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베를린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출생.
1903-1907년 뮌헨 공과대학, 베를린 샤를로렌 부르크 공과대학에서 건축 수학.
1907-1910년 피터 베렌스 설계사무소에서 르 꼬르뷔제, 미스 반 데어로에와 함께 근무.
1911년 독일공작연맹에 참여하여 부재의 부품화와 현장조립 주장. 파구스 제화 공장 (Fagus shoe factory)
1915년 바이마르에 소재한 '작센 대공 공예학교'와 '작센 대공 건축전문학교' 교장에 임명.
1919년 위 두 학교를 '바우하우스 바이마르'로 통합, 1925년까지 교장 역임.
1925-1928년 바우하우스를 데사우로 옮기고 교장 역임.
1926년 데사우 바우하우스 교사 및 교사용 주거.
1933년 나치 정권 때문에 영국으로 이주.
1937년 하버드대학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하버드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역임.
1946년 하버드 제자 6인과 함께 건축가 협동단체인 TAC(The Architect`s Collaborative)를 설립.
1950년 하버드대학원 센타(Harvard Graduate Center, at Cambridge, Massachusetts), 아테네 미국대사관
1952년 하버드대학 은퇴.
1956년 영국 왕립건축학회(RIBA) 골드메달 수상. 미국 건축가협회(AIA) 골드메달 수상.
1969년 메사추세스주 보스턴에서 사망.

- 현대건축의 선구자, 발터 그로피우스 -
발터 그로피우스는 1883년 5월 18일 독일의 베를린에서 공직에 몸담고 있던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삼촌인 M.그로피우스는 건축가로서도 그 명성을 얻고 있었고, 베를린 소재 미술공예학교의 교장과 프러시아의 미술 교육감을 역임하였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유명한 바우하우스(Bauhaus)의 창시자이며, 건축학 교수이자 수많은 작품을 발표한 건축가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을 국제 건축을 육성하는데 보내면서 세 가지 서로 다른 역할 - 물론, 서로 관련 있는 분야이기는 하지만 - 즉, 건축가, 교육자, 비평가로 일했다.
1901년 샤로텐부르크와 뮤니히에서 처음으로 건축교육을 받았으며, 러스킨(I.Ruskin)과 모리스(W.Morris)의 영향을 받았다. 1911년에 설계한 파구스 제화공장(Fagus Werke)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벽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우수와 추위, 그리고 소음을 배제하기 위해 가구의 직립주 사이에 친 스크린으로 벽을 대신하였다.

그의 활동은 4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근대적인 구조로서의 건축의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추구한 시기, 즉 1907년 P.베렌스의 사무소에 들어가 10년 동안 근무한 후 독립하면서 파구스구두공장(1911) · 독일공작연맹(DWB) 박람회의 공장 및 사무소(1914)를 설계하였다. 특히 유리로 만든 커튼 월의 대담한 사용법이 주목을 끌었다.

제2기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9~1928년에 이르는 바우하우스의 교장시절이었다.
유능한 디자이너를 많이 육성할 목적으로 바이마르(Weimar)에서 출발하여 1925년 데사우로 이전(바우하우스 신교사는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하였으며, 근대 디자인운동 메이커로서의 디자인 교육의 기초자세를 세계에 과시하였다.
제 1차 대전 중에는 기병대로 종군하였고, 이때 그는 "예술노동 평의회", "11월 그룹", "유리의 사슬" 등 수많은 좌익계 미술가들의 조직에 관여하게 되었으며 일시적으로 표현주의 관련을 맺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19년 바이마르 시의 초청을 받으며, 공예학교와 미술학교를 합병하여 국립 바이마르 바우하우스를 창설하고 이 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어 새로운 조형 교육을 실천하였다.

제3기는 바우하우스의 교장을 사임하고, 1928∼1934년까지 도시문제, 특히 집단주거 건축의 실제적인 해결을 모색하였다. 판자 모양의 고층아파트의 제안이나, 베를린 및 카를스루에(Karlsruhe)에서의 주택단지 건설에 참가하였다.

제4기는 나치스의 대두로 독일을 떠나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한 시절인데, 영국에서는 M.플라이와 협동하여 몇 개의 건축을 이룩하고, 1937년에 도미하여 하버드대학 건축과 대학원 교수로 많은 건축가를 육성하였다.
그의 생애는 바로 계몽가로서의 기본노선을 따라 전개되었으며, 미정리 부분을 재빨리 찾아내어 정확한 해결을 제시하고 실제로 창조해보이는 능력이 뛰어났다.

