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칸


1974년 3월 17일 뉴욕 펜실베이니아 역 화장실에서 한 노인이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여원에서 주소가 지워졌기 때문에 신원을 확인하는 데만 무려 3일이나 걸린 이 노인이 바로 인도에서 돌아오던 세계적인 건축가 루이스 칸(1901-1974)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훨씬 지난 지근, 여전히 칸의 건축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의 건축이 보여주는 견고함, 안정성, 세월의 깊이, 공간의 무게, 그리고 지속적인 감동 때문은 아닐까요? 당시의 건축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 칸 건축물의 중요성은 아마도 그것이 과거의 건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일것입니다. 사실 그의 건축에서는 현대 건축이 보여주는 재치, 발랄함, 경쾌함 및 형태의 자유분방함을 찾아볼 수 는 없습니다. 그의 건축은 마치 장중함과 여유를 보여주는 고전 음악과도 유사합니다. 굳건하고 감동적이기까지 한 칸의 건축은 시간과 유행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이 시대 건축의 고전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는 칸 고유의 건축 이론과 실천 체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칸의 독특한 사고 체계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칸 특유의 사고 체계와 언어사용은 칸에 대한 신비감을 가져다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칸을 이해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는 칸이 한 말을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차분히 숨을 가다듬고 칸의 건축과 그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 그의 말 속에 숨은 진정한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칸의 생애와 작품을 훑어 내려가면서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데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마치 그가 건축의 본질을 향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졌듯이 말입니다. 


칸이라는 건축가

칸의 직업을 이해하는 첫걸음

160센티미터가 간신히 넘는 왜소한 체구, 화상 때문에 흉터가 난 얼굴, 보잘것 없는 배경을 가진 가난한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 끝없이 열심히 작업했지만 파산에 몰리고 만 건축가 루이스 칸. 그런데 그의 사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왜 우리는 이 건축가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밖에 없는가? 건축가 루이스 칸의 삶은 극적이었습니다. 그는 불우했던 어린시절, 사고로 인한 화상의 기억, 그리고 평탄치 않았던 사생활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칸은 5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렸습니다. 부단히도 자신만의 건축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칸은 그동안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건축가로 알려져 왔습니다. 사실 건축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칸에 대해서는 쉽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칸의 생각과 건축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반증입니다. 그의 말이나 글은 직접적이지 않고 은유적이어서 마치 어느 경지에 다다른 철학자와 같이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그의 일생과 사유 과정 그리고 건축에 반영된 그의 사고를 찬찬히 살펴보면 칸의 작업을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압니다. 일견 난해하고 철학적으로 보이는 그의 사고체계는 사실 건축의 본질을 향한 그의 노력과 자신의 생각을 건축에 그대로 표현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따라서 칸 건축의 이해를 돕는 실마리는 바로 칸 자신의 일생에 걸친 생각과 그것을 표현하는 건물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술의 경지에 오른 대가의 숨결을 찾아서

칸의 활동 기간은 시기상으로는 근대 건축의 흥망성쇠와 거의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지만 내용적 측면에서는 완전히 다른면을 보여줍니다. 사실 건축은 타 예술 분야에 비해 현실의 상황과 조건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건축가의 개념을 실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칸은 빛과 공간을 통해 자신의 건축을 예술의 경지까지 승화시켰습니다. 근현대 건축을 통해 수많은 건축가들이 등장했지만 이른바 스승의 반열에 오른 건축가는 그다지 많지 않은듯 합니다. 이를 테면 르 코르뷔지에나 미스 반 데어 로에 등의 거장을 예로 들 수 있지만 시대를 초월한다는 측면에서는 칸을 첫 번째로 친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그만큼 칸의 건축은 시간과 지역의 차이를 넘어선 건축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즉 루이스 칸만큼 근대 건축의 역사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건축가는 많지 않았습니다. 

칸의 가계와 영향

칸은 1901년 2월 20일 제정 러시아의 에스토니아 지방에서 에스토니아계 유대인이었던 가난한 공예가인 아버지 레오폴드 칸과 라트비아계 유대인으로서 하프주자였던 어머니 베르사 멘델손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칸의 아버지 레오폴드 칸은 1904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1906년에 가족 전체를 미국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칸의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한 것은 당시 러시아에서 진행되었던 유대인 박해와 1905년에 발생한 유대인 대학살과 관련이 있습니다. 칸의 가족은 이런 시대적 혼란속에서 아버지를 따라 필라델피아의 빈민가에 정착하게 됩니다.

어린시절

칸은 아직 미국으로 오기 전이었던 3살 즈음 자신의 집에서 큰 화상을 입습니다. 아른다워 보이는 불꽃을 잡으려다 화로의 불이 옷에 옮겨 붙으면서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공예 기술자였지만 레오폴드는 실제로 고정적인 직업을 갖지 못했고 대신 어머니인 베르사가 재봉사로서 전체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칸은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과 내성적 성격 때문에 순탄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더욱이 사고로 입은 얼굴과 손의 화상 때문에 주위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되었고, 이는 칸을 좀 더 깊은 자의식의 세계로 빠지게 했습니다. 흉터가 있는 흉한 외모에다, 백인 사회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은 칸을 어렸을 때부터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미술과 음악에서 나타난 칸의 예술적 재능이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극복하는 계기가 됩니다. 펜실베이니아 시 주최 미술 대회에서 수상할 정도로 실력이 있었던 칸은 시가 운영하는 펜실베이니아 미술 아카데미에서 자신의 능력을 쌓아 나갔고 고등학생 사생 대회에서 1등을 할 정도의 실력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칸의 미술적 재능은 이후 그의 스케치 등을 통해 잘 나타납니다.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 분야에서도 재능이 있었던 칸은 이미 10대 시절에 무성영화관에서 오르간 연주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대학시절

