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칸


1974년 3월 17일 뉴욕 펜실베이니아 역 화장실에서 한 노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여원에서 주소가 지워졌기 때문에 신원을 확인하는 데만 무려 3일이나 걸린 이 노인이 바로 인도에서 돌아오던 세계적인 건축가 루이스 칸(1901-1974)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근, 여전히 칸의 건축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의 건축이 보여주는 견고함, 안정성, 세월의 깊이, 공간의 무게, 그리고 지속적인 감동 때문은 아닐까요? 당시의 건축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 칸 건축물의 중요성은 아마도 그것이 과거의 건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일것입니다. 사실 그의 건축에서는 현대 건축이 보여주는 재치, 발랄함, 경쾌함 및 형태의 자유분방함을 찾아볼 수 는 없습니다. 그의 건축은 마치 장중함과 여유를 보여주는 고전 음악과도 유사합니다. 굳건하고 감동적이기까지 한 칸의 건축은 시간과 유행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이 시대 건축의 고전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는 칸 고유의 건축 이론과 실천 체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칸의 독특한 사고 체계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칸 특유의 사고 체계와 언어사용은 칸에 대한 신비감을 가져다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칸을 이해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는 칸이 한 말을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차분히 숨을 가다듬고 칸의 건축과 그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 그의 말 속에 숨은 진정한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칸의 생애와 작품을 훑어 내려가면서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데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마치 그가 건축의 본질을 향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졌듯이 말입니다. 


칸이라는 건축가

칸의 직업을 이해하는 첫걸음

160센티미터가 간신히 넘는 왜소한 체구, 화상 때문에 흉터가 난 얼굴, 보잘것 없는 배경을 가진 가난한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 끝없이 열심히 작업했지만 파산에 몰리고 만 건축가 루이스 칸. 그런데 그의 사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왜 우리는 이 건축가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밖에 없는가? 건축가 루이스 칸의 삶은 극적이었습니다. 그는 불우했던 어린시절, 사고로 인한 화상의 기억, 그리고 평탄치 않았던 사생활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칸은 5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렸습니다. 부단히도 자신만의 건축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칸은 그동안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건축가로 알려져 왔습니다. 사실 건축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칸에 대해서는 쉽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칸의 생각과 건축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반증입니다. 그의 말이나 글은 직접적이지 않고 은유적이어서 마치 어느 경지에 다다른 철학자와 같이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그의 일생과 사유 과정 그리고 건축에 반영된 그의 사고를 찬찬히 살펴보면 칸의 작업을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압니다. 일견 난해하고 철학적으로 보이는 그의 사고체계는 사실 건축의 본질을 향한 그의 노력과 자신의 생각을 건축에 그대로 표현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따라서 칸 건축의 이해를 돕는 실마리는 바로 칸 자신의 일생에 걸친 생각과 그것을 표현하는 건물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술의 경지에 오른 대가의 숨결을 찾아서

칸의 활동 기간은 시기상으로는 근대 건축의 흥망성쇠와 거의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지만 내용적 측면에서는 완전히 다른면을 보여줍니다. 사실 건축은 타 예술 분야에 비해 현실의 상황과 조건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건축가의 개념을 실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칸은 빛과 공간을 통해 자신의 건축을 예술의 경지까지 승화시켰습니다. 근현대 건축을 통해 수많은 건축가들이 등장했지만 이른바 스승의 반열에 오른 건축가는 그다지 많지 않은듯 합니다. 이를 테면 르 코르뷔지에나 미스 반 데어 로에 등의 거장을 예로 들 수 있지만 시대를 초월한다는 측면에서는 칸을 첫 번째로 친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그만큼 칸의 건축은 시간과 지역의 차이를 넘어선 건축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즉 루이스 칸만큼 근대 건축의 역사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건축가는 많지 않았습니다. 

칸의 가계와 영향

칸은 1901년 2월 20일 제정 러시아의 에스토니아 지방에서 에스토니아계 유대인이었던 가난한 공예가인 아버지 레오폴드 칸과 라트비아계 유대인으로서 하프주자였던 어머니 베르사 멘델손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칸의 아버지 레오폴드 칸은 1904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1906년에 가족 전체를 미국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칸의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한 것은 당시 러시아에서 진행되었던 유대인 박해와 1905년에 발생한 유대인 대학살과 관련이 있습니다. 칸의 가족은 이런 시대적 혼란속에서 아버지를 따라 필라델피아의 빈민가에 정착하게 됩니다.