- 발터 그로피우스와 바우하우스 -
"왜 오늘날의 스타일을 옛날로부터 빌어오는가? 모든 물건의 겉모습은, 그것이 등잔이건 의자건 건물이건 간에 쓰임새에 알맞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건축가나 디자이너는 지금이라도 속임수와 꾸밈을 버려라. 재료의 특성을 정직하게 살리고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 있는 미술·건축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의 교장이 되었다. 취임식 날 그가 한 이 말은 20세기 건축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바우하우스 이전의 건물 생김새를 보면 거의 모두가 로마 궁전이나 고딕식 대성당 같은 아름답고 웅장한 것들과 어딘지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아주 세세한 곳까지도 오밀조밀하게 꾸며 아름답기는 했지만 이것들은 쓸모보다 눈요기감이었다.
요즘도 음악당이나 교회 · 미술관 같이 예술성 있는 건물들은 예쁜 모양으로 짓는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이런 곳에서 살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사는 튼튼하고 값싸며 편리한 집, 꾸밈새가 적고 단출한 현대식 건축이 맨 처음 태어난 곳이 바로 바우하우스였다.

아름다움과 쓸모가 제대로 어울린 것만이 참된 디자인이라고 생각한 그로피우스에게 보기에만 좋은 것이 한심하게 느껴졌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정말로 쓰임새 있는 건물을 지을 수 있게끔 하겠다고 굳게 마음 억었다.
그의 생각은 열매를 맺었다. 그로피우스라는 사람을 말하며 바우하우스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바우하우스는 그로피우스의 뜻과 꿈이 펼쳐진 곳이며, 바우하우스가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그로피우스의 고집과 끈기 덕분이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는 본디 두 개로 나뉘어져 있던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합한 것이다. 낮은 신분으로 인식되어지는 직공과 고귀한 예술가의 구분을 없애려는 뜻에서였다.
그로피우스는 그림을 그리고 조각하며 디자인 하는 것이 사실은 기술이며, 이것이 좋은 조건에서는 예술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믿음에 따라 그로피우스는 모든 학생들을 작업장으로 보내 기술자에게 기술을 배우고 직접 만들도록 시켰다. 창조적인 힘을 갖게 하는 공부도 같이 가르쳤다.

바우하우스의 교수들 가운데는 칸딘스키, 폴 끌레, 알베르스 같이 현대 미술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이들이 많았다. 바우하우스는 곧 20세기 초,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려는 꿈을 가진 교수들과 학생이 마음으로 뭉쳐진 혁신적인 학교였다.
이를테면 의자를 만든다고 하자.
옛날에는 보기 좋은 것이 디자인의 으뜸 조건이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에서는 디자이너가 의자 만드는 법을 먼저 배우게 한다. 또 의자는 어떻게 생겨야 앉기 편한가를 연구하도록 한다.
이와 함께 일일이 손으로 만들지 않고 기계로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 내려면 어떤 재료를 쓸 것인가 생각하게 한다. 그런 일을 거쳐 바우하우스의 의자는 튼튼하고 편하며 날씬하고 산뜻한 모양으로 태어나게 된다. 쓰임과 모양이 잘 섞인 바우하우스식이 되는 것이다.

그로피우스는 1928년까지 9년 동안 바우하우스의 교장으로 있었다. 그 사이 바우하우스는 새롭고 뛰어난 감각을 만들어내는 요람이 되었다. 학교를 그만둔 그로피우스는 원래 그의 일인 건축설계 쪽으로 돌아갔다. 바우하우스에서는 그의 몫을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건축에서도 그는 '기계와 예술의 슬기로운 조화'를 실현했으며 그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낯익은 수많은 물건 가운데는 바우하우스에서 디자인한 것이 꽤 많다. 벽을 따라 위아래에 찬장을 붙여놓은 싱크대, 쇠파이프로 만들어진 의자 따위의 가구, 이동식 벽, 조립식 건축 자재, 소리를 흡수하는 천 등이 그것이다. 모두 바우하우스와 그로피우스가 남긴 훌륭한 유산이다.

