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코르뷔지에

(1887~1965)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로 현대 건축의 모든 면에서 기초를 다졌다고 보아도 될 정도입니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프랑스를 대표하는 천재 건축가입니다.

그의 다른 수식은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었던 건축가 입니다.

 

그의 일생

그의 본명은 샤를 에두아르 쟌레 그리 입니다. 1887년 스위서 서북부의 랴쇼드퐁에서 태어난 그는 중산층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피아노 선생님이었습니다. 어머님의 가르침은 르코르뷔지에를 세계적인 건축가로 발돋움 하는데 초석을 두었습니다. 그것은 "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해 내라"였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매사에 임했습니다. 한 예로 그가 13세 일때 라쇼드퐁의 미술학교에 응시했었습니다. 과제 작품제작 마감기한으로 3일의 기간이 주어졌습니다만 그는 그 첫날 저녁에 자신의 작품을 제출하였습니다. 미술학교에서 그의 스승은 화가가 되려는 그에게 건축을 하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17세의 어린나이에 자신의 첫 주택을 설계하게 됩니다. 하지만 르코르뷔지에가 어른이 되었을때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이유는 그가 어린시절에는 스위스 전통양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그가 추구하는 모더니즘과는 정반대인 스위스 전통주택을 설계하였기 때문입니다.  17세 이후 19세 까지 그는 총 7개의 건축물을 설계를 했지만 전부 고전적인 모더니즘과는 정 반대인 고전방식의 건축물 이었기 때문에 유명한 작품들은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파리에서 그에게 영감을 준 스승을 만나게 되는게 그사람은 바로 철근 콘크리트(즉 모더니즘의 시작)의 선구자로 불리우는 오귀스트 페레입니다.  르코르뷔지에는 오귀스트 페레에게 최신 재료 즉 철근 콘크리트와 기술, 구조를 배우고 피터 베렌스의 사무실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됩니다. 건축사사무실엣 일하면서 그는 근대 건축에서 빼놓을 수없는 거장인 미스 반 데어로에(커튼월로 유명한 사람)과 발터 그로우 피우스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또 그의 건축정신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동방으로의 여행이었습니다. 베를린에서 출발하여 프라하, 빈, 부다페스트, 콘스탄티노플, 아테네, 폼페이 등을 여행하게 됩니다. 여행을 하면서 그는 위대한 고건축물들을 직접 보고 경험을 쌓습니다. 소피아 대성당과 모스트에서는 단순 기하학이 지니고 있는 강렬한 힘을 느꼈고 발칸반도의 민중예술과 토속 건축물의 자연스러움에 감탄하게 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통해 그는 기존에 그가 항상 보아왔던 유럽식 장식 예술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볼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고향인 스위스로 돌아온 르코르뷔지에는 현대적 기술(철근 콘크리트 공법)을 사용한 이론적인 건축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완성되는 것이 지금 건축을 대표하는 시스템입니다. 돔-이노 시스템으로 불리어지는 이 아이디어는 최소한의 숫자의 얇은 철근 콘크리트 기둥들이 모서리에서 지지하는 단순한 구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구조는 건축트랜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한 이유는 기존의 유럽건축물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럽건축물과 가장 큰 차이는 벽이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까지의 유럽건축은 벽으로 하중을 견뎌내었기 때문에 두꺼운 벽이 많이 필요하였고 창문도 엄청나게 작게, 혹은 위아래로 길게 내어야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스템이 있기에 우리는 벽도 창문도 지붕도 바닥도 마음대로 할수 있었습니다.

근대 건축의 5원칙

1. 철근 콘크리트기둥인 필로티로 무게를 지탱하였고 건축 구조의 대부분을 땅에서 들어올려 지표면을 자유롭게 활용할수 있도록 합니다.

2. 건축가가 원하는 대로 설계할 수 있는 구조기능을 갖지 않는 벽체를 두어 자유로운 입면이 가능하도록 합니다.

3. 채광효과가 뛰어난 길다란 "띠 유리창"을 두었습니다.

4. 기중이 있기에 지지벽이 필요 없어 바닥 공간이 방들로 자유롭게 배열된 "열린 평면"을 만듭니다.

5. 건물이 서기 전에 있었던 조경을 대체하기 위해 건물의 옥상에 옥상족경을 만듭니다.

그는 순수주의를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시트로앙 주택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이 이름은 프랑스 자동차 시트로엥의 말장난 으로서, 건축물 또한 자동차 찍어 만들어 내듯이 현대 산업 방식을 채택하여 건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공장 제작 부품을 이용하고 규격화 하면 효율적으로 양질의 주택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 이었습니다. 집 또한 자동차 처럼 기능에 충실하고 사용하기 편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건축물을 첨단 기술로 탄생한 자동차와 같은 기계와 같이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명언을 통해 그의 이러한 생각을 잘 드러냅니다. "A house is a machine for living in" 집은 살기위한 하나의 기계이다. 

