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관계론과 존재론으로 설명한다 . 관계론은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인 형식이 아니고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즉 개별적 존재의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한다. 이와 반대로 존재론은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정체성을 부여한다.

건축을 관계론과 존재론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어떨까?
건축은 관계인가 존재인가?
아니면 관계와 존재의 상호작용이 만드는 어떤 것인가?

“건축은 관계이다.”
관계적 건축은 존재의 본질을 관계성 또는 관계망으로 보기 때문에 우선 주변 상황의 속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관계적 건축이 주어진 대지에 남기는 흔적은 전체적 흐름의 일부분이 된다. 관계적 건축은 남겨진 흔적의 관계성에 집중하고 흔적 자체의 정체성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관계적 건축은 주어진 상황이 결정한다.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했느냐에 의해서 관계적 건축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오름, 여초 김응현 서예관, M 프로젝트는 ‘건축은 관계이다’ 라는 관점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들이다.

오름은 주변 상황과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철저히 관계성에 매달린 프로젝트다. 땅의 흐름을 오름이라는 관계만으로 해석하고 다른 의미를 더 이상 부여하지 않았다. 관계 외의 모든 군더더기를 빼버리려고 노력한 프로젝트이다. 여초 김응현 서예관에서는 선형의 매스가 떠있고 그 위 아래로 주변의 자연이 서로 소통하도록 시도하였다 . M 프로젝트에서는 절곡된 판의 구조로만 주변의 자연과 관계 맺기를 시도하였다.

[M 프로젝트 모형]

[S 프로젝트 스터디모형]

“건축은 존재이다.”
존재적 건축은 존재의 본질을 각 개체의 정체성으로 본다. 존재적 건축은 각 개체의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해 독특한 논리 구조를 가지며 그 결과로 독특한 형식이 나타난다.
완공작 비움 l 과 비움 ll 에서의 비움, P 채플의 반투명한 표피구조, 춘천 애니메이션 스톱모션관의 경사조경, S 프로젝트의 디지털적 이중 표피 등이 존재의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한 논리 구조의 예이다.

“건축은 관계와 존재가 만들어 내는 긴장적 에너지이다.”
100% 관계적이고 100% 존재적인 건축은 존재하지 않는다. 건축은 관계성과 존재성의 상관관계가 만드는 역학이며 긴장감이다.
건축의 성패는 긴장의 에너지로 측정된다. 아래 도표는 발표된 작품들을 관계와 존재의 측먼에서 분석해 본 것이다. ×축은 건축의 존재적 정도를, y 축은 건축의 관계적 정도를 나타낸다. ×축과 y 축의 대각선 방향의 축은 긴장적 에너지 레벨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관계와 존재는 서로 반비례의 관계이다. 가장 관계적인 것은 가장 비존재적인 것이 일반적이다. 건축은 그것이 관계적이냐 존재적이냐 보다는 높은 긴장적 에너지를 가지느냐로 평가된다. 가장 높은 긴장적 에너지는 건축이 가장 관계적이고 더불어 가장 존재적일 때에 도달된다. 그 상태를 관계적 존재라고 부른다.

관계적 존재
관계적 존재는 최고로 관계적이면서 동시에 그 관계 맺음 자체가 최고로 존재적 의미를 가지는 상태를 말한다. 모순적인 말처럼 들린다. 일반적으로 최고로 관계적이기 위해선 각 개체의 독립성이나 정체성이 최소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존재성을 각 개체의 정체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오름을 예로 들먼 기존의 지형을 따라 오르는 매스는 그 자체가 존재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그 매스와 지형과의 관계를 통하여 자연적으로 발생되는 경사마당, 누하진입 등의 요소들이 존재적 의미에 정체성을 부여한다. 관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난 존재인 것이다. 관계적 존재는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는 화두이다. 오름, 여초 김응현 서예관 등에서 시작된 실험은 P 채플, M 프로젝트, S 프로젝트 등을 통하여 결실을 맺어 갈 것이다.

거침(野)에 관하여

논어에 질승문즉야(質勝文則野) 문승질즉사(文勝質則史)라는 말이 있다. 내용(質)이 형식(文)에 비하여 튀면 거칠게(野) 되고 형식(文)이 내용(質)에 비해 튀면 사치스럽다(史)는 의미이다. 요즘 거침에 관심이 많다. 내용 즉, 설정된 논리의 전개과정이 형식을 빌려 담기지 않고 진솔하게 드러나는 것이었으면 하고 사치스럽지 않았으면 한다. 형식은 내용의 결과물이다. 결국 내용이 다르면 당연히 형식도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거칠수록 좋다.

단순화에 관하여
이번에 발표되는 완공작은 처음으로 프로세스를 반영하는 이름을 붙었다. 오름, 비움 Ⅰ, 비움 Ⅱ 가 그것이다. 이전에 발표된 작품들에게도 프로세스를 반영하는 적당한 이름을 붙이려고 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할말이 너무 많았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이번에 완공된 세 작품은 붙여진 이름을 지키기(?) 위해 프로세스를 극도로 단순화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요사이 간디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진보란 단순화이다.”

출처-임재용 (건축사사무소 O.C.A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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