어린시절

칸은 아직 미국으로 오기 전이었던 3살 즈음 자신의 집에서 큰 화상을 입습니다. 아른다워 보이는 불꽃을 잡으려다 화로의 불이 옷에 옮겨 붙으면서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공예 기술자였지만 레오폴드는 실제로 고정적인 직업을 갖지 못했고 대신 어머니인 베르사가 재봉사로서 전체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칸은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과 내성적 성격 때문에 순탄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더욱이 사고로 입은 얼굴과 손의 화상 때문에 주위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되었고, 이는 칸을 좀 더 깊은 자의식의 세계로 빠지게 했습니다. 흉터가 있는 흉한 외모에다, 백인 사회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은 칸을 어렸을 때부터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미술과 음악에서 나타난 칸의 예술적 재능이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극복하는 계기가 됩니다. 펜실베이니아 시 주최 미술 대회에서 수상할 정도로 실력이 있었던 칸은 시가 운영하는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능력을 쌓아 나갔고 고등학생 사생 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의 실력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칸의 미술적 재능은 이후 그의 스케치 등을 통해 잘 나타납니다.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 분야에서도 재능이 있었던 칸은 이미 10대 시절에 무성영화관에서 오르간 연주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대학시절

칸은 비록 가난하고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1920년 가을, 이른바 아이비리그로 불리는 미국 동부 명문 대학중의 하나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여 건축 공부를 시작합니다. 칸이 대학교육을 받던 1920년대는 유럽에서 근대 건축 운동이 태동기를 지나 막 발전하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19세기 말 유럽 건축을 이끌었던 절충주의나 신고전주의 양식이 완전히 힘을 잃은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문화의 중심지인 유럽에 비하여 마치 변방과도 같았던 미국에서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같은 일부 건축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메리칸 보자르 양식이라 불리는 신고전주의 양식에 매몰되었습니다. 근대 건축 운동의 중심지인 유럽에서도 1919년 바우하우스가 개교하여 근대적 교육을 시작할 때까지 신고전주의 양식에 근거한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미국 건축 대학이 모두 그러했듯이 펜실베이니아 대학이 보자르식 교육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학에서 칸은 이후 자신의 건축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 스승 폴 크레를 만납니다. 프랑스인으로서 에콜 데 보자르 출신인 크레는 근대 건축의 원리가 아니라 신고전주의 양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당시에는 유럽의 건축이 향후 세계 건축을 주도할 근대 건축으로 나아가고 있던 반면, 미국의 건축교육은 여전히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컨이 받은 건축교육은 전형적인 에콜 데 보자르 식 교육으로서 정형화된 방법과 과정을 통한 설계 방법론과 비례, 대칭등 고전 건축의 원리를 중시했습니다. 따라서 칸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서 비로서 근대 건추축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대학 시절의 교육 내용을 의도적으로 외면할 정도로 근대 건축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특히 근대 건축의 특징 중 하나인 사회에 대한 건축의 역할 에 큰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그렇지만 애써 외면하였던 보자르 식 설계 방법은 아이러니 하게도 이후 칸이 자신만의 건축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스승이었던 크레는 건축의 전체 역사를 통하여 불변하는 건축의 본질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자연스럽게 고대 기념비적 건축물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이러한 점에서 건축의 본질 그리고 기념비적 건축의 가치에 대한 칸의 생각은 그의 대학 시절 스승인 크레의 생각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겠다. 대학 시절 칸의 학업 성적은 우수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최고는 아니었으며, 설계역시 좋은 성적을 받기는 했으나 자신의 동기 중 최우수 학생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사무소 시절, 대공황 그리고 전쟁