그는 유럽의 도시를 바꿔놓았습니다. 당시 유럽의 도시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공간이 협소하여 좁고 열약한 주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리는 너무 더럽고 혼잡하였습니다. 이러한 요인은 바로 다름아닌 산업혁명으로 도시로 인구가 급격히 몰렸기 때문입니다. 좁은 지역으로의 인구는 급증하지만 건물들은 중세의 것들이어서 그는 유럽의 도시를 바꿔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르코르뷔지에의 도시계획은 교통수단으로 서의 자동차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자동차가 인간을 거리의 제약에서 자유롭게 한다는 생각으로 교통체계를 중요히 여기고 주거지역을 멀리 떨어뜨려 공간이 넓은 쾌적한 삶을 꿈꿨습니다. 당시에 유럽의 도시들은 이미 중세와 근대의 건물들로 넘쳐 났기 때문에 이러한 그의 도시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넓은 땅을 지닌 미국은 이러한 르코르뷔지에의 계획안에 맣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또한 개발도상국으로서 1970년대이후 만든 한국의 계획도시, 신도시 들은 이러한 르코르뷔지에의 개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차선을 중심으로 주거지역, 업무지역을 나누었으며 많은 녹지를 두는 것을 원칙으로 도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것은 도시 재개발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역시 이러한 계획안에 영향을 받은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정하기 힘들것입니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이러한 도시의 계획안은 인구가 집중된 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주택부족을 해소하여 주고 쾌적한 도시생활이 가능하도록 하였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도 야기 시킵니다. 사람보다 자동차가 우선시 되고, 업무지구는 밤에 모두 집에 가느라 도로가 정체 되고 너무나 넓고 넓은 녹지는 도시를 나누게 됩니다. 

르코르뷔지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가 지나치게 기능과 기술만을 바라봄으로써 인간과 도시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과 불확실성을 무시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원래 모더니즘 자체가 받는 비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은 다시 한번 변화를 가집니다. 1930년대를 기점으로 하여 르코르뷔지에는 전기와 후기로 나뉩니다. 그러한 이유는 그만큼 그가 같은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건축을 선보입니다. 그가 후기에 설계한 롱샹성당을 보면 알수있습니다. 그동안 만들어 내었던 표준적이고 안정적이고 규격화 되어진 건축이 아닌, 대지의 특별한 조건 아래 형성된 특별한 모양의 건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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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반 데어로에

(1886~1969)

그는 우리주변에 볼수 있는 커다란 커튼월(철골과 유리벽을 한 구조)을 한 높은 빌딩들이 도시에 자리잡게 한 장본인입니다.

현대 건축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거장입니다.

 

그의 일생

그는 독일 출신의 근대 건축가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석공이었며 그러한 영향 탓에  그는 어릴 적 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돌을 만졌습니다. 흥미롭게도 미스 반 데어로에는 한번도 건축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일본의 유명 건축가 노출콘크리트로도 유명한 안도 다다오 그리고 그에게 영감을 준 르코르뷔지에 와 평행선을 긋는 듯 합니다. 베를린으로 이사를 온 뒤 근대 건축의 초창기 거장인 페터 베렌스의 스튜디오에서 건축일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정규 교육이나 학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곧 재능을 인정받고 독립적으로 건축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곳에서 철골과 유리에 매료된 그는 산업주의와 신고전주의를 통합하게 됩니다. 산업의 재료와 즉 유리, 철과 고전주의의 비례와 형태에 동시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의 본명은 원래 '마리아 루트비히 미하엘 미스'였는데 자신의 이름이 촌스럽다고 항상 여겼던 그는 새로운 디자인 이론과 독일의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어머니의 성인 '반 데어 로에'와 아버지의 성을 합하여 지금의 이름인 '미스 반 데어로에'로 개명을 합니다.

그렇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독일과 미국에서 살았던 그는 건축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바로 다름아닌 모더니즘입니다. 독일에서는 바우하우스의 학장으로서, 그리고 미국에서는 일리노이 공과대학교의 학장으로서 재직하여 모더니즘 건축의 중심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지금도 화두가 되고 있는 미니멀리즘을 이끌었던 장본인입니다. 이것은 그의 명언에서 알아 볼 수 있습니다. "Less is More" 더 적은 것이 더 풍요로운 것이다. 이 말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개인적인 모토 일 뿐 아니라, 20세기 초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가치를 찾고자 했던 근대 근축가들의 이상과 맞아 떨어졌습니다. 산업화가 진행되었던 19세기 말과 20세기초 에는 기존의 역사적인 건물의 외관과 장식을 흉내내는 예전에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관습적인 건축에 대한 반항운동이 일어 났던 시기 입니다. 시대는 변하여 가는데 건축은 그대로 머물러 있고 오히려 퇴행하는 듯하여 이러한 운동이 벌어졌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1920년대에 와서 국제주의 형식이라는 사조로 통합되어 바야흐로 현대 건축의 새 장을 열게 됩니다. 그 중심에는 바로 미스 반 데어로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소재의 새로운 변화였습니다. 유리와 철 이라는 재료의 발견과 기술의 혁신이었습니다. 바로 커튼월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가치는 아방가르드 예술가와 건축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비전을 그려내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의 작품