바우하우스의 정신은 한마디로 기능주의(機能主義; 건축 · 공예의 모양과 재료는 모름지기 쓰임새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생각)라고 할 수 있다. 만일 1919년 바우하우스가 발터 그로피우스의 손으로 열리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아름답지만 불편한 그림같은 집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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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미국 위스콘신주(州) 리치랜드센터에서 출생.
1885년 15세 때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어 위스콘신대학을 고학으로 졸업.
1887년 근대건축의 선구자인 루이스 헨리 설리반의 설계사무소에서 근무.
1893년 시카고에 자신의 사무실 개설. 만국박람회를 통하여 일본과 동양의 건축에 관심을 갖기 시작.
1893-1911년 유기적 건축 이론에 바탕을 둔 ‘대 초원 양식(prairie style)' 시리즈를 통해 주택 중심의 많은 걸작을 선보임. 윈슬로 주택(1893), 하트레이 저택(1902), 마틴 저택 (1904), 쿤레이 저택(1908), 로비 저택(1909), 탈레신의 자택(1911년 이후).
1904-1910년 주택 이외에도 라킨사(社) 빌딩(1904), 유니테리언교회(1906) 등이 있음. 1910년 베를린에서 작품집 출간.
1911-1935년 침묵의 시기. 해외 도피 및 은둔 생활로 작품 활동이 전 시대에 비해 거의 없었다. 미드웨이 가든, 일본의 제국 호텔, 탈리아신 이스트 등. 1936-1939년 1936년 '낙수장(Falling water)’이라고 명명된 카프만 저택, 1939년 존슨 왁스본사 건축물을 통해 당시 세계적으로 파급되던 국제건축 양식(international style)을 받아들이면서 제2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1938-1939년 이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1938년부터의 탈레신 웨스트 주택 건설을 시작으로, 제2제이콥스 저택(1948), D.라이트 저택(1952), 프라이스 타워(1956), 베스 쇼롬 유대교회(1955), 마천루 계획안.
1959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1959)을 완성하기 직전 애리조나주(州) 피닉스에서 사망.

 

 -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유기적인 건축의 기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프랭크 라이트는 유럽 중심의 근대 건축의 흐름에서 당당하게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지니고 유럽 건축에 영향을 미친 미국의 자존심이었다.
그는 자연을 통하여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유기적인 건축의 기수이며, 기하학적인 수평선과 자연의 조화, 내부 공간의 리듬, 반복과 대립의 적절한 구성 등 현대 건축의 중심 언어를 훌륭히 사용한 건축가이다.

라이트는 위스콘신주 리릴랜드센터에서 1869년 6월 8일 음악가겸 목사인 윌리암 C.라이트와 웨일즈 출신의 안나 로이드 라이트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라이트는 태어나서 처음 20년은 위스콘신의 남서부에서 보냈다. 부모님 모두 교육을 많이 받으셨던 분이었다. 어머니는 독일 교육자인 프리드리히 프뢰벨에게 자식을 교육시켰다. 프뢰벨은 자연을 모방하게 시키기보다는 나무 상자, 큐빅 그리고 구들을 이용해 확장시키면서 시각 훈련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라이트에겐 평생 잊지 못할 기억들이었다.
또한, 삼촌의 농장에서 라이트는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를 했다. 그리고 시골의 삶에 대한 영원한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라이트가 태어나기도 전에 자식이 남자아이일 것이며 그는 아름다운 건물을 지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스스로 건축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그가 애들러와 설리반 밑에서 배웠던 것과는 색다른 주거 건축을 시작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사무실을 연지 6년 만에 그는 주거 건축의 디자인을 변화시키는데 성공했고, 삶의 새로운 패턴을 창조해 냈다. 이러한 혁명적인 스타일을 -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모방되어지기도 했던 - 프래리 하우스(prairie house)라고 부른다.
현재의 집들은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다. 창문은 벽에 난 작은 구멍과도 같고, 재료는 나름대로의 성질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주거 건축에서 새로운 언어를 찾고자 노력했던 그는 프래리 하우스를 개발했다. 그는 대평원에 걸맞다고 생각하는 길고, 낮은 라인을 형성하는 주택을 원했다. 그는 다락방과 지하실을 없앴으며, 지붕선을 조용하고 우아하게 만들고자 했다.
"어쩌면 본능 깊숙이 자리 잡은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어떠한 주거라도 shelter(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가 본질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낮고 넓게 퍼지는 지붕을 설치했습니다(그것이 납작하거나 어떻든 간에). 나는 건물을 동굴이 아니라 넓고 그 장소와 관련된, 하나의 shelter라고 보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난 땅과 평행한 면이 그 자신을 땅과 경계 지으면서도 건물이 땅에 소속되게 만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개념을 건물에 넣었습니다."
그는 prairie house를 짓는데 있어서 뚜렷한 원칙과 기준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건축주의 요구와 그 땅의 언어에 맞게 지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집이 "box"형태로 되는 것을 매우 꺼려했다. 이 말은 즉, 방은 서로 불필요한 벽과 문을 없애서 방끼리 서로 유동성이 있어야 하고 부드러운 유리 영역을 통해 빛과 공기가 흘러 들어와야 한다는 말이다.

