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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건축의 선구자, 발터 그로피우스 -
발터 그로피우스는 1883년 5월 18일 독일의 베를린에서 공직에 몸담고 있던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삼촌인 M.그로피우스는 건축가로서도 그 명성을 얻고 있었고, 베를린 소재 미술공예학교의 교장과 프러시아의 미술 교육감을 역임하였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유명한 바우하우스(Bauhaus)의 창시자이며, 건축학 교수이자 수많은 작품을 발표한 건축가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을 국제 건축을 육성하는데 보내면서 세 가지 서로 다른 역할 - 물론, 서로 관련 있는 분야이기는 하지만 - 즉, 건축가, 교육자, 비평가로 일했다.
1901년 샤로텐부르크와 뮤니히에서 처음으로 건축교육을 받았으며, 러스킨(I.Ruskin)과 모리스(W.Morris)의 영향을 받았다. 1911년에 설계한 파구스 제화공장(Fagus Werke)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벽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우수와 추위, 그리고 소음을 배제하기 위해 가구의 직립주 사이에 친 스크린으로 벽을 대신하였다.
그의 활동은 4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근대적인 구조로서의 건축의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추구한 시기, 즉 1907년 P.베렌스의 사무소에 들어가 10년 동안 근무한 후 독립하면서 파구스구두공장(1911) · 독일공작연맹(DWB) 박람회의 공장 및 사무소(1914)를 설계하였다. 특히 유리로 만든 커튼 월의 대담한 사용법이 주목을 끌었다.
제2기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9~1928년에 이르는 바우하우스의 교장시절이었다.
유능한 디자이너를 많이 육성할 목적으로 바이마르(Weimar)에서 출발하여 1925년 데사우로 이전(바우하우스 신교사는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하였으며, 근대 디자인운동 메이커로서의 디자인 교육의 기초자세를 세계에 과시하였다.
제 1차 대전 중에는 기병대로 종군하였고, 이때 그는 "예술노동 평의회", "11월 그룹", "유리의 사슬" 등 수많은 좌익계 미술가들의 조직에 관여하게 되었으며 일시적으로 표현주의 관련을 맺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19년 바이마르 시의 초청을 받으며, 공예학교와 미술학교를 합병하여 국립 바이마르 바우하우스를 창설하고 이 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어 새로운 조형 교육을 실천하였다.
제3기는 바우하우스의 교장을 사임하고, 1928∼1934년까지 도시문제, 특히 집단주거 건축의 실제적인 해결을 모색하였다. 판자 모양의 고층아파트의 제안이나, 베를린 및 카를스루에(Karlsruhe)에서의 주택단지 건설에 참가하였다.
제4기는 나치스의 대두로 독일을 떠나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한 시절인데, 영국에서는 M.플라이와 협동하여 몇 개의 건축을 이룩하고, 1937년에 도미하여 하버드대학 건축과 대학원 교수로 많은 건축가를 육성하였다.
그의 생애는 바로 계몽가로서의 기본노선을 따라 전개되었으며, 미정리 부분을 재빨리 찾아내어 정확한 해결을 제시하고 실제로 창조해보이는 능력이 뛰어났다.
- 발터 그로피우스와 바우하우스 -
"왜 오늘날의 스타일을 옛날로부터 빌어오는가? 모든 물건의 겉모습은, 그것이 등잔이건 의자건 건물이건 간에 쓰임새에 알맞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건축가나 디자이너는 지금이라도 속임수와 꾸밈을 버려라. 재료의 특성을 정직하게 살리고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 있는 미술·건축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의 교장이 되었다. 취임식 날 그가 한 이 말은 20세기 건축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바우하우스 이전의 건물 생김새를 보면 거의 모두가 로마 궁전이나 고딕식 대성당 같은 아름답고 웅장한 것들과 어딘지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아주 세세한 곳까지도 오밀조밀하게 꾸며 아름답기는 했지만 이것들은 쓸모보다 눈요기감이었다.
요즘도 음악당이나 교회 · 미술관 같이 예술성 있는 건물들은 예쁜 모양으로 짓는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이런 곳에서 살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사는 튼튼하고 값싸며 편리한 집, 꾸밈새가 적고 단출한 현대식 건축이 맨 처음 태어난 곳이 바로 바우하우스였다.
아름다움과 쓸모가 제대로 어울린 것만이 참된 디자인이라고 생각한 그로피우스에게 보기에만 좋은 것이 한심하게 느껴졌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정말로 쓰임새 있는 건물을 지을 수 있게끔 하겠다고 굳게 마음 억었다.
그의 생각은 열매를 맺었다. 그로피우스라는 사람을 말하며 바우하우스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바우하우스는 그로피우스의 뜻과 꿈이 펼쳐진 곳이며, 바우하우스가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그로피우스의 고집과 끈기 덕분이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는 본디 두 개로 나뉘어져 있던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합한 것이다. 낮은 신분으로 인식되어지는 직공과 고귀한 예술가의 구분을 없애려는 뜻에서였다.
그로피우스는 그림을 그리고 조각하며 디자인 하는 것이 사실은 기술이며, 이것이 좋은 조건에서는 예술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믿음에 따라 그로피우스는 모든 학생들을 작업장으로 보내 기술자에게 기술을 배우고 직접 만들도록 시켰다. 창조적인 힘을 갖게 하는 공부도 같이 가르쳤다.
바우하우스의 교수들 가운데는 칸딘스키, 폴 끌레, 알베르스 같이 현대 미술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이들이 많았다. 바우하우스는 곧 20세기 초,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려는 꿈을 가진 교수들과 학생이 마음으로 뭉쳐진 혁신적인 학교였다.
이를테면 의자를 만든다고 하자.
옛날에는 보기 좋은 것이 디자인의 으뜸 조건이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에서는 디자이너가 의자 만드는 법을 먼저 배우게 한다. 또 의자는 어떻게 생겨야 앉기 편한가를 연구하도록 한다.
이와 함께 일일이 손으로 만들지 않고 기계로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 내려면 어떤 재료를 쓸 것인가 생각하게 한다. 그런 일을 거쳐 바우하우스의 의자는 튼튼하고 편하며 날씬하고 산뜻한 모양으로 태어나게 된다. 쓰임과 모양이 잘 섞인 바우하우스식이 되는 것이다.
그로피우스는 1928년까지 9년 동안 바우하우스의 교장으로 있었다. 그 사이 바우하우스는 새롭고 뛰어난 감각을 만들어내는 요람이 되었다. 학교를 그만둔 그로피우스는 원래 그의 일인 건축설계 쪽으로 돌아갔다. 바우하우스에서는 그의 몫을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건축에서도 그는 '기계와 예술의 슬기로운 조화'를 실현했으며 그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낯익은 수많은 물건 가운데는 바우하우스에서 디자인한 것이 꽤 많다. 벽을 따라 위아래에 찬장을 붙여놓은 싱크대, 쇠파이프로 만들어진 의자 따위의 가구, 이동식 벽, 조립식 건축 자재, 소리를 흡수하는 천 등이 그것이다. 모두 바우하우스와 그로피우스가 남긴 훌륭한 유산이다.
바우하우스의 정신은 한마디로 기능주의(機能主義; 건축 · 공예의 모양과 재료는 모름지기 쓰임새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생각)라고 할 수 있다. 만일 1919년 바우하우스가 발터 그로피우스의 손으로 열리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아름답지만 불편한 그림같은 집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