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집의 단상
<서언>
작은 집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 시대의 새로운 시각을 열어보려는 편집진의 의도는 알수 있으나 본인의 생각이 그 의도와 부합되지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가뜩이나 글 쓰기 싫은 요즈음의 원고청탁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큰 집에 대응되는 작은 집의 관심은 오히려 억눌린 자들의 작은 집의 슬픈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나는 이 글을 쓰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작은 집에 대한 생각은 바로 이 시대에 작은 집에 대한 잘못돤 시각의 교정이나 아니면 비록 규모는 작지만 그것대로 새로운 가치를 찾아보자는 의도인 것 같다. 그러나 삶의 가치의 혼돈되어 있는 요즈음 나의 글이 어떠할까 생각해보면서 조심스럽게 졸필을 시작하고자 한다. 기실 작은 집에 대한 언급 자체가 바로 이 시대의 문제인 것이다 집에 있어서 외형적인 크고 작고가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가치관이라는 그 문을 제대로 통과하여 이해하기 전에는 작은 집의 문제는 올바로 접근하기가 어려울 같다고 생각되어지며, 작은 집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논한다는 자체가 이미 작은 집에서 사는 이의 아름다운 인격을 보기가 예전보다 힘들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가치관의 혼돈의 혼돈
우리의 근간의 사정을 돌아보면 불과 몇 십년간 이어지는 서구문화의 유입으로 배고픔에 지친 우리들에게 서구문화의 유입에 대한 적합성을 논하기도 전에, 그 서구문화의 옳고 그름을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 옆에는 국제화라는,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음을 보고서 깜짝 놀라곤 한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빠른 속도로 미처 우리들의 삶을 챙겨볼 겨를도 없이 변화의 속도는 우리들의 삶을 끌고서 앞으로만 나아간다. 지난 시간의 삶의 매듭도 풀기도 전에 또 다른 세계를 향하여 치닫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물질만능의 정보, 지식의 산업사회에서 우리들은 개성 혹은 다양성이란 미명하에 자기 현시적인, 과대노출증의 현대인에게 그럴듯한 큰 집이란 자기의 현재 위치나 부의 축적을 대변해주는 과시 수단과 대상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그것은 과거의 우리 조상들도 마찬가지로 보여지지만-----
그러나 작은 집에 사는 이의 모습은 예전과 자못 다른 것이 문제 아닌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예전의 조상들은 작고 초라한 초가집이지만 그 들은 가진 자에게 비굴하거나 아첨을 경계하였고, 청빈한 은둔적 삶에 오히려 자족하면서 이전투구의 사회에서 자신을 멀리 놓아 자신을 갈고 닦는데 노력하면서 삶을 살았다. 사회가 혼란할 때는 직언을 스스럼없이 하였고 자기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유유자적하며 살아감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러한 가치관은 사라지고 큰 집과 좋은 자동차가 그 사람의 사회적 성공을 대변하는 대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진정한 삶의 가치가 부를 목표로 한 것이 올바른 가치인가? 이 웃기는 일이 웃기는 일이 아닐 때 작은 집은 우리들에게 편안한 대상이 되며, 진정한 집의 아름다움은 규모가 아닌 삶의 가치가 그 집을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으로 이해 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가치의 혼돈이 더 이상 혼돈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들의 큰 집과 작은 집의 구분은 사라질지 모르겠다.
물리적인 가치에서 삶의 가치로의 전환
우선 나에게 작은 집과 큰 집의 구분을 가른다는 것이 우습게 들린다. 큰집과 작은 집은 물리적인 칫수나 형태에 의한 차이일 뿐 그것이 큰집과 작은집의 차이가 될 수가 있겠는가?
문제는 그 집의 사는 이의 정신세계이며, 올바른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이 사회를 위하여 얼마나 유용한 사람인가? 하는 삶의 소프트 웨어가 더욱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작다, 크다라는 물리적인 구분 자체는 의미가 없다. 자신의 삶의 방식대로 살면 되는 것이지 외부의 물리적인 기준이나 잣대를 사는 이에 적용하거나 들이대는 무모함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걸어서 다니는 사람이나 작은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큰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보다 인격적으로나 삶의 방식이나 가치가 잘못 되었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물리적인, 외형적인 차이가 내면세계의 가치의 차이로 잘못 오인할 수 있음을 우리는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큰 집과 작은 집이 인간들을 구분하는 잣대나 가늠자로 둔갑할 것을 염려하는 바이다. 그리고 비교, 대응의 의미의 포함은 자칫 잘못하면 흑백 논리의 다름이 아닐뿐더러 작은 집의 가치의 의미가 희석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은 집이든 큰 집이든 아름다운 집을 갖고자하는 욕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집이 부의 축적대상이나 재산증식의 수단이 될 때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집에 대한 올바른 가치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시점은 우리가 집이 부라는 추상성의 욕망의 대상을 벗어날 수 있을 때, 집이 부의 가치에서 삶의 가치로의 사고의 전환과 물리적인 크기보다 즉 양보다 질로의 삶의 가치의 전환이 함께 이루어질 때 가능 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짙게 드리워진 이 사회의 가치의 다양성과 인간의 얼굴만큼이나 다른 생각들 속에서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이미 구겨진 삶의 가치관을 누가 펴줄 수 있을 것인가? 큰집과 작은 집이 우리들 삶의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새 정부 들어서 마치 이전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으나 제대로 자신을 이 사회가 알아주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원망이라도 하듯이 이 시대의 기회주의자를 없애고 원리원칙이 바로서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새 정부의 일성이 정말 잘 지켜져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바꾸어놓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정부가 한다고만 되는 일인가?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한번쯤 되돌아 볼 시점은 아닌지----- . 그러한 사회가 되지 않는 한 작은 집은 여전히 사는 이의 인격이나 삶의 자세나 가치관과 상관없이 가난하고 없는 자의 대변인 노릇 이상을 하지 못할 것 같다. 그로 인하여 인격에 손상을 입는 푸대접을 이 사회로부터 계속 받을지도 모를 안타까운 일이다.
<결언>
나는 요즈음 덤덤한 집이 그립다. 지나친 꾸밈도, 그렇다고 너무 꾸미지도 않은 집은 더 싫다. 자신의 집에 대한 애정이 없으니까 돌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수채화 물감 같은 삶의 모습이 그려지는 그러한 사람이 사는 집, 그리고 소박하면서도 투명하고 정직한 이가 살아가는 모습의 집이 그립다. 우리들 주변의 어딘가에 있을 법한 평범한 집 같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는 사람이 사는 집,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있어도 삶의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는 작은 집이지만 결코 보기가 쉽지 않은 집, 우리 주변에 있을 것 같지만 이 시대에는 쉽게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 삶의 진지한 향기가 있는 사람이 사는 집이 그립다.
집은 사는 이와의 가치가 절대 무관치 않기 때문에 요즈음의 집 따로 사람 따로를 걱정해야지 작은 집, 큰 집의 물리적인 칫수에 의한 구분은 더 이상 건축인의 관심이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 한다.
출처- 배병길 (배병길도시건축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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