칸은 비록 가난하고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1920년 가을, 이른바 아이비리그로 불리는 미국 동부 명문 대학중의 하나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여 건축 공부를 시작합니다. 칸이 대학교육을 받던 1920년대는 유럽에서 근대 건축 운동이 태동기를 지나 막 발전하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19세기 말 유럽 건축을 이끌었던 절충주의나 신고전주의 양식이 완전히 힘을 잃은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물며 문화의 중심지인 유럽에 비하여 마치 변방과도 같았던 미국에서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같은 일부 건축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메리칸 보자르 양식이라 불리는 신고전주의 양식에 매몰되었습니다. 근대 건축 운동의 중심지인 유럽에서도 1919년 바우하우스가 개교하여 근대적 교육을 시작할 때까지 신고전주의 양식에 근거한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미국 건축 대학이 모두 그러했듯이 펜실베이니아 대학이 보자르식 교육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학에서 칸은 이후 자신의 건축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는 스승 폴 크레를 만납니다. 프랑스인으로서 에콜 데 보자르 출신인 크레는 근대 건축의 원리가 아니라 신고전주의 양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당시에는 유럽의 건축이 향후 세계 건축을 주도할 근대 건축으로 나아가고 있던 반면, 미국의 건축교육은 여전히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컨이 받은 건축교육은 전형적인 에콜 데 보자르 식 교육으로서 정형화된 방법과 과정을 통한 설계 방법론과 비례, 대칭등 고전 건축의 원리를 중시했습니다. 따라서 칸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서 비로서 근대 건추축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대학 시절의 교육 내용을 의도적으로 외면할 정도로 근대 건축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특히 근대 건축의 특징 중 하나인 사회에 대한 건축의 역할 에 큰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그렇지만 애써 외면하였던 보자르 식 설계 방법은 아이러니 하게도 이후 칸이 자신만의 건축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스승이었던 크레는 건축의 전체 역사를 통하여 불변하는 건축의 본질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자연스럽게 고대 기념비적 건축물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이러한 점에서 건축의 본질 그리고 기념비적 건축의 가치에 대한 칸의 생각은 그의 대학 시절 스승인 크레의 생각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겠다. 대학 시절 칸의 학업 성적은 우수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최고는 아니었으며, 설계역시 좋은 성적을 받기는 했으나 자신의 동기 중 최우수 학생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사무소 시절, 대공황 그리고 전쟁

1924년에 대학을 졸업한 칸은 여러 사무소에서 실무 수련을 쌓습니다. 이때 그가 맡은 주된 역할은 제도사로서 도면을 그리는 작업이었다. 3년간의 수련 기간을 통해 모은 돈으로 칸은 당시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대 건축의 흐름을 접하기는 하였지만 주로 그리스나 이탈리아 같은 고전 건추겡 대한 답사가 중심이었습니다. 당시 칸의 스케치는 방문했던 여행지의 건물이 무엇이었는지 잘 보여 줍니다. 물론 독일과 같이 당시 근대 건축이 활발했던 곳을 방문했고, 르 코르 뷔지에의 사무실에서 일하던 대학 동기 노만 라이스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적어도 이 시기까지 칸은 근대 건추그이 영향력에 대해서 크게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유럽여행 이후 칸의 사무소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미 1920년대 중반부터 불경기 조짐을 보였던 미국 경제는 1920년대 말 본격적으로 대공황에 들어섭니다. 유럽여행을 마친 1929년, 칸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폴 크레의 사무소에 취직하였으나 이곳 역시 사저잉 어려워 입사 1년 4개월 만에 1930년 자진 퇴사하였고, 그 이후로는 퇴사 한달전 결혼한 아내 처가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후 수년간 취업과 실업을 번갈아 하는 신세가 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칸은 비슷한 처지의 젋은 건축가 30여 명과 건축연구회를 결성하여 공부와 연구를 병행하였습니다. 이곳의활동을 주도하면서 칸은 근대 건축운동을 수용하게 되었고 이를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였습니다. 때 마침 루스벨트 대통령이 공황 타개책으로 주도한 공공 주거 프로젝트가 필라델피아 싱에서도 시작되었고, 칸은 정부의 공공 건축가 고용 프로그램에 따라 몇 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할수 있었습니다. 특히 1937년에는 미 연방 주택청이 신설되어 주도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건축가로서의 명성을 얻는다. 그러다 미국이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칸은 제한 종류의 프로젝트만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칸은 1940년대에 미국 계획가 및 건축가 협회의 창설을 주도하였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도시계획 관련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칸이 수행한 주거 프로젝트는 대부분 파트너인 스토노로프에 의해 수주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몇 가지 사건이 불거져 불화가 발생하자 1947년 스토노로프와 결별하고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 독립이 계기가 되어 칸의 작업에서 대규모 주거 프로제트는 사라졌고 대신 단독주택 프로젝트만 남아 있었습니다. 칸은 이 기간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 더 중요하게는 1940년대 중방에서 1950년대 초 까지 작업과 삶 양 측면모두에서 칸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앤 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건축이야기 > 세계의 건축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스 반 데어로에  (0) 2017.03.06
안도 다다오  (0) 2017.03.06
오토 바그너  (0) 2017.03.06
안토니 가우디  (0) 2017.03.06
발터 그로피우스  (0) 2017.03.06




































1841년 비엔나(Vienna)의 교외 펜징(Penzing)에서 출생.
1857년 빈 공과대학(Vienna University of Technology) 입학.
1860년 베를린 왕립건축학교(Berlin Bauakademie) 입학.
1861~1863년 빈 조형예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 Vienna)의 건축과에서 수학.
1863년 독립하여 건축가로서 활동 개시. 요제피네 돔하르트(Josefine Domhart)와 결혼.
1873년 테오필 한센(Theophil Hansen)과의 협동 작업으로 ‘그라벤호프(Grabenhof)’ 설계.
1880년 요제피네와 이혼. 어머니(Susanne Wagner) 사망.
1886~1888년 자신의 주택 ‘바그너 빌라(Villa WagnerⅠ)’ 건축.
1888~1889년 ‘링케 빈차일레(Linke Wienzeile) 아파트’ 건축.
1890년 비엔나 신도시 계획에 대한 의뢰를 받아 만든 작품으로 명성을 얻음.
1894~1897년 비엔나 시내 전차와 도시 철도망 작업(Viennese Stadtbahn, metropolitan railway system). 빈 조형예술 아카데미 건축학과 교수로 임용.
1894~1898년 요셉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가 그의 조수로 일함. 카를 광장 역사(Karlsplatz Stadtbahn Station) 건축.
1896년 『근대 건축 Moderne Architektur(Modern Architecture)』선언서 출간.
1898~1899년 마조리카 하우스(Majolika Haus) 건축.
1899년 ‘빈 황실 역사’ 건축. 빈 분리파 운동(Wiener Sezession)에 합류. 비엔나 제체시온 홀(Sezessionhaus/Secession Building)에서 첫 번째 제체시온 전시회를 가짐.
1902년 ‘<디 차이트>지(誌) 배달 사무실’ 건축.
1904~1906년 ‘비엔나 우체국 저축은행(Postalparkasse)’ 건축.
1905년 클림트(Gustav Klimt), 호프만(Joseph Hoffmann) 등 그 밖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분리파 운동에서 탈퇴.
1905~1907년 ‘스타인호프 교회(Kirche am Steinhof)’ 건축.
1906~1907년 비엔나 ‘슈첸 하우스(Schutzenhaus)’ 건축.
1909~1913년 비엔나 ‘베르크가 쇼룸’, ‘노이에스티프트 거리의 스튜디오’ 등 건축.
1910~1913년 결핵 환자를 위한 ‘요양원’ 건축.
1912-1913년 바그너 빌라Ⅱ(Villa Wagner II) 건축.
1918년 4월 11일 비엔나(Vienna)에서 작고.

