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게 해 건축과 초기 그리스건축의 성립 (2-2)

 

 

 

<아트레우스의 보고>와 둥근 천장

 

무덤에서는 두 가지가 중요한데, 매장 형식이 다양해진 점과 이것을 집대성한 원형 공간이 등장한 점입니다. 미케네의 무덤은 성채와 한 몸이 된 왕궁의 일부로 부속되면서 피라미드 같은 독립성은 없어졌지만 매장 형식이 다양해지는 발전이 있었습니다. 원시시대부터 고대 문명을 거치면서 나타났던 대표적인 매장 형식인 석관묘, 갱묘, 묘실형, 톨로스 등의네 가지가 모두 쓰였습니다. 이 가운데 파일로스가 원형 공간의 모태가 되었는데 이전의 톨로스가 원형 지붕까지 갖추지 못하고 평면만 원형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미케네에서는 지붕까지도 원형으로 해서 평면과 일체가 되는 종합적 구성을 완성했습니다.

 

<아트레우스의 보고>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미케네 문명 전반에 걸쳐 왕의 무덤이 여럿 지어졌는데 대부분 톨로스 형태였습니다. 순장 전통이 남아 있어서 많은 금은 보화도 함께 묻었기 때문에 무덤 대신 '보고'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보통 톨로스는 암벽을 둥글게 파고 들어가는 방식으로 둥근 천장을 만들었는데 <아트레우스의 보고>는 이것을 모델로 삼아 도를 쌓아서 둥근 천장을 만든 점에서 건축 기술의 발전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이룹니다. 보존 상태가 제일 좋고 원형 공간의 구조 기술이 가장 발전하였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원시적 영웅주의와 결부된 상징성에 치중한 반면 이 보고는 규모는 작아진 대신 원형 공간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 윤곽이 처음 잡히기 시작했으며 이것을 구조물로 구현하는 기술 발전이 있었습니다.

 

전체 구성은 드로모스라고 부르는 30여 미터 길이의 통로를 거쳐 출입문을 지나 원형묘실에 이르는 순서로 이루어 집니다. 출입문 위에는 120톤이 나가는 석판이 상인방으로 놓여있는데 6x7 미터의 크기에 두께는 1.4미터였습니다. 둔탁한 고대 거석 구조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두께를 앏게 하면서 위쪽 벽체에서 내리누르는 무게가 문제가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벽체를 파내 진공 부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처리 방식을 릴리빙 아치 라고 부르는데 벽을 파낸 만큼 가벼워져서 무게의 부감을 현저하게 줄일 수 있었습니다.

 

관건은 둥근 천장인데 여기에서는 아직 완전한 반구에 이르지 못하고 기다란 역깔때기 모양에 머물렀습니다. 조적술로 완전한 반구의 둥근 천장을 만드는 기술은 아치를 3차원으로 회전해야 가능한 매우 어려운 기술이어서 로마의 판테온에나 가서 완성됩니다. <아트레우스의 보고>에서는 내어쌓기 라는 다소 원시적인 기술을 이용해서 꼭대기가 뾰쪽한 역깔때기를 만드는 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33단의 원형 벽을 위로 올라갈수록 안으로 조금씩 들어오게 쌓은 뒤 맨 위 단은 뚜껑을 덮듯이 막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렇게 만든 원형 공간은 지름이 13.2미터, 높이는 14.5미터 였습니다. 원은 그 자체가 하늘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등 기하학적 특수성이 강한 도형입니다. 원형 공간을 축조하기 시작하면서 서양 건축은 사각형 중심의 고대 오리엔트 건축과 차별화 되며 진일보한 단계로 집입했습니다.

 

 

초기 그리스 건축의 성립

 

기원전 1200년경이 되면서 그리스 본토의 지방에서 도리안 족이 유리한 자연환경과 그리스 일대의 발달한 문명을 손에 넣기 위해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 본토로 진출을 꾀하던 미케네 문명과 충돌하며 100여년 간 전쟁을 치르렀습니다. 이 전쟁은 도리안 족의 승리로 끝났는데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청동기 문명에 대하 철기 문명의 승리였습니다. 미케네 문명은 처동기 문명의 마지막 단계였고 도리안 문명은 서양 지역에 등장한 최초의 철기 문명이었습니다.