1924년에 대학을 졸업한 칸은 여러 사무소에서 실무 수련을 쌓습니다. 이때 그가 맡은 주된 역할은 제도사로서 도면을 그리는 작업이었다. 3년간의 수련 기간을 통해 모은 돈으로 칸은 당시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대 건축의 흐름을 접하기는 하였지만 주로 그리스나 이탈리아 같은 고전 건추겡 대한 답사가 중심이었습니다. 당시 칸의 스케치는 방문했던 여행지의 건물이 무엇이었는지 잘 보여 줍니다. 물론 독일과 같이 당시 근대 건축이 활발했던 곳을 방문했고, 르 코르 뷔지에의 사무실에서 일하던 대학 동기 노만 라이스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적어도 이 시기까지 칸은 근대 건추그이 영향력에 대해서 크게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유럽여행 이후 칸의 사무소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미 1920년대 중반부터 불경기 조짐을 보였던 미국 경제는 1920년대 말 본격적으로 대공황에 들어섭니다. 유럽여행을 마친 1929년, 칸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폴 크레의 사무소에 취직하였으나 이곳 역시 사저잉 어려워 입사 1년 4개월 만에 1930년 자진 퇴사하였고, 그 이후로는 퇴사 한달전 결혼한 아내 처가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후 수년간 취업과 실업을 번갈아 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칸은 비슷한 처지의 젋은 건축가 30여 명과 건축연구회를 결성하여 공부와 연구를 병행하였습니다. 이곳의활동을 주도하면서 칸은 근대 건축운동을 수용하게 되었고 이를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였습니다. 때 마침 루스벨트 대통령이 공황 타개책으로 주도한 공공 주거 프로젝트가 필라델피아 싱에서도 시작되었고, 칸은 정부의 공공 건축가 고용 프로그램에 따라 몇 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할수 있었습니다. 특히 1937년에는 미 연방 주택청이 신설되어 주도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건축가로서의 명성을 얻는다. 그러다 미국이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칸은 제한 종류의 프로젝트만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칸은 1940년대에 미국 계획가 및 건축가 협회의 창설을 주도하였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도시계획 관련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칸이 수행한 주거 프로젝트는 대부분 파트너인 스토노로프에 의해 수주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몇 가지 사건이 불거져 불화가 발생하자 1947년 스토노로프와 결별하고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 독립이 계기가 되어 칸의 작업에서 대규모 주거 프로제트는 사라졌고 대신 단독주택 프로젝트만 남아 있었습니다. 칸은 이 기간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 더 중요하게는 1940년대 중방에서 1950년대 초 까지 작업과 삶 양 측면모두에서 칸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앤 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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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년 비엔나(Vienna)의 교외 펜징(Penzing)에서 출생.
1857년 빈 공과대학(Vienna University of Technology) 입학.
1860년 베를린 왕립건축학교(Berlin Bauakademie) 입학.
1861~1863년 빈 조형예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 Vienna)의 건축과에서 수학.
1863년 독립하여 건축가로서 활동 개시. 요제피네 돔하르트(Josefine Domhart)와 결혼.
1873년 테오필 한센(Theophil Hansen)과의 협동 작업으로 ‘그라벤호프(Grabenhof)’ 설계.
1880년 요제피네와 이혼. 어머니(Susanne Wagner) 사망.
1886~1888년 자신의 주택 ‘바그너 빌라(Villa WagnerⅠ)’ 건축.
1888~1889년 ‘링케 빈차일레(Linke Wienzeile) 아파트’ 건축.
1890년 비엔나 신도시 계획에 대한 의뢰를 받아 만든 작품으로 명성을 얻음.
1894~1897년 비엔나 시내 전차와 도시 철도망 작업(Viennese Stadtbahn, metropolitan railway system). 빈 조형예술 아카데미 건축학과 교수로 임용.
1894~1898년 요셉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가 그의 조수로 일함. 카를 광장 역사(Karlsplatz Stadtbahn Station) 건축.
1896년 『근대 건축 Moderne Architektur(Modern Architecture)』선언서 출간.
1898~1899년 마조리카 하우스(Majolika Haus) 건축.
1899년 ‘빈 황실 역사’ 건축. 빈 분리파 운동(Wiener Sezession)에 합류. 비엔나 제체시온 홀(Sezessionhaus/Secession Building)에서 첫 번째 제체시온 전시회를 가짐.
1902년 ‘<디 차이트>지(誌) 배달 사무실’ 건축.
1904~1906년 ‘비엔나 우체국 저축은행(Postalparkasse)’ 건축.
1905년 클림트(Gustav Klimt), 호프만(Joseph Hoffmann) 등 그 밖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분리파 운동에서 탈퇴.
1905~1907년 ‘스타인호프 교회(Kirche am Steinhof)’ 건축.
1906~1907년 비엔나 ‘슈첸 하우스(Schutzenhaus)’ 건축.
1909~1913년 비엔나 ‘베르크가 쇼룸’, ‘노이에스티프트 거리의 스튜디오’ 등 건축.
1910~1913년 결핵 환자를 위한 ‘요양원’ 건축.
1912-1913년 바그너 빌라Ⅱ(Villa Wagner II) 건축.
1918년 4월 11일 비엔나(Vienna)에서 작고.