- 아르누보 건축(Art Nouveau architecture)의 대가 ‘오토 바그너’ -
오토 바그너는 1841년 7월 13일 비엔나(Vienna)의 교외 펜징(Penzing)에서 태어났다. 부유 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5살에 아버지(Notary R. Wagner)를 여의고, 홀어머니(Susanne Wagner)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자녀교육에 대단히 열성적이서 바그너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졸업하기 2년 전부터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특별히 개별지도를 받도록 할 정도였다.
바그너는 1857년에 빈 공과대학(Vienna University of Technology)에 입학해 수학했다.
바그너가 빈 공과대학에 입학한 1857년도는 오스트리아 황제가 성벽 철거를 명령했던 해로, 비엔나에서 건축의 붐이 일기 시작한 해였다. 당시 무기 제조술의 발달로 인하여 도시 성벽의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바그너는 다시 1860년에 당시 문화의 중심지인 베를린으로 가서 왕립건축학교(Berlin Bauakademie)에서 공부하였다. 이 대학은 독일 고전주의 건축의 거장인 쉰켈(Schinkel:1781-1841)이 직접 강의하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바그너는 이곳에서 고전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의 초기 작품에서 이러한 고전주의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바그너는 왕립 건축학교에서의 수학 후에 비엔나로 돌아와 1861년에 빈 조형예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 Vienna)에 입학하여 비엔나 오페라 하우스(Vienna Opera House, 1861-69)를 디자인한 지카르스부르그(August von Sicardsburg) 교수와 뉠(Eduard van der Null) 교수 밑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당시에 비엔나에서는 온통 온 도시가 공사장처럼 건설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황제의 명령으로 성벽을 철거한 자리에 비엔나를 둘러싼 환상도로 링스트라세(Ringstrasse) 건설 공사가 1861년부터 5년간 계속되었고, 도로변에는 새로운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에 바그너는 푀스트(Ludwig Von Forster) 스튜디오에 합류하여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때부터 전 유럽 대륙에서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유럽을 지배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Habsburg家)는 독일 프로이센(Preussen)을 지배하고 있던 빌헬름 1세(Wilhelm I)의 ‘통일 독일’의 정책에 밀리고 있었다.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를 수상으로 내세워 강력한 통일정책을 추진했고 철혈(鐵血)정책의 일환으로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여 3번의 전쟁을 통해서 그 목적을 이루었다.
바그너는 이런 전쟁의 와중인 1868년 큰 충격을 받게 된다. 하나는 그의 은사인 뉠 교수의 자살이었고, 또 하나는 지카르스브르그 교수의 죽음이었다. 그것도 오페라하우스가 완성된 후의 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다.
비록 오스트리아 전쟁에는 패배했지만, 유럽 국가 간에 평화가 찾아오고 비엔나에서 건설 붐이 일어남에 따라 바그너는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55세가 되는 1894년 바그너는 자신의 모교인 빈 조형예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 Vienna)에 교수로 부임하면서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전기(轉機)를 맞게 된다.
첫째로 바그너는 대학교수로 부임한 지 얼마가 지나지 않아『근대 건축 Moderne Architektur(Modern Architecture)』을 처음으로 출판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예술의 유일한 지배자는 필요다’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작품 경향도 서서히 변해갔고, 이것이 앞으로 작품 활동에 있어서 목표가 되었다.
둘째는 그가 대학교수로 재임함으로 인하여 제자와 조수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과는 단순한 제자와 조수가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동지로서의 끈끈한 관계를 맺게 되고 소위 ‘비엔나 학파(Vienna school)’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왜 우리들은 항상 다른 시대의 양식을 좇아서 건축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왜 우리들 시대에 맞는 우리들의 양식을 발견하려고 하지 않는가”라고 한 쉰켈(Karl Friedrich Schinkel)의 말처럼 기존의 관념적 전통에 반항하고 저항하여 새로움에 도전하는 일군(一群)의 무리를 형성하게 된다.
이 그룹들이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요셉 올브리히(Joseph Olblich), 아돌프 로스(Adolf loos), 요셉 호프만(Joseph Hoffmann)들이다. 이들은 대학에 반기를 들고, 분리파 운동, 즉 ‘제체시온(Sezession) 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바그너도 이 운동의 정식 멤버가 되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 경향은 초기의 역사주의 양식인 고전주의, 신 르네상스 양식에서 벗어나 간결한 양식으로 바뀌어져 갔고, 건축 재료의 선택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콘크리트에 철근을 집어넣는 것은 사실 1830년대부터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조셉 모니에가 최초로 개발하여 특허를 받은 때는 1850년대였다. 벨기에인 에느빅과 미국의 랜섬은 이 시공방법을 건축시공에 적용한 대표적인 엔지니어이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은 이러한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1904년에 마틴 하우스(D. D. Martin House)와 라킨 빌딩(Larkin Building)에서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구조를 바닥판과 보에 사용하였고, 바그너도 1906년 비엔나 우체국 건물(Postalparkasse, 1904-06)에 처음으로 콘크리트 바닥판을 사용하였다.
셋째, 바그너는 아카데미에 교수로 취임한 후 바로 2가지의 큰 프로젝트를 위촉받았다.
하나는 비엔나시의 40㎞에 지하철을 위한 36개의 지하철 역사, 플랫폼과 계단을 설계하는 것(Viennese Stadtbahn, metropolitan railway system, 1894-1902)이고, 다른 하나는 도나우 강 운하(Danube Canal)를 위한 갑문 시설(Schutzenhaus, 1906-07)의 설계였다.
특히 쉔브룬(Schonbrun)궁 앞 호프파빌리온(Hofpavillion, 1894-98)카를 광장 역사(Karlsplatz Stadtbahn Station, 1894-98)는 가장 유명한 것으로 전자는 황제를 위하여 특별히 설계된 것이며, 후자는 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폐허로 남아있던 것을 1977년에 말끔히 보수하여 현재는 박물관과 카페로 사용하고 있다.

바그너는 해가 거듭할수록 작품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는데, 첫 번째가 일명 마조리카 하우스(Majolika Haus, 1898-99)라고 불리우는 빈차일레(Wienzeile) 거리에 세워진 아파트다. 이 건물은 전형적인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으로 건물 외벽에 아름다운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두 번째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비엔나 우체국(Postalparkasse, 1904-06) 건물이다. 이것은 현상설계에 의하여 당선된 것으로 바그너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기록될 만큼 근대적이고 신성한 것이었다.
세 번째는 성 레오폴드 교회(Church of St. Leopold, 1903-07)이다. 이것은 스타인호프(Steinhof) 요양소 내에 지어졌기 때문에 일명 스타인호프 교회(Kirche am Steinhof)라고도 불리어지는데, 정신병자 요양소 내의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지어졌다.
바그너는 71세에 교수직에서 은퇴한 후 바그너 빌라Ⅱ(Villa Wagner II, 1912-13)를 설계하게 된다.
그리고 3번에 걸쳐 작품집을 발간하였다. 마지막 작품집을 발간한 해인 1914년 그 동안 유지되어 오던 평화는 깨지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구라파는 다시 혼란과 파괴가 뒤따르게 되었다.
바그너는 전쟁의 와중에서 종전을 보지 못한 채 1918년 4월 11일 향년 71세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바그너가 눈을 감기 두 달 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가 1918년 2월 6일 사망하였고, 같은 해 10월 18일에 콜로만 모제르(Koloman Moser), 10월 31일 에곤 쉴러(Egon Schiele)가 차례로 사망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재능 있는 예술가들은 바그너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차례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남겨놓은 아름다운 발자취만을 돌아볼 수 있을 뿐이다.