 

이후 그리스 반도에는 철기 문명에 의해 이전의 청동기 문명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건축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변수가 하나 더 추가되는데 바다 건너 소아시아에서 건너온 이오니안족이 합류한 것이 었습니다. 두 민족은 큰 정쟁 없이 잘 융합해서 그리스 문명의 모태를 형성했습니다. 두 민족은 많이 달랐습니다. 도리안 족은 대륙적 기질과 합리적 이성으로 무장했으며 법규에 능한 남성적 민족이었던데 반해 이오니안 족은 소아시아와 그리스 반도의 에게 해 연안 일대에 근거지를 둔, 좀 더 부드럽고 감성적 기질을 가진 해양 민족이었습니다.

 

일대일대응은 무리이나, 굳이 비유를 하자면 '스파르타식 대 아테네식'의 대별 구도에서 도리안 족을 스파르타에, 이오니안 족은 아테네에 각각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동력이 스파트타와 아테네로 대표, 대별되는 쌍 개념을 하나로 통합해낸 데 있듯이 도리안 족과 이오니안 족의 통합은 그리스 문명이 싹트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때가 대략 기원전 1000년경이었습니다. 이후 크고 작은 전쟁 등 부침이 있긴 했지만 그리스 문명은 비교적 안정된 양상으로 전개되며 조금씩 완성된 모습을 갖춰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 반도 일대에 흩어져 있던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통합되면서 작게는 주요 도시들을 중심으로 한 도시국가의 틀을 다졌고 크게는 이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그리스 세계라는 큰 문명 세계를 이루어 갔습니다.

 

도리안 족과 이오니안 족의 통합이 완료된 시점은 기원전 800년경이었습니다. 이후 100년 정도의 준비기를 더 거친 뒤 그리스 문명은 본격적인 발전을 시작하면서 구체적인 결과물들을 생산하기 시작해서 약 400여년의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스 건축의 시대 구분은 한 가지로 통일된 의견은 없으나 기원전 1100년부터 기원전 700년까지의 암흑기, 기원전 700년부터 기원전 480년까지의 아르카이크기, 기원전 480년 부터 기원전 323년까지의 고전기로 구분하는 것이 제일 보편적입니다.

 

 

철기 문명과 신전사회

 

그리스 건축은 그리스 문명이 그러하듯이 철기 문명의 산물입니다. 이전 청동기 문명의 고대 오리엔트 건축과 비교했을 때 거석 구조는 사라졌지만 건물이 작아진 대신 부재의 수가 많아지고 디테일이 섬세해지며 조합이 복잡해지는 변화가 있었는데 이것 역시 철기 문명으로 발전하면서 나타난 새로운 현상입니다. 도구의 관점에서 보면 강도가 세진 철기 덕분에 섬세한 가공이 가능해진 결과입니다. 문화의 관점에서 보면 철기 덕분에 승전이 많아지면서 노예가 늘어나고 생산도 향상되면서 사회 전반에 일어난 변화의 산물입니다. 중산층 이상인 남성들의 여유 시간이 많이 지고 직업이 세분화되면서 분야별로 전문직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군역과 노동 등에서 해방되어 여유로운 상태에서 자신의 전문적 일에 몰두할 수 있었고 건축과 예술도 섬세해지는 발전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건추과 그리스 문명은 신전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고대 오리엔트 건축의 5대 건축물이었던 성채, 무덤, 왕궁, 신전, 탑 가운데 신전으로의 집중이 두드러 졌습니다. 신전은 제일 중요한 건축물이었을 뿐 아니라 단순한 건축물을 뛰어넘어 사회 전체의 중심체 역할을 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종교 건물이었지만 신전에서는 제사만 올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치 집회, 시민 활동, 축제 법령반포 등 중요한 사회 활동이 벌어지는 배경의 장이었습니다.

 

신전은 사면을 에워싸는 기둥 열, 삼각 박공을 갖춘 지붕, 실대 공간인 셀라로 구성됩니다. 기둥은 단순히 구조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아래로 는 기단과, 위로는 지붕과 합해지면서 오더라는 종합적 구조체로 작동했습니다. 오더에는 그리스 문명을 일군 두 민족의 이름을 따서 도리스식과 이오니아식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이 두 이름은 그대로 신전 양식의 명칭으로도 통용됩니다. 나중에 후기 그리스 시대 때 새로 만들어지는 코린트식까지 합하면 그리스 고전 예술을 대표하는 3대 양식이 된다.