- 아르누보 건축(Art Nouveau architecture)의 대가 ‘오토 바그너’ -
오토 바그너는 1841년 7월 13일 비엔나(Vienna)의 교외 펜징(Penzing)에서 태어났다. 부유 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5살에 아버지(Notary R. Wagner)를 여의고, 홀어머니(Susanne Wagner)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자녀교육에 대단히 열성적이서 바그너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졸업하기 2년 전부터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특별히 개별지도를 받도록 할 정도였다.
바그너는 1857년에 빈 공과대학(Vienna University of Technology)에 입학해 수학했다.
바그너가 빈 공과대학에 입학한 1857년도는 오스트리아 황제가 성벽 철거를 명령했던 해로, 비엔나에서 건축의 붐이 일기 시작한 해였다. 당시 무기 제조술의 발달로 인하여 도시 성벽의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바그너는 다시 1860년에 당시 문화의 중심지인 베를린으로 가서 왕립건축학교(Berlin Bauakademie)에서 공부하였다. 이 대학은 독일 고전주의 건축의 거장인 쉰켈(Schinkel:1781-1841)이 직접 강의하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바그너는 이곳에서 고전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의 초기 작품에서 이러한 고전주의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바그너는 왕립 건축학교에서의 수학 후에 비엔나로 돌아와 1861년에 빈 조형예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 Vienna)에 입학하여 비엔나 오페라 하우스(Vienna Opera House, 1861-69)를 디자인한 지카르스부르그(August von Sicardsburg) 교수와 뉠(Eduard van der Null) 교수 밑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당시에 비엔나에서는 온통 온 도시가 공사장처럼 건설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황제의 명령으로 성벽을 철거한 자리에 비엔나를 둘러싼 환상도로 링스트라세(Ringstrasse) 건설 공사가 1861년부터 5년간 계속되었고, 도로변에는 새로운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에 바그너는 푀스트(Ludwig Von Forster) 스튜디오에 합류하여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때부터 전 유럽 대륙에서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유럽을 지배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Habsburg家)는 독일 프로이센(Preussen)을 지배하고 있던 빌헬름 1세(Wilhelm I)의 ‘통일 독일’의 정책에 밀리고 있었다.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를 수상으로 내세워 강력한 통일정책을 추진했고 철혈(鐵血)정책의 일환으로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여 3번의 전쟁을 통해서 그 목적을 이루었다.
바그너는 이런 전쟁의 와중인 1868년 큰 충격을 받게 된다. 하나는 그의 은사인 뉠 교수의 자살이었고, 또 하나는 지카르스브르그 교수의 죽음이었다. 그것도 오페라하우스가 완성된 후의 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다.
비록 오스트리아 전쟁에는 패배했지만, 유럽 국가 간에 평화가 찾아오고 비엔나에서 건설 붐이 일어남에 따라 바그너는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55세가 되는 1894년 바그너는 자신의 모교인 빈 조형예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 Vienna)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전기(轉機)를 맞게 된다.
첫째로 바그너는 대학교수로 부임한 지 얼마가 지나지 않아『근대 건축 Moderne Architektur(Modern Architecture)』을 처음으로 출판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예술의 유일한 지배자는 필요다’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작품 경향도 서서히 변해갔고, 이것이 앞으로 작품 활동에 있어서 목표가 되었다.
둘째는 그가 대학교수로 재임함으로 인하여 제자와 조수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과는 단순한 제자와 조수가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동지로서의 끈끈한 관계를 맺게 되고 소위 ‘비엔나 학파(Vienna school)’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왜 우리들은 항상 다른 시대의 양식을 좇아서 건축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왜 우리들 시대에 맞는 우리들의 양식을 발견하려고 하지 않는가”라고 한 쉰켈(Karl Friedrich Schinkel)의 말처럼 기존의 관념적 전통에 반항하고 저항하여 새로움에 도전하는 일군(一群)의 무리를 형성하게 된다.
이 그룹들이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요셉 올브리히(Joseph Olblich), 아돌프 로스(Adolf loos), 요셉 호프만(Joseph Hoffmann)들이다. 이들은 대학에 반기를 들고, 분리파 운동, 즉 ‘제체시온(Sezession) 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바그너도 이 운동의 정식 멤버가 되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 경향은 초기의 역사주의 양식인 고전주의, 신 르네상스 양식에서 벗어나 간결한 양식으로 바뀌어져 갔고, 건축 재료의 선택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콘크리트에 철근을 집어넣는 것은 사실 1830년대부터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조셉 모니에가 최초로 개발하여 특허를 받은 때는 1850년대였다. 벨기에인 에느빅과 미국의 랜섬은 이 시공방법을 건축시공에 적용한 대표적인 엔지니어이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은 이러한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1904년에 마틴 하우스(D. D. Martin House)와 라킨 빌딩(Larkin Building)에서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구조를 바닥판과 보에 사용하였고, 바그너도 1906년 비엔나 우체국 건물(Postalparkasse, 1904-06)에 처음으로 콘크리트 바닥판을 사용하였다.
셋째, 바그너는 아카데미에 교수로 취임한 후 바로 2가지의 큰 프로젝트를 위촉받았다.
하나는 비엔나시의 40㎞에 지하철을 위한 36개의 지하철 역사, 플랫폼과 계단을 설계하는 것(Viennese Stadtbahn, metropolitan railway system, 1894-1902)이고, 다른 하나는 도나우 강 운하(Danube Canal)를 위한 갑문 시설(Schutzenhaus, 1906-07)의 설계였다.
특히 쉔브룬(Schonbrun)궁 앞 호프파빌리온(Hofpavillion, 1894-98)카를 광장 역사(Karlsplatz Stadtbahn Station, 1894-98)는 가장 유명한 것으로 전자는 황제를 위하여 특별히 설계된 것이며, 후자는 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폐허로 남아있던 것을 1977년에 말끔히 보수하여 현재는 박물관과 카페로 사용하고 있다.