- 현대 건축의 선구자 ‘오토 바그너’ -
오토 바그너는 선구적 건축가일 뿐만 아니라, 교육자였으며 빈 지식사회의 리더이자 비엔나 현대화 계획의 주역이었다.
1894년 바그너가 당시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 없던 비엔나 조형예술 아카데미 교수가 되면서 쓴『근대 건축 Moderne Architektur(Modern Architecture)』이라는 책은 수개국어로 번역되면서 신건축운동의 교과서가 되었다.
바그너는 “예술가는 대중이 즐기는 것보다 대중이 즐기고 싶어 하는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괴테의 말에 동의하면서, 문외한일 수밖에 없는 국가의 역할을 질타하고, “예술 창작에 대한 우리의 출발점은 근대 생활 속에서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건축가로서 세계적 걸작을 연이어 발표하고 비엔나 교외를 둘러싸고 있는 고가철도와 지하철도망 노선상의 정차장을 포함한 모든 부분을 설계했다.

백년 전 비엔나는 세계 문명의 중심에 선 도시의 하나였다. 문명 중심의 도시에서는 모든 분야의 지식인들이 집합하고 교감한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Ludwig Josef Johann), 프로이트(Freud, Sigmund), 구스타프 말러(Mahler, Gustav) 등 현대 문명 개화기의 천재들이 비엔나에서 동시대에 활동하고 있었다.
비엔나의 지식인 사회는 19세기 말 문명의 지적 실리콘밸리 같은 곳이었다. 그 중심에 바그너가 있었다. 상류사회에서 성장한 바그너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 안주하기보다 신(新)문명의 전사로서 새로운 건축의 도래를 위한 선구자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현대 문명이 인류의 새로운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현대 건축과 도시 계획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옛 문명의 위대한 성과를 잊지 않았다. 과거의 위대함을 되살리고 과거의 모순을 초극하는 새로운 건축과 도시에 대한 그의 열정이 건축가로서 도시 계획가로서 교육자로서 저술가로서 그의 일생을 이끌어간 힘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은 피렌체(Firenze) 르네상스 형식의 아파트블록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는 오랫동안 기득권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 그가 기득권을 포기하고 비엔나의 개혁을 주장했다.
그가 명성을 크게 떨친 것은 1890년 비엔나의 신도시 계획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그가 꿈꾸던 링스트라세(Ringstrasse)를 중심으로 한 위대한 비엔나 건설의 청사진은 실현되지 않았고 그 계획의 일부인 도시철도 네트워크만 실현되었다.
이때의 철도 관련 프로젝트 중 건축사에 영원히 남은 유명한 프로젝트가 카를 광장 역사(Karlsplatz Stadtbahn Station, 1894-98)이다.
이 건물은 현대 건축의 공법과 기능 형식을 갖추었으나 제체시온(Sezession: 분리파) 스타일의 장식적 모티브가 함께한 절충적 현대 건축으로,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건축이었다.

그의 건축적 삶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사건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의 자리에 오른 그가 젊은 건축가인 요셉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나 요셉 호프만(Joseph Hoffmann)에 자극받아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 일이다. 그때 그는 “건축가는 오십부터 시작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때 만든 링케 빈차일레(Linke Wienzeile)의 아파트(1888-89)는 고전형식에 매어 있던 그의 초기 작품과 다른 창조적 진화를 보인 작품이다.
바로 이어 도시의 삼각형 대지에 세운 비엔나 우체국 저축은행(Postalparkasse, 1904-06) 건물은 그의 이름을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만든다.
빈 우체국 저축은행은 1904년에 시작해 1906년에 완성된 가장 완숙한 바그너의 걸작이다. 이 건물은 건축의 모든 부분이 그의 의도대로 디자인된 20세기 건축의 최고 걸작 중 하나다.
빈 우체국 저축은행이 문을 열었을 때 당시 빈 사람들이 “드디어 빈은 현대 건축의 위대한 걸작을 갖게 되었다”라고 하던 그 말이 백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한 울림을 갖는다.

바그너는 20세기 현대 건축의 문을 연 선구자이면서 동시대 지식인들의 리더였으며, 현대 문명을 맞은 역사 도시 빈의 성공적 현대 도시화의 마스터플랜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빈을 누구보다 깊이 알고, 누구보다 더한 열정을 가지고서 이 도시가 가진 과거의 영광과 미래의 비전을 자신의 건축 작품과 도시 계획안을 통해 보여준 위대한 빈의 영웅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료와 후배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면서, 또한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열린 사람이었다.
20세기의 빈을 바그너 없이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는 빈의 건축가로서, 도시 계획가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위대한 인간이었다.
세계적 건축가는 그가 속한 도시의 역사와 지리와 사회의 소명을 자신의 사명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바그너는 그의 생애를 통해 보여주었다.

'건축이야기 > 세계의 건축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도 다다오  (0) 2017.03.06
루이스 칸  (0) 2017.03.06
안토니 가우디  (0) 2017.03.06
발터 그로피우스  (0) 2017.03.06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0) 2017.03.05





