"모든 위대한 건축가는 분명히 위대한 시인이다. 그는 분명 그의 시대와 그의 삶, 그리고 그의 나이에 대한 뛰어난 해석자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이 있었다. 이러한 경제 공황은 국가의 가능성과 국가성을 재평가하게 했던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의 라이트의 주요 관심사는 도시 집중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계획의 수립과 미국 중산 가정이 살 수 있는 housing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 해결책으로 Broadacre City와 Usonian House가 제안되었다.
Usonia라는 단어는 1925년 라이트의 기록물에 최초로 나온다. 미국을 위한 자신의 건축적 제안을 구체화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
이 시기의 약 16년 동안 라이트는 거의 500점에 해당하는 프로젝트들을 설계했다. 이 시기 동안인 1943년에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시작했으며, 그의 전 작품의 거의 절반에 해당되는 정렬적인 창의성을 보여주었다.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기적 건축 -
자연에서 추출된 그의 건축적 모티브는 가장 원초적인 개념으로 읽을 수 있으며, 이러한 자연에 대한 직관은 자연의 자태에서 형상화된 구조의 시스템을 비롯하여 형태, 내부와 외부공간의 관입, 수직과 수평의 상호 연관관계 및 연속과 확장, 반복 및 대립의 관계로 이어져 각각의 개체가 결합되면서 일체로 표현되는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의 맥을 이루고 있다.

라이트는 그가 평생 스승으로 생각한 당시 시카고학파의 거장인 루이스 셀리반 사무소에 입사하면서 '미'라는 것은 기능이나 형태에 내재하고 있다는 유기론(자연적이며 생물적인 것으로 유기적 인간성으로 연결되며, 서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사상이나 사물의 파악)을 계승 발전시켰다.
라이트는 140개 정도의 주택설계, 50여개에 가까운 계획안 등 다작의 주택 설계를 했으며 이를 통해 건물의 진실성은 건물의 지붕과 벽에 있는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 수 있는 내부공간에 있음을 제시했다.

초기의 계획에서는 좌우대칭의 엄격한 고전주의(classicism)에 의하여 구성하였으나 묵직한 평면 및 단면을 단순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유틸리티 코어(utility core: 주방, 세탁실, 화장실 등 물을 쓰는 공간을 한데 모아 설비에 대한 처리를 간편하게 함)가 주택의 중심적 요소로서 평면의 가동 칸막이와 다양한 높이의 천정으로 공간의 변화를 꾀하는 등 인간적인 스케일을 채택하였으며, 다양한 높이의 내부 공간감은 건물 외관에서 볼륨감의 변화가 솔직하게 표현되었다.
또한 수평선을 강조하여 대지에 펼쳐지는 듯한 공간을 전개하여 자연과의 융합을 시도하였으며, 매개공간의 효과와 평면형식은 세로와 가로로 직교하는 축선에 의해서 십자형플랜을 이루어 교차되는 두개의 축에 의해 결정되었다.
벽으로 구획된 각각의 방도 창문에 의해 차단되지 않고 자유롭게 유통되며, 칸막이 역할의 벽은 드라마틱한 공간을 연출한다. 실내공간은 어느 방으로도 확산되어 공간의 연속성이 확연하며 창문은 프뢰벨 가베의 영향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형성하고 크게 열린 개구부를 통하여 테라스나 발코니가 정원 등 외부공간과 융합해서 각 실의 연속성과 아울러 내부와 외부공간이 상호관입한 유기적 건축의 실체가 되도록 하였다.

