 공간'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바로 바르셀로나 파빌리온과 투겐트하트 주택, 그리고 수직타워의 안정적인 비례와 질서를 보여준 시그램 빌딩이다. 현대도시의 경관을 만들어 낸 시그램 빌딩은 많은 추종자와 반대자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건물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수 있는 전형적인 고층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중에 그의 제자들은 무수한 시그램 빌딩 복제품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복제품들은 미스 반 데어로에가 만들어낸 시그램 빌딩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바로 디테일에 있습니다. 그는 당시 법규가 허용하는 많은 면적을 포기하고 거리에서 27미터나 뒤로 물러난 곳에 빌딩을 위치시켰습니다. 그러한 결과 건물의 앞에는 많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광장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앞에 광장에 사용한 대리석을 로비 안까지 사용하여 마치 광장이 건물까지 연결된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건물전체의 통일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건물앞 광장은 마치 빽빽한 고층건물들이 들어서있는 사막한 가운데에 있는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시그램 빌딩을 모델로 삼은 건물이 있습니다만, (청계2가 사거리에 있는 삼일빌딩) 그 건물 후면부에 보기 싫게 붙어 있는 회색의 콘트리트 기둥과 차가 주차하여 숨막히는 듯한 비좁은 광장등 때문에 아쉬움을 남깁니다.

미스 반 데어로에 말년의 대표작은 베를린 신 국립미술관입니다. 디테일의 완성도 와 개념의 명료성에 초점을 둔 작품입니다. 관절염이 있었지만 병원에서도 도면을 검토할 정도로 그는 국립미술관에 큰 애정을 쏟았습니다. 그는 항상 그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베를린에 위대한 미술관을 짓는 것을 꿈꿔왔었기에 그러한 동기부여로 미술관 자체가 위대한 전시물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완성된 베를린 신 국립미술관의 포디움은 예술품을 지지하는 전시대와 같은 역할을 하며 유리로만 둘어싸인 내부는 안과 밖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지분을 떠받치는 십자 모양의 철골 기둥 8개는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 지는데, 이런 섬세한 디테일들이 모여모여 위대한 하나의 예술 작품을 이루게 됩니다.

그의 건축은 절제를 통하여 공간이라는 건축의 본질과 시대정신 그리고 그 시대의 산업재료(유리,철)로 구축한 진정성으로 건축의 의미를 드러내려 하였으며, 시대를 꿰뚫어보는 절제의 미학 미니멀리즘을 지님으로서 현대인들의 감성을 자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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