1852년 에스파냐(Espana) 남부 카탈루냐(Catalunya)에서 출생.
1863년 레우스 중등학교 입학.
1867년 어린이 잡지 El Arteguia 디자인.
1869년 바르셀로나 대학의 건축학과 예비과정 입학.
1871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 입학.
1872년 물탱크와 공동묘지 정문에 관한 학생프로젝트 참여.
1876년 시청사 직원과 레알 부두 건축 참가. 바르셀로나 종합병원, 대학강당 건축에 학부시절 마지막으로 참여. 건축사로 첫발을 내디딤. 모친사망.
1878년 건축사 자격 취득.
1879년 시인 비센떼 가르시아(Vicente garcia)에 기마대 디자인을 바침. 누이 사망. 조카 로시따 에헤야 입양.
1800년 호셉 세라 말레라 알레나와 함께 바르셀로나 해안도로 가로등 합작 프로젝트 추진.
1881년 그의 유일한 기고문을 La Renaixensa에 기고.
1882년 공업기술자인 Juan Martorell Montellas와 공동작업.
1883년 성가족 성당의 작품 방향 설정. 후안 마누엘 비센스 문따네르 저택 건설(1883-1888). 산딴데스 까미야스의 엘 카프리쵸 저택 건립.
1885년 성가족 성당 첫 프로젝트.
1886년 구엘 궁전, 북 람블라스 거리(1886-1888).
1887년 칼벳 저택(1898-1899).
1899년 베예스구아드트 탑 건립. 구엘공원 건설(1900-1914).
1904년 그라네르 살라 메르세 저택. 호세 바뜨요 저택(1904-1906).
1905년 아르띠가스 정원.
1906년 밀라 저택(1906-1911). 구엘공원 내의 저택 입주.
1907년 Jaime L. 하이메 기념비.
1910년 파리의 Grand paris에서 전시회 개최.
1911년 열병을 앓음.
1925년 성가족 성당 종각 완성.
1926년 6월 7일 Sagrada Familia 성당 앞에서 전차 사고. 6월 10일 산따 쿠르즈(Santa Cruzu) 병원에서 사망.
-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
본명이 안토니 가우디 이 코르네트(Antoni Gaud i Cornet)인 그는 정열의 나라 스페인이 낳은 20세기 최고의 건축가이다.
가우디는 1852년 6월 25일 에스파냐(Espana) 남부 카탈루냐(Catalunya)의 레우스(Reus)에서 구리세공업을 하는 부친 프란시스코 가우디 세라(Francisco Gaudi Serra)와 안또니아 꼬르넷 베르뜨란(Antonia Cornet Bertran)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가깝게 놀이하며 지낼만한 친구도 없었으며, 마땅한 놀이기구도 없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연스럽게 모든 자연이 친구이자 놀이기구가 되었다. 가우디의 생가는 도시에서 좀 떨어진 시골이었다. 그곳은 지중해 연안으로 자연환경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우며 경이롭기까지 한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자연과 벗이 되었으며 자연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다.
그가 자연에 대해 놀라우리만큼 뛰어난 관찰력을 갖게 된 것은 이때 형성된 것이다. 그는 자연의 모든 것을 존중하며 이해했다. 하늘과 구름, 물과 바람, 나무와 식물, 동물과 곤충, 산과 바위 등 여러 가지를 보며 이를 통해서 건축언어에 접목해 갔다. 특히 가우디는 몬세랏(Montserrat)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며 그 산을 매우 좋아했다.
또한 가우디는 레우스 지방에서 대장간을 운영하는 삼촌에게로 가서 대장간 일을 어린시절에 배웠다. 여기서 가우디는 철을 불에 넣고 꺼내 망치로 두들겨서 철을 단련시키는 단철과정은 물론이거니와 주조술과 석고로 본을 뜨는 방법까지 배우게 된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 있는 에우달도 푼트(Eudaldo Punt)에서 건축설계와 시공에 관한 실무적인 일들을 수확한다. 그는 이곳에서 건축자재의 특성들도 함께 배웠으며 이것이 후에 가우디가 맡은 일들을 수행하는데 있어 필요한 목수, 주철공 등 건축 관련 인부들과의 관계설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가우디는 한번 인연을 맺은 기술자들과는 끝까지 함께 일을 했으며, 그들이 나이가 들어 일을 못할 시에는 그 자제(도제제도에 의한 전수자)들과 일을 함께 했다. 따라서 모든 작업을 하는데 그들도 가우디의 감각과 뜻을 이해했고, 가우디는 작업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가 있었다. 지금으로 보면 거래선을 한번도 바꾼 적이 없었던 것이다.

가우디는 17세 때부터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바르셀로나의 건축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학창시절에 비라르와 폰트스레 등의 조수로서 설계활동에 종사하였다.
1878년 학교 졸업 후부터는 독자적으로 일을 시작,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많은 독창적인 건축을 남겼다. 밀가루 반죽으로 빚어 놓은 듯 구불구불한 6층 아파트 '카사 밀라', 기묘하고 아름다운 창문장식이 보는 이를 매혹시키는 '카사 바트요', 환상적인 돌조각과 타일장식이 공원 전체를 구불구불 덮고 있는 '구엘 공원' 등의 걸작을 남겼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남긴 대표작 중의 대표작은 신이 머물 지상의 유일한 공간이라 말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聖가족) 교회'이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네 개의 탑과 생동감 넘치는 우아한 조각으로 장식된 이 교회는 착공한 지 115년이 지났고 완성되려면 앞으로도 200년이 더 걸린다고 한다.

세상이 가우디를 처음 주목하게 된 것은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가우디가 출품한 독특한 디자인의 진열장이 사람들 눈을 사로잡으면서 부터였다. 그의 천재성을 일찌감치 발견한 에우세비 구엘은 최대의 스폰서가 된다.
가우디는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피카소보다 더 영웅으로 추앙하는 인물이지만, 생전의 그는 국가에 헌신적인 타입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들어 도시에 구현한 건축가이고 예술가였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다.
1883년 31살 때 그 유명한 성가족(Sagrada Familia) 성당 공사의 총감독에 취임하게 된다. 이후, 생의 만년에 기독교도로 살면서 성당에서 먹고 자며 일에 빠져 살았다. 가끔 시내로 나갈 때면 그의 부랑자 같은 행색 때문에 행인들이 푼돈을 적선해 줬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죽음도 비범했다. 1926년 6월 10일 그의 일터인 성가족 성당 바로 앞길에서 전차에 받혀 생을 마감했다. 느리디 느린 전차에 받힌 그의 마지막 순간은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며 길을 걷는 노대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사고 현장엔 <가우디 등>이 지금도 불을 밝히고 있다. 죽은 뒤 가우디를 다룬 스페인 영화가 6편 나왔으며, 그를 다룬 언론보도가 3,000여 회가 넘는다.