 

오더에는 여러가지 상징체계가 실렸는데 장식과 비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장식은 바깥 보의 외부와 지붕 박공이 돋을새김이나 그림 형식으로 들어갔는데, 신화나 승전 등이 주요 내용을 이루었습니다. 구성 부재 수가 많아지고 각 부재는 정밀해졌으며 이것들의 조합이 복합적으로 되면서 전체 구성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생겼는데 피타고라스가 정리한 비례 법칙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스 신선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부재들의 크기 및 이것들 사이의 위치와 관계는 그냥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일정한 비례 법칙을 따랐습니다. 기둥 밑동의 반지름을 모듈로 삼아 큰 부재는 이것의 배수로 작은 부재는 분수로 각각 그 크기를 정했습니다.

 

비례법칙은 두 오더 양식이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도리스식 오더의 주간 거리는 4.5-5.5가, 이오니아식 오더는 9-10이 표준형입니다. 기둥의 높이는 도리스식 오더는 14가, 이오니아식 오더는 18이 표준형입니다. 세부 부재의 비례는 이오니아식보다 도리스식에서 더 많이 지켜졌습니다. 이는 법규에 능한 도리안 족의 민족성이 그대로 닮아서 도리스식은 굵고 둔탁하고 남성적인 반면 이오니아식은 훨씬 더 날씬하고 섬세하며 장식적입니다. 주두도 마찬가지여서 도리스식이 납작한 원반과 판재로만 이루어지는 데 반해 이오니아식은 소용돌이 문양으로 장식했습니다.

 

- 출처- "한 권으로 읽는 임석재의 서양건축사"

라파엘 비뇰리

(Rafael Vinoly, 1944 ~ 현재)

 

그는 비록 남아메리카의 가장 작은 나라중 하나이지만 교육과 문화적인 면에서 깊은 전통을 지닌 우루과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국립 오페라 극장의 감독이었으며 남미 전역을 돌아다니며 그 당시 유명했던 모든 예술가들과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비뇰리가 어렸을 적에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였고 아버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오페라극장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한편 라파엘 비뇰리의 어머니는 건축학을 공부하다가 수학으로 진로를 바꾸었고, 이러한 환경덕에 비뇰리는 일찍이 예술과 그외의 다양한 직업을 택하게 됩니다. 그는 건축가로서의 인생이 얼마나 힘이드는지 일찍이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음악보다 건축일을 하는 것이 오랜 기간동안 예술 활동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건축가로 진로를 결정하게 됩니다. 현재는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고 그가 쓰는 언어는 집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합니다. 미주 대륙을 옮겨 다니며 생활한 탓에 영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의 첫 작품은 18세때 대학에 들어갔을 때 학교에서 실시한 목공소 건물 설계였습니다. 32살이 되던해에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됩니다.

종로타워의 디자인은 건축주가 프로그램상으로 요구하는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시설로 만들기 위해 기존 구조물의 리노베이션 및 건축적인 재구성 공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복궁과 종묘 사이 서울 종로구 시내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이 건물은 원안의 기본적인 틀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기존 건물의 구조에는 최소한으로 손을 댔습니다. 도시 계획적인 관점에서보 때 부지의 코너에서 뒤로 후퇴하여 조성된 공공 공간은 건물 내에서 일어나는 각종 활동과 지하 광장과 확실한 연계를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건물 디자인의 핵이 되는 건축적 해결책은 두 가지 기본 원칙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보다 공공적인 건물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 그리고 하나의 건축 구조물을 교육과 체험을 촉진시키고 회사의 전자 및 기술적인 분야의 발전상을 과시하는 매치로 변모시키는 것입니다. 많은 유동인구로 항상 붐비는 사거리에 위치한 이 건물은 대지의 한 코너를 본질적으로 공공적인 성격의 도로와 건물 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활동을 중재하는 요소로 변화시키려 합니다.