라이트는 시대적 흐름의 격동과 역경 속에서도 많은 작품 활동을 통하여 자신의 건축적 사고의 근본인 유기적 건축론을 실재화하면서 이론과 실체를 겸비하며 충실하게 표현한 건축가로서, 자연을 디자인의 모든 원리, 결과의 내부적인 요소로서 이해하였으며, 그러한 건축이념은 생명 그 자체로서 내부적 유기체이며 형태와 기능을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여 부분은 전체를 구성하기 위해 중요할 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과도 융합해야 되며, 공간은 그 생활을 구성하는 중요한 성분으로서 외부로 향하고 또한 내부로 향해 흐르는 것으로 모든 것을 제 3차원으로 하여 느끼고 보며 사용하는 것으로 확립하였다.

1. 유기적 건축 : 단위, 요소 - 신진대사

1894년 공공 연설에서 처음으로 '유기적(organic)'이라는 말을 썼다.
"당신의 주택이 그것의 장소로부터 쉽게 확장될 수 있고, 그곳 자연이 근사하다면, 그곳의 환경과 호흡을 같이 하도록 하게하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건축물이 마치 그러한 기회를 가졌던 것처럼 그 장소에서 조용하게 자리를 잡고 있도록 하라."


2. 라이트의 세가지 유기적 건축 원리

유기적건축의 정의 : 시간의 흐름, 장소적 특성, 인간적 요구(기능)

  • ㆍ시간적 흐름 - 20세기 건물은 17세기 건물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 과거의 건물은 현대에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과거만 삶의 방식과 사회양식 등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 ㆍ장소적 특성 - 장소에 적합하려면 그것은 주위 환경, 경관을 가장 잘 이용해야한다. 그 예로 pairie house, 지평선을 따라 확장되도록 만들었다. 주거층은 위로 올려서 주변 환경의 경치를 제공했다. 대표적인 예로 낙수장, 그것은 건물과 장소가 조화롭게 엉켜있는 궁극적인 예이다.
  • ㆍ인간적 요구 - 건물의 목적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조에서도 인간을 단위 길이로 사용했다. 그리고 건물의 리얼리티는 벽이나 천장이 아니라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의 "공간"이다. 그는 초기 집에서 건축적 공간을 자유화시켰다. 불필요한 파티션은 없앴다. 즉, family house에 open plan을 제공했다.


3. 라이트의 주거디자인 지침 원리

  • ㆍ주택에 필요로 하고 있는 부분의 수를 적게, 분리된 방의 수를 최소화.
  • ㆍ대지에 수평인 평면을 늘리고 이것을 강조, 건물 전체를 그 대지와 연결시킬 것.
  • ㆍ상자와 같은 방, 모든 벽을 단순히 둘러싸는 막으로 활용하고 있는 주택을 배제할 것.
  • ㆍ불건전한 지하실을 모두 지상에 위치시킬 것.
  • ㆍ안팎의 필요한 모든 개구부를 인간적인 비례로 조화시켜 그것들이 극히 자연스럽고 일련의 전체적 건물로 존재하도록 할 것.
  • ㆍ잡다하게 서로 다른 재료들 조합시키는 것을 그만두고 가능한 단일 소재를 사용할 것.
  • ㆍ난방, 조명, 베란다 같은 것을 모두 통합시킬 것.
  • ㆍ실내장비를 건물 그 자체와 일체화, 그들 비품을 기계작업에서 제작하기 쉽도록 디자인하며 이로 인하여 실내 장비를 가능한한 유기적 건축의 일부로 통합.
  • ㆍ장식을 축출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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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관계론과 존재론으로 설명한다 . 관계론은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인 형식이 아니고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즉 개별적 존재의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한다. 이와 반대로 존재론은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정체성을 부여한다.

건축을 관계론과 존재론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어떨까?
건축은 관계인가 존재인가?
아니면 관계와 존재의 상호작용이 만드는 어떤 것인가?

“건축은 관계이다.”
관계적 건축은 존재의 본질을 관계성 또는 관계망으로 보기 때문에 우선 주변 상황의 속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관계적 건축이 주어진 대지에 남기는 흔적은 전체적 흐름의 일부분이 된다. 관계적 건축은 남겨진 흔적의 관계성에 집중하고 흔적 자체의 정체성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관계적 건축은 주어진 상황이 결정한다.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했느냐에 의해서 관계적 건축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오름, 여초 김응현 서예관, M 프로젝트는 ‘건축은 관계이다’ 라는 관점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들이다.