바그너는 해가 거듭할수록 작품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는데, 첫 번째가 일명 마조리카 하우스(Majolika Haus, 1898-99)라고 불리우는 빈차일레(Wienzeile) 거리에 세워진 아파트다. 이 건물은 전형적인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으로 건물 외벽에 아름다운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두 번째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비엔나 우체국(Postalparkasse, 1904-06) 건물이다. 이것은 현상설계에 의하여 당선된 것으로 바그너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기록될 만큼 근대적이고 신성한 것이었다.
세 번째는 성 레오폴드 교회(Church of St. Leopold, 1903-07)이다. 이것은 스타인호프(Steinhof) 요양소 내에 지어졌기 때문에 일명 스타인호프 교회(Kirche am Steinhof)라고도 불리어지는데, 정신병자 요양소 내의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지어졌다.
바그너는 71세에 교수직에서 은퇴한 후 바그너 빌라Ⅱ(Villa Wagner II, 1912-13)를 설계하게 된다.
그리고 3번에 걸쳐 작품집을 발간하였다. 마지막 작품집을 발간한 해인 1914년 그 동안 유지되어 오던 평화는 깨지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구라파는 다시 혼란과 파괴가 뒤따르게 되었다.
바그너는 전쟁의 와중에서 종전을 보지 못한 채 1918년 4월 11일 향년 71세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바그너가 눈을 감기 두 달 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가 1918년 2월 6일 사망하였고, 같은 해 10월 18일에 콜로만 모제르(Koloman Moser), 10월 31일 에곤 쉴러(Egon Schiele)가 차례로 사망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재능 있는 예술가들은 바그너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차례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남겨놓은 아름다운 발자취만을 돌아볼 수 있을 뿐이다.

- 현대 건축의 선구자 ‘오토 바그너’ -
오토 바그너는 선구적 건축가일 뿐만 아니라, 교육자였으며 빈 지식사회의 리더이자 비엔나 현대화 계획의 주역이었다.
1894년 바그너가 당시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 없던 비엔나 조형예술 아카데미 교수가 되면서 쓴『근대 건축 Moderne Architektur(Modern Architecture)』이라는 책은 수개국어로 번역되면서 신건축운동의 교과서가 되었다.
바그너는 “예술가는 대중이 즐기는 것보다 대중이 즐기고 싶어 하는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괴테의 말에 동의하면서, 문외한일 수밖에 없는 국가의 역할을 질타하고, “예술 창작에 대한 우리의 출발점은 근대 생활 속에서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건축가로서 세계적 걸작을 연이어 발표하고 비엔나 교외를 둘러싸고 있는 고가철도와 지하철도망 노선상의 정차장을 포함한 모든 부분을 설계했다.

백년 전 비엔나는 세계 문명의 중심에 선 도시의 하나였다. 문명 중심의 도시에서는 모든 분야의 지식인들이 집합하고 교감한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Ludwig Josef Johann), 프로이트(Freud, Sigmund), 구스타프 말러(Mahler, Gustav) 등 현대 문명 개화기의 천재들이 비엔나에서 동시대에 활동하고 있었다.
비엔나의 지식인 사회는 19세기 말 문명의 지적 실리콘밸리 같은 곳이었다. 그 중심에 바그너가 있었다. 상류사회에서 성장한 바그너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 안주하기보다 신(新)문명의 전사로서 새로운 건축의 도래를 위한 선구자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현대 문명이 인류의 새로운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현대 건축과 도시 계획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옛 문명의 위대한 성과를 잊지 않았다. 과거의 위대함을 되살리고 과거의 모순을 초극하는 새로운 건축과 도시에 대한 그의 열정이 건축가로서 도시 계획가로서 교육자로서 저술가로서 그의 일생을 이끌어간 힘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은 피렌체(Firenze) 르네상스 형식의 아파트블록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는 오랫동안 기득권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 그가 기득권을 포기하고 비엔나의 개혁을 주장했다.
그가 명성을 크게 떨친 것은 1890년 비엔나의 신도시 계획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그가 꿈꾸던 링스트라세(Ringstrasse)를 중심으로 한 위대한 비엔나 건설의 청사진은 실현되지 않았고 그 계획의 일부인 도시철도 네트워크만 실현되었다.
이때의 철도 관련 프로젝트 중 건축사에 영원히 남은 유명한 프로젝트가 카를 광장 역사(Karlsplatz Stadtbahn Station, 1894-98)이다.
이 건물은 현대 건축의 공법과 기능 형식을 갖추었으나 제체시온(Sezession: 분리파) 스타일의 장식적 모티브가 함께한 절충적 현대 건축으로,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건축이었다.

그의 건축적 삶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사건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의 자리에 오른 그가 젊은 건축가인 요셉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나 요셉 호프만(Joseph Hoffmann)에 자극받아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 일이다. 그때 그는 “건축가는 오십부터 시작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때 만든 링케 빈차일레(Linke Wienzeile)의 아파트(1888-89)는 고전형식에 매어 있던 그의 초기 작품과 다른 창조적 진화를 보인 작품이다.
바로 이어 도시의 삼각형 대지에 세운 비엔나 우체국 저축은행(Postalparkasse, 1904-06) 건물은 그의 이름을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만든다.
빈 우체국 저축은행은 1904년에 시작해 1906년에 완성된 가장 완숙한 바그너의 걸작이다. 이 건물은 건축의 모든 부분이 그의 의도대로 디자인된 20세기 건축의 최고 걸작 중 하나다.
빈 우체국 저축은행이 문을 열었을 때 당시 빈 사람들이 “드디어 빈은 현대 건축의 위대한 걸작을 갖게 되었다”라고 하던 그 말이 백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한 울림을 갖는다.