그는 날 때부터 모더니스트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초기 건축물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스타일에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대쵸적인 예가 펄스 하우스와 후르비히 하우스 입니다. 미스 반 데어로에는 모던한 스타일로 그 건축물들을 지을려고 하였지만 건축주의 강력한 주장에 못이겨 전통적인 박공지붕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는 건축주의 의견도 반영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단순하면서도 비례감이 살아 있는 건축물을 만들어서 그의 개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처음으로 그를 세상에 알리게된 주요 작품은 완공된 것은 아니지만 그가 1922년 프리드리히가 오피스 빌딩 공모전에서 제안한 계획안 이었습니다. 그 건축물은 20층 규모의 빛나는 글라스 타워였습니다. 그 당시에 유리와 철이라는 소재는 생소하여 보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지금은 유리와 철이 커튼월이 보편적인 형태의 초고층 빌딩이지만 그당시에는 상당히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1927년에 독일 슈투트가르트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를 설계 하였을때도 사람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꽉차고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것이었습니다. 투명하고 현대적인 조형을 가진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새로운 주거형태 였습니다. 그 당시에 화려한 주택들에 비하면 바이센 호프 주거단지는 평지붕에 박스 건물이어서 초라해 보였을 것이지만 단순한 형태 안에서 최대한 동선을 줄이고 방을 기능적으로 배치하여 현대적인 삶의 방식을 담으려 그는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1920년대 부터 공간과 기능을 분리하여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점은 나중에 자신의 건축에서 중심 주제로 삼은 '무한정 공간'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바로 바르셀로나 파빌리온과 투겐트하트 주택, 그리고 수직타워의 안정적인 비례와 질서를 보여준 시그램 빌딩이다. 현대도시의 경관을 만들어 낸 시그램 빌딩은 많은 추종자와 반대자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건물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수 있는 전형적인 고층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중에 그의 제자들은 무수한 시그램 빌딩 복제품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복제품들은 미스 반 데어로에가 만들어낸 시그램 빌딩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바로 디테일에 있습니다. 그는 당시 법규가 허용하는 많은 면적을 포기하고 거리에서 27미터나 뒤로 물러난 곳에 빌딩을 위치시켰습니다. 그러한 결과 건물의 앞에는 많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광장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앞에 광장에 사용한 대리석을 로비 안까지 사용하여 마치 광장이 건물까지 연결된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건물전체의 통일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건물앞 광장은 마치 빽빽한 고층건물들이 들어서있는 사막한 가운데에 있는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시그램 빌딩을 모델로 삼은 건물이 있습니다만, (청계2가 사거리에 있는 삼일빌딩) 그 건물 후면부에 보기 싫게 붙어 있는 회색의 콘트리트 기둥과 차가 주차하여 숨막히는 듯한 비좁은 광장등 때문에 아쉬움을 남깁니다.

미스 반 데어로에 말년의 대표작은 베를린 신 국립미술관입니다. 디테일의 완성도 와 개념의 명료성에 초점을 둔 작품입니다. 관절염이 있었지만 병원에서도 도면을 검토할 정도로 그는 국립미술관에 큰 애정을 쏟았습니다. 그는 항상 그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베를린에 위대한 미술관을 짓는 것을 꿈꿔왔었기에 그러한 동기부여로 미술관 자체가 위대한 전시물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완성된 베를린 신 국립미술관의 포디움은 예술품을 지지하는 전시대와 같은 역할을 하며 유리로만 둘어싸인 내부는 안과 밖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지분을 떠받치는 십자 모양의 철골 기둥 8개는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 지는데, 이런 섬세한 디테일들이 모여모여 위대한 하나의 예술 작품을 이루게 됩니다.

그의 건축은 절제를 통하여 공간이라는 건축의 본질과 시대정신 그리고 그 시대의 산업재료(유리,철)로 구축한 진정성으로 건축의 의미를 드러내려 하였으며, 시대를 꿰뚫어보는 절제의 미학 미니멀리즘을 지님으로서 현대인들의 감성을 자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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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다다오


(1941년~현재)

그는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입니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하였습니다. 그는 마치 한 편의 소설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뜻대로 되는 것은 별로 없다. 시도한 건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회를 잡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고 그리고 그 기회를 잡은 뒤에는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건축가가 되기 이전에 치열한 삶을 살았습니다. 트럭운전사도 하였고 권투선수로서의 삶을 살았었고 공사판에 나와 노역도 마다 하지 않았습니다.