오름은 주변 상황과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철저히 관계성에 매달린 프로젝트다. 땅의 흐름을 오름이라는 관계만으로 해석하고 다른 의미를 더 이상 부여하지 않았다. 관계 외의 모든 군더더기를 빼버리려고 노력한 프로젝트이다. 여초 김응현 서예관에서는 선형의 매스가 떠있고 그 위 아래로 주변의 자연이 서로 소통하도록 시도하였다 . M 프로젝트에서는 절곡된 판의 구조로만 주변의 자연과 관계 맺기를 시도하였다.

[M 프로젝트 모형]

[S 프로젝트 스터디모형]

“건축은 존재이다.”
존재적 건축은 존재의 본질을 각 개체의 정체성으로 본다. 존재적 건축은 각 개체의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해 독특한 논리 구조를 가지며 그 결과로 독특한 형식이 나타난다.
완공작 비움 l 과 비움 ll 에서의 비움, P 채플의 반투명한 표피구조, 춘천 애니메이션 스톱모션관의 경사조경, S 프로젝트의 디지털적 이중 표피 등이 존재의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한 논리 구조의 예이다.

“건축은 관계와 존재가 만들어 내는 긴장적 에너지이다.”
100% 관계적이고 100% 존재적인 건축은 존재하지 않는다. 건축은 관계성과 존재성의 상관관계가 만드는 역학이며 긴장감이다.
건축의 성패는 긴장의 에너지로 측정된다. 아래 도표는 발표된 작품들을 관계와 존재의 측먼에서 분석해 본 것이다. ×축은 건축의 존재적 정도를, y 축은 건축의 관계적 정도를 나타낸다. ×축과 y 축의 대각선 방향의 축은 긴장적 에너지 레벨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관계와 존재는 서로 반비례의 관계이다. 가장 관계적인 것은 가장 비존재적인 것이 일반적이다. 건축은 그것이 관계적이냐 존재적이냐 보다는 높은 긴장적 에너지를 가지느냐로 평가된다. 가장 높은 긴장적 에너지는 건축이 가장 관계적이고 더불어 가장 존재적일 때에 도달된다. 그 상태를 관계적 존재라고 부른다.

관계적 존재
관계적 존재는 최고로 관계적이면서 동시에 그 관계 맺음 자체가 최고로 존재적 의미를 가지는 상태를 말한다. 모순적인 말처럼 들린다. 일반적으로 최고로 관계적이기 위해선 각 개체의 독립성이나 정체성이 최소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존재성을 각 개체의 정체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오름을 예로 들먼 기존의 지형을 따라 오르는 매스는 그 자체가 존재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그 매스와 지형과의 관계를 통하여 자연적으로 발생되는 경사마당, 누하진입 등의 요소들이 존재적 의미에 정체성을 부여한다. 관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난 존재인 것이다. 관계적 존재는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는 화두이다. 오름, 여초 김응현 서예관 등에서 시작된 실험은 P 채플, M 프로젝트, S 프로젝트 등을 통하여 결실을 맺어 갈 것이다.

거침(野)에 관하여

논어에 질승문즉야(質勝文則野) 문승질즉사(文勝質則史)라는 말이 있다. 내용(質)이 형식(文)에 비하여 튀면 거칠게(野) 되고 형식(文)이 내용(質)에 비해 튀면 사치스럽다(史)는 의미이다. 요즘 거침에 관심이 많다. 내용 즉, 설정된 논리의 전개과정이 형식을 빌려 담기지 않고 진솔하게 드러나는 것이었으면 하고 사치스럽지 않았으면 한다. 형식은 내용의 결과물이다. 결국 내용이 다르면 당연히 형식도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거칠수록 좋다.

단순화에 관하여
이번에 발표되는 완공작은 처음으로 프로세스를 반영하는 이름을 붙었다. 오름, 비움 Ⅰ, 비움 Ⅱ 가 그것이다. 이전에 발표된 작품들에게도 프로세스를 반영하는 적당한 이름을 붙이려고 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할말이 너무 많았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이번에 완공된 세 작품은 붙여진 이름을 지키기(?) 위해 프로세스를 극도로 단순화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요사이 간디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진보란 단순화이다.”

출처-임재용 (건축사사무소 O.C.A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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