바그너는 20세기 현대 건축의 문을 연 선구자이면서 동시대 지식인들의 리더였으며, 현대 문명을 맞은 역사 도시 빈의 성공적 현대 도시화의 마스터플랜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빈을 누구보다 깊이 알고, 누구보다 더한 열정을 가지고서 이 도시가 가진 과거의 영광과 미래의 비전을 자신의 건축 작품과 도시 계획안을 통해 보여준 위대한 빈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료와 후배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면서, 또한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열린 사람이었다.
20세기의 빈을 바그너 없이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는 빈의 건축가로서, 도시 계획가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위대한 인간이었다.
세계적 건축가는 그가 속한 도시의 역사와 지리와 사회의 소명을 자신의 사명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바그너는 그의 생애를 통해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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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에스파냐(Espana) 남부 카탈루냐(Catalunya)에서 출생.
1863년 레우스 중등학교 입학.
1867년 어린이 잡지 El Arteguia 디자인.
1869년 바르셀로나 대학의 건축학과 예비과정 입학.
1871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 입학.
1872년 물탱크와 공동묘지 정문에 관한 학생프로젝트 참여.
1876년 시청사 직원과 레알 부두 건축 참가. 바르셀로나 종합병원, 대학강당 건축에 학부시절 마지막으로 참여. 건축사로 첫발을 내디딤. 모친사망.
1878년 건축사 자격 취득.
1879년 시인 비센떼 가르시아(Vicente garcia)에 기마대 디자인을 바침. 누이 사망. 조카 로시따 에헤야 입양.
1800년 호셉 세라 말레라 알레나와 함께 바르셀로나 해안도로 가로등 합작 프로젝트 추진.
1881년 그의 유일한 기고문을 La Renaixensa에 기고.
1882년 공업기술자인 Juan Martorell Montellas와 공동작업.
1883년 성가족 성당의 작품 방향 설정. 후안 마누엘 비센스 문따네르 저택 건설(1883-1888). 산딴데스 까미야스의 엘 카프리쵸 저택 건립.
1885년 성가족 성당 첫 프로젝트.
1886년 구엘 궁전, 북 람블라스 거리(1886-1888).
1887년 칼벳 저택(1898-1899).
1899년 베예스구아드트 탑 건립. 구엘공원 건설(1900-1914).
1904년 그라네르 살라 메르세 저택. 호세 바뜨요 저택(1904-1906).
1905년 아르띠가스 정원.
1906년 밀라 저택(1906-1911). 구엘공원 내의 저택 입주.
1907년 Jaime L. 하이메 기념비.
1910년 파리의 Grand paris에서 전시회 개최.
1911년 열병을 앓음.
1925년 성가족 성당 종각 완성.
1926년 6월 7일 Sagrada Familia 성당 앞에서 전차 사고. 6월 10일 산따 쿠르즈(Santa Cruzu) 병원에서 사망.
-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
본명이 안토니 가우디 이 코르네트(Antoni Gaud i Cornet)인 그는 정열의 나라 스페인이 낳은 20세기 최고의 건축가이다.
가우디는 1852년 6월 25일 에스파냐(Espana) 남부 카탈루냐(Catalunya)의 레우스(Reus)에서 구리세공업을 하는 부친 프란시스코 가우디 세라(Francisco Gaudi Serra)와 안또니아 꼬르넷 베르뜨란(Antonia Cornet Bertran)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가깝게 놀이하며 지낼만한 친구도 없었으며, 마땅한 놀이기구도 없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연스럽게 모든 자연이 친구이자 놀이기구가 되었다. 가우디의 생가는 도시에서 좀 떨어진 시골이었다. 그곳은 지중해 연안으로 자연환경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우며 경이롭기까지 한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자연과 벗이 되었으며 자연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그가 자연에 대해 놀라우리만큼 뛰어난 관찰력을 갖게 된 것은 이때 형성된 것이다. 그는 자연의 모든 것을 존중하며 이해했다. 하늘과 구름, 물과 바람, 나무와 식물, 동물과 곤충, 산과 바위 등 여러 가지를 보며 이를 통해서 건축언어에 접목해 갔다. 특히 가우디는 몬세랏(Montserrat)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며 그 산을 매우 좋아했다.
또한 가우디는 레우스 지방에서 대장간을 운영하는 삼촌에게로 가서 대장간 일을 어린시절에 배웠다. 여기서 가우디는 철을 불에 넣고 꺼내 망치로 두들겨서 철을 단련시키는 단철과정은 물론이거니와 주조술과 석고로 본을 뜨는 방법까지 배우게 된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 있는 에우달도 푼트(Eudaldo Punt)에서 건축설계와 시공에 관한 실무적인 일들을 수확한다. 그는 이곳에서 건축자재의 특성들도 함께 배웠으며 이것이 후에 가우디가 맡은 일들을 수행하는데 있어 필요한 목수, 주철공 등 건축 관련 인부들과의 관계설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가우디는 한번 인연을 맺은 기술자들과는 끝까지 함께 일을 했으며, 그들이 나이가 들어 일을 못할 시에는 그 자제(도제제도에 의한 전수자)들과 일을 함께 했다. 따라서 모든 작업을 하는데 그들도 가우디의 감각과 뜻을 이해했고, 가우디는 작업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가 있었다. 지금으로 보면 거래선을 한번도 바꾼 적이 없었던 것이다.