- 자연을 사랑한 건축가 ‘가우디’ -
가우디를 이해하려면 건축분야에만 국한하여 평가해서는 안된다. 즉, 건축사가들은 건축사에 입각하여 다른 건축물과 그의 건축물을 동시대적 관점에서 일직선상으로 동일시하며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어느 스승에게 사사 받은 일도 없고, 특정집단에서 일을 한 적도 없으며, 가족 중에 누구도 건축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작품은 어느 시대의 건축양식 및 특정분야로 분류하는 데는 난해한 부분이 많다. 그의 작품은 그 시대의 양식과 형식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무런 편견 없이 사물을 관찰하고 이를 작품화하는 능력을 그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소박했다. 그러나 대단히 명석했다. 가우디와 수년간 작업을 함께한 화가 후안 무네(Juan Munn)의 말에 의하면 "가우디는 확고하고 명석한 생각의 소유자"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가우디의 작품을 살펴보면 선은 곧은 것이 없으며, 입면은 들쑥날쑥 하고, 바로크양식으로 보이는 외관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으나 불합리한 점이 더 많다. 이로 인해 그의 정신상태가 좀 괴팍한 면과 마음이 뒤틀려 있지 않았나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판단이다. 이 시대의 건축가는 논리성을 갖는 미학과 추상화적인 과정을 거쳐 설계를 하며, 보조적인 수단으로 자와 콤파스를 사용했다. 건축자재를 자르거나 형태를 만들 때에도 이를 활용하여 2차원의 평면과 직선, 원과 다면체에서 5각형의 12면체인 3차원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가우디의 작품은 기하학적인 형태에 얽매이기 보다는 자연적이며, 변형이 많고, 쉽게 인지되지 않는 곡선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플라톤이 주장하고 이론화 한 제5의 원과 같은 형태로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가우디의 작품은 이론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형태이다. 이는 처음부터 기하학을 사용했다면 아주 단순한 기하학을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통제기하학(regulated geometry)을 응용하여 많은 부분 사용하였다. 가우디의 작품을 여러 건축가가 응용하여 모방하려고 했으나, 가우디의 작품과 같은 건축물이 완공된 것이 지금까지 없는 것으로 보아, 그가 설계한 건축물들은 가우디의 상상력이 어떠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가우디는 말한다. "건축가는 균형에 대한 타고 난 감각이 있어야 한다. 건축가는 건물의 형태를 디자인하고, 그것을 구조전문가(구조기술사)에게 구조에 대한 수학적 안전성을 검토 받는다. 그 후 구조전문가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건축가로서의 자질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전문가가 이상이 있다고 한다면 건축에서 손을 떼는 것이 현명하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자신에 대하여 엄격한 면이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la, 성가족 성당)의 종루는 포물선이면서 젖은 모래를 떨어뜨릴 때 나타나는 형태이다. 이를 시행할 때 가우디는 '중력의 법칙'을 엄격히 따랐다. 가우디는 설계도보다는 모형을 중요시 했다. 그 모형을 만들기 전 그는 실을 천장에 매달고 탑부분과 전체적인 모습을 모래 주머니 혹은 납을 중간 중간에 매달아 그 휨의 강도를 측정해 나갔다. 그리고 최상의 곡선과 아름다움이 나오면 이를 스케치했다. 여러 번에 걸친 반복 스케치와 모형작업을 했다. 그런 다음 건물의 형태와 구조를 결정하였다. 이렇게 한 건축구조형태에 대해 가우디는 자기 자신 스스로가 구조 계산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현대의 첨단 장비를 동원한 구조계산에서도 오류가 발견된 것은 없다. 그가 말하는 것은 완벽한 균형감각이다. 가우디의 건축형태는 그 누구도 상상도 못할 상황에서 만들어 졌으며, 가히 독창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그가 말했듯이 "자연에서 태어나고 자연이 베풀어 주는 매우 균형적인 자연적 구조"인 것이다.

가우디는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나 큰 동물에서는 얻은 것은 별로 없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용의 형상이 있으나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상에서 나왔다. 그는 아주 조그마한 곤충(파리, 모기, 들벌레 따위)과 들에 많이 나는 잡초와 나무, 잎 등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또한 동양의 미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형태를 표현해 나갔다. 가우디의 건물구성을 보면 동물의 뼈, 야자수, 곤충, 사람의 해골 등의 모습이 자주 사용됐다. 그는 나무의 줄기와 해골만큼 아름답고 완벽한 구조는 없다고 할 정도였다. 아무리 아름다운 돔이라고 할지라도 해골의 내부에 비할 수 없으며, 산이 가지고 있는 완벽한 안정성에 어떠한 건물도 따라 갈 수 없다고 가우디는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건축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가능성을 추구한다면 미를 잃게 될 것이다. 또한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면 미학, 예술 이론 또는 철학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렇게 추상적인 이론들은 나에게는 사치이며 관심도 없는 분야이다."
가우디는 일찍이 바그너가 주창했던 종합예술론과 '자연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괴테의 자연론에 영향을 받아, 스페인 고유의 고딕 양식과 이슬람 양식(무데하르 Mudejar) 양식을 재창조하여 대담하고 환상적인 건축양식을 완성했다. 피카소, 미로, 카잘스 등 동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들도 바르셀로나 곳곳에 있는 가우디의 건축물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가우디는 건축을 자연의 여러 가지 형상을 기초로 하여 구조·형태·기능·상징의 종합으로서 제시한 위대한 건축가였다. 전형적인 그의 건축은 모든 면에서 곡선이 지배적이며, 벽과 천장이 굴곡을 이루고 섬세한 장식과 색채가 넘쳐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따라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에 걸쳐 유럽을 풍미하였던 아르누보(art nouveau)의 에스파냐판(版)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1890년대를 경계로 하여 2기로 나눌 수가 있다.
전반기의 작품은 건축 그 자체의 몸체는 비교적 중후하며 극단적인 변형은 보이지 않으나 세부의 장식에는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특히 철을 사용한 곡선적인 장식은 피레네 북쪽의 아르누보의 장식과 대응관계에 있다.
그러나 가우디의 진가는 어디까지나 후반기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그의 건축장식에서 보였던 미로(迷路)와 같은 구불구불한 공간(空間)의 이미지가 전체의 건축디자인으로 확장되어, 계획부터 구조의 형태 및 세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디자인을 지배하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에는 코로니아 구엘교회의 제실(祭室:1898∼1914), 구엘공원(1900∼1914)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그의 중요한 후원자였던 구엘백작을 위한 것이었다.
주택건축으로 독특한 형태와 내부공간을 지닌 카사 바트요(1907년 완성)와 카사 밀라(1907년 완성), 1884년에 착수하여 결국 필생의 대작이 된 사그라다 파밀리아교회의 익랑(翼廊)의 정면(正面, 1908년 완성) 및 탑·조각(1903∼1926) 등은 가우디 건축의 가장 극적인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그의 건축은 아르누보의 유행을 초월하여 근대에 살았던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을 건축으로 표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이야기 > 세계의 건축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도 다다오  (0) 2017.03.06
루이스 칸  (0) 2017.03.06
오토 바그너  (0) 2017.03.06
발터 그로피우스  (0) 2017.03.06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0) 2017.03.05























1883년 베를린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출생.
1903-1907년 뮌헨 공과대학, 베를린 샤를로렌 부르크 공과대학에서 건축 수학.
1907-1910년 피터 베렌스 설계사무소에서 르 꼬르뷔제, 미스 반 데어로에와 함께 근무.
1911년 독일공작연맹에 참여하여 부재의 부품화와 현장조립 주장. 파구스 제화 공장 (Fagus shoe factory)
1915년 바이마르에 소재한 '작센 대공 공예학교'와 '작센 대공 건축전문학교' 교장에 임명.
1919년 위 두 학교를 '바우하우스 바이마르'로 통합, 1925년까지 교장 역임.
1925-1928년 바우하우스를 데사우로 옮기고 교장 역임.
1926년 데사우 바우하우스 교사 및 교사용 주거.
1933년 나치 정권 때문에 영국으로 이주.
1937년 하버드대학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하버드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역임.
1946년 하버드 제자 6인과 함께 건축가 협동단체인 TAC(The Architect`s Collaborative)를 설립.
1950년 하버드대학원 센타(Harvard Graduate Center, at Cambridge, Massachusetts), 아테네 미국대사관
1952년 하버드대학 은퇴.
1956년 영국 왕립건축학회(RIBA) 골드메달 수상. 미국 건축가협회(AIA) 골드메달 수상.
1969년 메사추세스주 보스턴에서 사망.