1941년 일본 오사카 시에서 태어나서, 후리츠 죠토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62년부터 1969년 까지 세계각지를 여행하며 독학으로 건축을 배웠습니다. 특히 그가 흥미를 보였던 것은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이었습니다. 1969년 안도 타다오 건축연구소를 설립하여 지금의 그를 있게 만들어준 "스미요시의 연립주택"으로 일본 건축 학회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노출콘크리트 기법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미술관, 공공건물, 교회나 절 등을 많이 지으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안도 다다오가 르코르뷔지에를 얼마나 존경하는지는 그가 키우던 개의 이름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그가 키웠던 개의 이름은 바로 '르코르뷔지에'였던 것입니다. 그 개가 죽고 또 다른 개를 키웠지만 그 개의 이름 역시 '르코르뷔지에'이었습니다. 안도를 건축의 길로 이끈 사람이 바로 르코르뷔지에 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안도 다다오가 그을 얼마나 존경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안도 다다오가 말하는 르코르뷔지에는 건축가이면서 화가이며 조각가이고 작가이며 사상가라고 일컫습니다. 그의 인터뷰에서 그는 르코르뷔지에를 "아마 500년에 한 번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의 건축가와 미켈란젤로 다음에 르코르뷔지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단순히 건축가라고 말하기 어려울만큼 그들은 위대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안도다다오는 어려웠던 집안 형편상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비록 그는 정식으로 건축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에 푹 빠져 그의 작품집을 헌책방에서 발견하여 책속의 드로잉을 수없이 따라 그리는 것으로 건축가의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말하길 그는 르코르뷔지에의 건축도 존경하지만 그의 삶과 정신을 흠모한다고 말합니다. "르코르뷔지에 처럼 저는 건축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습니다. 대학에도 가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무작정 책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건축물을 보러 세계로 다녔습니다. 그 과정에서 건축이 점점 저의 몸안으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세상에는 엘리트도 많이 있지만 엘리트가 아닌 사람도 많이 존재합니다. 더군다나 일본은 학력사회 이기 때문에 그 격차를 잡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실인 기회는 반드시 우리에게 옵니다. 그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일에 관해 계속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집중하여 계속 생각한다면 자신에게 오는 기회를 반드시 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잡았다면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합니다."

안도가 말하는 르코르뷔지에는 프랑스에서 살았지만 스위스 태생이고, 건축학을 정식으로 공부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의지만으로 대규모 파리도시계획을 비롯해 평생 동안 전 세계에서 많은 계획을 하였지만 안타깝게 모두 실현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의 사망 당시에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었던 안드레 말로는 장례식 조사에서 르코르뷔지에를 일컫길 "그토록 오랫동안, 끈질기게 사람들에게 숱한 모역을 당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로지 그는 인간과 건축만을 위하여 계속 싸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안도가 바라본 르코르뷔지에의 인생은 자신과 같다고 느꼈습니다. 안도 다다오는 항상 힘들때 마다 르코르뷔지에가 실패하였던 일들을 뒤로한체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였던 모습이 늘 귀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만나보지 못하였던 책으로만 보던 르코르뷔지에의 건축물을 실제로 보기 위하여 그는 푼돈을 열심히 모아 24세의 젊은 나이게 프랑스에 가서 롱샹 성당을 보았던 감동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는 막상 롱샹성당에 도착하였는데 사방에서 무참히 쏟아져 내리는 빛을 견디지 못해 1시간도 채 안되 밖으로 뛰쳐 나오다 싶이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건축에서 빛을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중요한가를 뼈져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설계작품으로는 고베(神戶)의 로코 하우징 II(1993)과 오사카의 산토리 박물관(1994), 가고시마대학의 이나모리(稻盛)회관(1994), 오사카의 맥스레이(Maxray) 본사 사옥(1994), 나라(奈良)의 고조문화박물관(1995), 오카야마(岡山)의 나리와 미술관(1994)과 효고(兵庫)의 초등학교 등이 있습니다. 1985년 교토(京都) Times I(1985), Times II(1991), 1988년에 지은 오사카의 갤러리아 아카와 1989년에 건설된 '빛의 교회' 는 그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연과의 조화가 잘 나타난 건축물로는 치카츠 아스카 역사박물관, 구마모토현의 장식고분관, 그리고 히메지의 문학관, 물의 교회, 물의 절 등이 있다. 2007, 2008년 완공 예정인 상하이 디자인 센터(중국)의 설계를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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