가우디는 17세 때부터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바르셀로나의 건축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학창시절에 비라르와 폰트스레 등의 조수로서 설계활동에 종사하였다.
1878년 학교 졸업 후부터는 독자적으로 일을 시작,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많은 독창적인 건축을 남겼다. 밀가루 반죽으로 빚어 놓은 듯 구불구불한 6층 아파트 '카사 밀라', 기묘하고 아름다운 창문장식이 보는 이를 매혹시키는 '카사 바트요', 환상적인 돌조각과 타일장식이 공원 전체를 구불구불 덮고 있는 '구엘 공원' 등의 걸작을 남겼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남긴 대표작 중의 대표작은 신이 머물 지상의 유일한 공간이라 말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聖가족) 교회'이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네 개의 탑과 생동감 넘치는 우아한 조각으로 장식된 이 교회는 착공한 지 115년이 지났고 완성되려면 앞으로도 200년이 더 걸린다고 한다.

세상이 가우디를 처음 주목하게 된 것은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가우디가 출품한 독특한 디자인의 진열장이 사람들 눈을 사로잡으면서 부터였다. 그의 천재성을 일찌감치 발견한 에우세비 구엘은 최대의 스폰서가 된다.
가우디는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피카소보다 더 영웅으로 추앙하는 인물이지만, 생전의 그는 국가에 헌신적인 타입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들어 도시에 구현한 건축가이고 예술가였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다.
1883년 31살 때 그 유명한 성가족(Sagrada Familia) 성당 공사의 총감독에 취임하게 된다. 이후, 생의 만년에 기독교도로 살면서 성당에서 먹고 자며 일에 빠져 살았다. 가끔 시내로 나갈 때면 그의 부랑자 같은 행색 때문에 행인들이 푼돈을 적선해 줬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죽음도 비범했다. 1926년 6월 10일 그의 일터인 성가족 성당 바로 앞길에서 전차에 받혀 생을 마감했다. 느리디 느린 전차에 받힌 그의 마지막 순간은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며 길을 걷는 노대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사고 현장엔 <가우디 등>이 지금도 불을 밝히고 있다. 죽은 뒤 가우디를 다룬 스페인 영화가 6편 나왔으며, 그를 다룬 언론보도가 3,000여 회가 넘는다.

- 자연을 사랑한 건축가 ‘가우디’ -
가우디를 이해하려면 건축분야에만 국한하여 평가해서는 안된다. 즉, 건축사가들은 건축사에 입각하여 다른 건축물과 그의 건축물을 동시대적 관점에서 일직선상으로 동일시하며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어느 스승에게 사사 받은 일도 없고, 특정집단에서 일을 한 적도 없으며, 가족 중에 누구도 건축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작품은 어느 시대의 건축양식 및 특정분야로 분류하는 데는 난해한 부분이 많다. 그의 작품은 그 시대의 양식과 형식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무런 편견 없이 사물을 관찰하고 이를 작품화하는 능력을 그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소박했다. 그러나 대단히 명석했다. 가우디와 수년간 작업을 함께한 화가 후안 무네(Juan Munn)의 말에 의하면 "가우디는 확고하고 명석한 생각의 소유자"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가우디의 작품을 살펴보면 선은 곧은 것이 없으며, 입면은 들쑥날쑥 하고, 바로크양식으로 보이는 외관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으나 불합리한 점이 더 많다. 이로 인해 그의 정신상태가 좀 괴팍한 면과 마음이 뒤틀려 있지 않았나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판단이다. 이 시대의 건축가는 논리성을 갖는 미학과 추상화적인 과정을 거쳐 설계를 하며, 보조적인 수단으로 자와 콤파스를 사용했다. 건축자재를 자르거나 형태를 만들 때에도 이를 활용하여 2차원의 평면과 직선, 원과 다면체에서 5각형의 12면체인 3차원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가우디의 작품은 기하학적인 형태에 얽매이기 보다는 자연적이며, 변형이 많고, 쉽게 인지되지 않는 곡선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플라톤이 주장하고 이론화 한 제5의 원과 같은 형태로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가우디의 작품은 이론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형태이다. 이는 처음부터 기하학을 사용했다면 아주 단순한 기하학을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통제기하학(regulated geometry)을 응용하여 많은 부분 사용하였다. 가우디의 작품을 여러 건축가가 응용하여 모방하려고 했으나, 가우디의 작품과 같은 건축물이 완공된 것이 지금까지 없는 것으로 보아, 그가 설계한 건축물들은 가우디의 상상력이 어떠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가우디는 말한다. "건축가는 균형에 대한 타고 난 감각이 있어야 한다. 건축가는 건물의 형태를 디자인하고, 그것을 구조전문가(구조기술사)에게 구조에 대한 수학적 안전성을 검토 받는다. 그 후 구조전문가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건축가로서의 자질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전문가가 이상이 있다고 한다면 건축에서 손을 떼는 것이 현명하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자신에 대하여 엄격한 면이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la, 성가족 성당)의 종루는 포물선이면서 젖은 모래를 떨어뜨릴 때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를 시행할 때 가우디는 '중력의 법칙'을 엄격히 따랐다. 가우디는 설계도보다는 모형을 중요시 했다. 그 모형을 만들기 전 그는 실을 천장에 매달고 탑부분과 전체적인 모습을 모래 주머니 혹은 납을 중간 중간에 매달아 그 휨의 강도를 측정해 나갔다. 그리고 최상의 곡선과 아름다움이 나오면 이를 스케치했다. 여러 번에 걸친 반복 스케치와 모형작업을 했다. 그런 다음 건물의 형태와 구조를 결정하였다. 이렇게 한 건축구조형태에 대해 가우디는 자기 자신 스스로가 구조 계산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현대의 첨단 장비를 동원한 구조계산에서도 오류가 발견된 것은 없다. 그가 말하는 것은 완벽한 균형감각이다. 가우디의 건축형태는 그 누구도 상상도 못할 상황에서 만들어 졌으며, 가히 독창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그가 말했듯이 "자연에서 태어나고 자연이 베풀어 주는 매우 균형적인 자연적 구조"인 것이다.