- 현대건축의 선구자, 발터 그로피우스 -
발터 그로피우스는 1883년 5월 18일 독일의 베를린에서 공직에 몸담고 있던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삼촌인 M.그로피우스는 건축가로서도 그 명성을 얻고 있었고, 베를린 소재 미술공예학교의 교장과 프러시아의 미술 교육감을 역임하였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유명한 바우하우스(Bauhaus)의 창시자이며, 건축학 교수이자 수많은 작품을 발표한 건축가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을 국제 건축을 육성하는데 보내면서 세 가지 서로 다른 역할 - 물론, 서로 관련 있는 분야이기는 하지만 - 즉, 건축가, 교육자, 비평가로 일했다.
1901년 샤로텐부르크와 뮤니히에서 처음으로 건축교육을 받았으며, 러스킨(I.Ruskin)과 모리스(W.Morris)의 영향을 받았다. 1911년에 설계한 파구스 제화공장(Fagus Werke)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벽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우수와 추위, 그리고 소음을 배제하기 위해 가구의 직립주 사이에 친 스크린으로 벽을 대신하였다.

그의 활동은 4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근대적인 구조로서의 건축의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추구한 시기, 즉 1907년 P.베렌스의 사무소에 들어가 10년 동안 근무한 후 독립하면서 파구스구두공장(1911) · 독일공작연맹(DWB) 박람회의 공장 및 사무소(1914)를 설계하였다. 특히 유리로 만든 커튼 월의 대담한 사용법이 주목을 끌었다.

제2기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9~1928년에 이르는 바우하우스의 교장시절이었다.
유능한 디자이너를 많이 육성할 목적으로 바이마르(Weimar)에서 출발하여 1925년 데사우로 이전(바우하우스 신교사는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하였으며, 근대 디자인운동 메이커로서의 디자인 교육의 기초자세를 세계에 과시하였다.
제 1차 대전 중에는 기병대로 종군하였고, 이때 그는 "예술노동 평의회", "11월 그룹", "유리의 사슬" 등 수많은 좌익계 미술가들의 조직에 관여하게 되었으며 일시적으로 표현주의 관련을 맺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19년 바이마르 시의 초청을 받으며, 공예학교와 미술학교를 합병하여 국립 바이마르 바우하우스를 창설하고 이 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어 새로운 조형 교육을 실천하였다.

제3기는 바우하우스의 교장을 사임하고, 1928∼1934년까지 도시문제, 특히 집단주거 건축의 실제적인 해결을 모색하였다. 판자 모양의 고층아파트의 제안이나, 베를린 및 카를스루에(Karlsruhe)에서의 주택단지 건설에 참가하였다.

제4기는 나치스의 대두로 독일을 떠나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한 시절인데, 영국에서는 M.플라이와 협동하여 몇 개의 건축을 이룩하고, 1937년에 도미하여 하버드대학 건축과 대학원 교수로 많은 건축가를 육성하였다.
그의 생애는 바로 계몽가로서의 기본노선을 따라 전개되었으며, 미정리 부분을 재빨리 찾아내어 정확한 해결을 제시하고 실제로 창조해보이는 능력이 뛰어났다.

- 발터 그로피우스와 바우하우스 -
"왜 오늘날의 스타일을 옛날로부터 빌어오는가? 모든 물건의 겉모습은, 그것이 등잔이건 의자건 건물이건 간에 쓰임새에 알맞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건축가나 디자이너는 지금이라도 속임수와 꾸밈을 버려라. 재료의 특성을 정직하게 살리고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 있는 미술·건축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의 교장이 되었다. 취임식 날 그가 한 이 말은 20세기 건축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바우하우스 이전의 건물 생김새를 보면 거의 모두가 로마 궁전이나 고딕식 대성당 같은 아름답고 웅장한 것들과 어딘지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아주 세세한 곳까지도 오밀조밀하게 꾸며 아름답기는 했지만 이것들은 쓸모보다 눈요기감이었다.
요즘도 음악당이나 교회 · 미술관 같이 예술성 있는 건물들은 예쁜 모양으로 짓는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이런 곳에서 살 수는 없다. 지금 우리가 사는 튼튼하고 값싸며 편리한 집, 꾸밈새가 적고 단출한 현대식 건축이 맨 처음 태어난 곳이 바로 바우하우스였다.

아름다움과 쓸모가 제대로 어울린 것만이 참된 디자인이라고 생각한 그로피우스에게 보기에만 좋은 것이 한심하게 느껴졌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정말로 쓰임새 있는 건물을 지을 수 있게끔 하겠다고 굳게 마음 억었다.
그의 생각은 열매를 맺었다. 그로피우스라는 사람을 말하며 바우하우스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바우하우스는 그로피우스의 뜻과 꿈이 펼쳐진 곳이며, 바우하우스가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그로피우스의 고집과 끈기 덕분이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는 본디 두 개로 나뉘어져 있던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합한 것이다. 낮은 신분으로 인식되어지는 직공과 고귀한 예술가의 구분을 없애려는 뜻에서였다.
그로피우스는 그림을 그리고 조각하며 디자인 하는 것이 사실은 기술이며, 이것이 좋은 조건에서는 예술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믿음에 따라 그로피우스는 모든 학생들을 작업장으로 보내 기술자에게 기술을 배우고 직접 만들도록 시켰다. 창조적인 힘을 갖게 하는 공부도 같이 가르쳤다.

바우하우스의 교수들 가운데는 칸딘스키, 폴 끌레, 알베르스 같이 현대 미술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이들이 많았다. 바우하우스는 곧 20세기 초,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려는 꿈을 가진 교수들과 학생이 마음으로 뭉쳐진 혁신적인 학교였다.
이를테면 의자를 만든다고 하자.
옛날에는 보기 좋은 것이 디자인의 으뜸 조건이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에서는 디자이너가 의자 만드는 법을 먼저 배우게 한다. 또 의자는 어떻게 생겨야 앉기 편한가를 연구하도록 한다.
이와 함께 일일이 손으로 만들지 않고 기계로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 내려면 어떤 재료를 쓸 것인가 생각하게 한다. 그런 일을 거쳐 바우하우스의 의자는 튼튼하고 편하며 날씬하고 산뜻한 모양으로 태어나게 된다. 쓰임과 모양이 잘 섞인 바우하우스식이 되는 것이다.