 

코너 부분이 오픈되도록 계획된 건물은 거대한 "도심 캐노피"로 덮여 야외 도심광장을 정의 내리게 됩니다. 이 철재와 유리로 이루어진 구조물은 도시와 건물 양쪽에 속하면서, 현재 건물의 에워싸인 성격을 외향적인 오픈 건축구조로 변환시키는 구역인 전이의 공공공간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이용 가능한 볼륨의 입면 최상부에서 건물 정면을 뛰어넘어 캔틸레버로 되어있습니다. 장력용 부재시스템은 캐노피 가장자리로부터 동양사이 투영되는 합성 오픈 메쉬 재료를 이용한 반투명 띠로 구성된 내부로 후퇴되는 커다란 스크린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각종 정보와 건물 내부의 활동은 건축물이 도시의 시각적인 관심거리가 되는 -"새로운 지평선"의 물질적인 표현을 통해서 도시로 디스플레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지표면 한층 반 아래 레벨에서 위와 유사한 도시와의 연계방법으로 지하 도심광장을 이용하여 건물이 기존의 지하철 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건물의 유리 입면은 하부로 연장되어 일련의 1,2층 그리고 3층 높이가 복잡하게 뛰섞여져 있는 아트리움공간을 만들어 내며, 도시와 건물 사이의 경계에서 광장 입구와 각종 상점 그리고 음식점이 들어선 지하철역으로 연결하고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그 외 아트리움 층 배면부에 위치한 거대한 멀티 비디오 스크린 시스템은 시각적으로 건물의 4개층을 연결하는 "정보의 벽"을 형성하여 건물 내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감지하는 시각적 이정표 역할을 합니다. 이정보의 벽은 선형 공간의 모체를 이루는 연속성을 확립할 뿐 아니라 건물 내 주광고판이 되어 사실 같이 느껴지는 깊이를 준다. 건물의 현태는 기존 평면모양(수직동선 코어)으로 3개의 튜브모양 부재의 수직연장과 돌출을 통해서 탄생되었으며, 이 건물을 아주 먼 거리에서도 눈에 잘 띄느 주요 랜드마크로 변모시킵니다.

Perennial emblem of home

 

FIREPLACE

 

Fire and human dwelling were inseparable in most climates until recently and the fireplace or hearth-source of heat and means of cooking-has been seen by many as the beginning of architecture. Fire was both practical necessity and social focus and the earliest known houses had fireplaces in the form of an open pit built into the ground.

 

The smoke from such fires would escape inefficiently through holes in the roof. Despite the development of chimneys and cetral heating these early fire pits remained in use in rural houses well into the nineteenth century.

 

The Romans used ceramic tubes inside walls to draw smoke out of bakeries, but true chimneys-tall structures designed to draw gases and smoke up from the fire and disperse them into the atmosphere-dis not emerge in Europe until the twelfth century. By the seventeenth century the chimney had become such an important feature that houses were frequently built around it, with a centural stack acting as a supporting structure for one or more dwellings. In the late eighteeth century Count Rumford designed a fireplace with a tall, shallow firebox that was better at drawing the smoke up and out of the building and greatly improved the amount of radiant heat projected into the room. His design became the model for modern fireplaces.

 

Architecturally, the fireplace's focal role in a house or room, combined with the desirability of a fireproof surround, was celebrated with elaborately carved openings and surrounds. French Chateux such as Blois, Chambord and Fontainebleau(opposite) are known for the size and artistry of their chimneypieces, while in the  Baroque and Rococo periods fireplaces were usually smaller but richer in decoration. The proliferation of fireplaces generated the picturesque roofscapes of great houses such as Burleigh in England, and socially its implications were even more significant: providing fireplaces throughout a dwelling made possible "a room of one's own," and the development of the modern sense of privacy and individuality.

 

Few modern homes have open fireplaces, due to the convenience of cetral heating and regulations on emissions, but gas fires and wood burners are still valued as a means of offering the ambience of a "real" fire. The fireplace, rather surprisingly, was valued by Le Corbusier as a powerful emblem of home, and evne in his Unites d'Habitation he saw such a "sacred" focus as essential for a family "even if," as he put it, "the 'fire' comes courtesy of electricity." In Alto's Villa Mairea, heated by a form of air conditioning, a large white-plastered fireplace dominates the living spaces, recalling vernacular models. Frank Lloyd Wright's Prairie houses were organized around a central fire and the later, and cheaper, Usonian houses, which had underfloor heating, similarly featured a focal fireplace that Wright considered "the psychological center of the home." In grander houses such as Fallingwater and Wingspread, a large chimney became the core around which Wright wrapped the entire dwelling, and a central fireplace and chimney were also famously deployed, with more than a trace of irony, in Robert Venturi's "Mother's House": built for his mother in suburban Philadelphia in 1962 its deliberately "houselike" front was to become one of the most celebrated emblems of Postmoder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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