가우디는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나 큰 동물에서는 얻은 것은 별로 없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용의 형상이 있으나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상에서 나왔다. 그는 아주 조그마한 곤충(파리, 모기, 들벌레 따위)과 들에 많이 나는 잡초와 나무, 잎 등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또한 동양의 미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형태를 표현해 나갔다. 가우디의 건물구성을 보면 동물의 뼈, 야자수, 곤충, 사람의 해골 등의 모습이 자주 사용됐다. 그는 나무의 줄기와 해골만큼 아름답고 완벽한 구조는 없다고 할 정도였다. 아무리 아름다운 돔이라고 할지라도 해골의 내부에 비할 수 없으며, 산이 가지고 있는 완벽한 안정성에 어떠한 건물도 따라 갈 수 없다고 가우디는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건축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가능성을 추구한다면 미를 잃게 될 것이다. 또한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면 미학, 예술 이론 또는 철학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렇게 추상적인 이론들은 나에게는 사치이며 관심도 없는 분야이다."
가우디는 일찍이 바그너가 주창했던 종합예술론과 '자연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괴테의 자연론에 영향을 받아, 스페인 고유의 고딕 양식과 이슬람 양식(무데하르 Mudejar) 양식을 재창조하여 대담하고 환상적인 건축양식을 완성했다. 피카소, 미로, 카잘스 등 동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들도 바르셀로나 곳곳에 있는 가우디의 건축물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가우디는 건축을 자연의 여러 가지 형상을 기초로 하여 구조·형태·기능·상징의 종합으로서 제시한 위대한 건축가였다. 전형적인 그의 건축은 모든 면에서 곡선이 지배적이며, 벽과 천장이 굴곡을 이루고 섬세한 장식과 색채가 넘쳐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따라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에 걸쳐 유럽을 풍미하였던 아르누보(art nouveau)의 에스파냐판(版)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1890년대를 경계로 하여 2기로 나눌 수가 있다.
전반기의 작품은 건축 그 자체의 몸체는 비교적 중후하며 극단적인 변형은 보이지 않으나 세부의 장식에는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특히 철을 사용한 곡선적인 장식은 피레네 북쪽의 아르누보의 장식과 대응관계에 있다.
그러나 가우디의 진가는 어디까지나 후반기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그의 건축장식에서 보였던 미로(迷路)와 같은 구불구불한 공간(空間)의 이미지가 전체의 건축디자인으로 확장되어, 계획부터 구조의 형태 및 세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디자인을 지배하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에는 코로니아 구엘교회의 제실(祭室:1898∼1914), 구엘공원(1900∼1914)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그의 중요한 후원자였던 구엘백작을 위한 것이었다.
주택건축으로 독특한 형태와 내부공간을 지닌 카사 바트요(1907년 완성)와 카사 밀라(1907년 완성), 1884년에 착수하여 결국 필생의 대작이 된 사그라다 파밀리아교회의 익랑(翼廊)의 정면(正面, 1908년 완성) 및 탑·조각(1903∼1926) 등은 가우디 건축의 가장 극적인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그의 건축은 아르누보의 유행을 초월하여 근대에 살았던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을 건축으로 표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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