그로피우스는 1928년까지 9년 동안 바우하우스의 교장으로 있었다. 그 사이 바우하우스는 새롭고 뛰어난 감각을 만들어내는 요람이 되었다. 학교를 그만둔 그로피우스는 원래 그의 일인 건축설계 쪽으로 돌아갔다. 바우하우스에서는 그의 몫을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건축에서도 그는 '기계와 예술의 슬기로운 조화'를 실현했으며 그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낯익은 수많은 물건 가운데는 바우하우스에서 디자인한 것이 꽤 많다. 벽을 따라 위아래에 찬장을 붙여놓은 싱크대, 쇠파이프로 만들어진 의자 따위의 가구, 이동식 벽, 조립식 건축 자재, 소리를 흡수하는 천 등이 그것이다. 모두 바우하우스와 그로피우스가 남긴 훌륭한 유산이다.

바우하우스의 정신은 한마디로 기능주의(機能主義; 건축 · 공예의 모양과 재료는 모름지기 쓰임새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생각)라고 할 수 있다. 만일 1919년 바우하우스가 발터 그로피우스의 손으로 열리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아름답지만 불편한 그림같은 집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건축이야기 > 세계의 건축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도 다다오  (0) 2017.03.06
루이스 칸  (0) 2017.03.06
오토 바그너  (0) 2017.03.06
안토니 가우디  (0) 2017.03.06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0) 2017.03.05




















1867년 미국 위스콘신주(州) 리치랜드센터에서 출생.
1885년 15세 때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어 위스콘신대학을 고학으로 졸업.
1887년 근대건축의 선구자인 루이스 헨리 설리반의 설계사무소에서 근무.
1893년 시카고에 자신의 사무실 개설. 만국박람회를 통하여 일본과 동양의 건축에 관심을 갖기 시작.
1893-1911년 유기적 건축 이론에 바탕을 둔 ‘대 초원 양식(prairie style)' 시리즈를 통해 주택 중심의 많은 걸작을 선보임. 윈슬로 주택(1893), 하트레이 저택(1902), 마틴 저택 (1904), 쿤레이 저택(1908), 로비 저택(1909), 탈레신의 자택(1911년 이후).
1904-1910년 주택 이외에도 라킨사(社) 빌딩(1904), 유니테리언교회(1906) 등이 있음. 1910년 베를린에서 작품집 출간.
1911-1935년 침묵의 시기. 해외 도피 및 은둔 생활로 작품 활동이 전 시대에 비해 거의 없었다. 미드웨이 가든, 일본의 제국 호텔, 탈리아신 이스트 등. 1936-1939년 1936년 '낙수장(Falling water)’이라고 명명된 카프만 저택, 1939년 존슨 왁스본사 건축물을 통해 당시 세계적으로 파급되던 국제건축 양식(international style)을 받아들이면서 제2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1938-1939년 이후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1938년부터의 탈레신 웨스트 주택 건설을 시작으로, 제2제이콥스 저택(1948), D.라이트 저택(1952), 프라이스 타워(1956), 베스 쇼롬 유대교회(1955), 마천루 계획안.
1959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1959)을 완성하기 직전 애리조나주(州) 피닉스에서 사망.

 

 -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유기적인 건축의 기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프랭크 라이트는 유럽 중심의 근대 건축의 흐름에서 당당하게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지니고 유럽 건축에 영향을 미친 미국의 자존심이었다.
그는 자연을 통하여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유기적인 건축의 기수이며, 기하학적인 수평선과 자연의 조화, 내부 공간의 리듬, 반복과 대립의 적절한 구성 등 현대 건축의 중심 언어를 훌륭히 사용한 건축가이다.

라이트는 위스콘신주 리릴랜드센터에서 1869년 6월 8일 음악가겸 목사인 윌리암 C.라이트와 웨일즈 출신의 안나 로이드 라이트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라이트는 태어나서 처음 20년은 위스콘신의 남서부에서 보냈다. 부모님 모두 교육을 많이 받으셨던 분이었다. 어머니는 독일 교육자인 프리드리히 프뢰벨에게 자식을 교육시켰다. 프뢰벨은 자연을 모방하게 시키기보다는 나무 상자, 큐빅 그리고 구들을 이용해 확장시키면서 시각 훈련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라이트에겐 평생 잊지 못할 기억들이었다.
또한, 삼촌의 농장에서 라이트는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를 했다. 그리고 시골의 삶에 대한 영원한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라이트가 태어나기도 전에 자식이 남자아이일 것이며 그는 아름다운 건물을 지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스스로 건축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그가 애들러와 설리반 밑에서 배웠던 것과는 색다른 주거 건축을 시작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사무실을 연지 6년 만에 그는 주거 건축의 디자인을 변화시키는데 성공했고, 삶의 새로운 패턴을 창조해 냈다. 이러한 혁명적인 스타일을 -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모방되어지기도 했던 - 프래리 하우스(prairie house)라고 부른다.
현재의 집들은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다. 창문은 벽에 난 작은 구멍과도 같고, 재료는 나름대로의 성질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주거 건축에서 새로운 언어를 찾고자 노력했던 그는 프래리 하우스를 개발했다. 그는 대평원에 걸맞다고 생각하는 길고, 낮은 라인을 형성하는 주택을 원했다. 그는 다락방과 지하실을 없앴으며, 지붕선을 조용하고 우아하게 만들고자 했다.
"어쩌면 본능 깊숙이 자리 잡은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어떠한 주거라도 shelter(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가 본질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낮고 넓게 퍼지는 지붕을 설치했습니다(그것이 납작하거나 어떻든 간에). 나는 건물을 동굴이 아니라 넓고 그 장소와 관련된, 하나의 shelter라고 보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난 땅과 평행한 면이 그 자신을 땅과 경계 지으면서도 건물이 땅에 소속되게 만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개념을 건물에 넣었습니다."
그는 prairie house를 짓는데 있어서 뚜렷한 원칙과 기준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건축주의 요구와 그 땅의 언어에 맞게 지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집이 "box"형태로 되는 것을 매우 꺼려했다. 이 말은 즉, 방은 서로 불필요한 벽과 문을 없애서 방끼리 서로 유동성이 있어야 하고 부드러운 유리 영역을 통해 빛과 공기가 흘러 들어와야 한다는 말이다.

"모든 위대한 건축가는 분명히 위대한 시인이다. 그는 분명 그의 시대와 그의 삶, 그리고 그의 나이에 대한 뛰어난 해석자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이 있었다. 이러한 경제 공황은 국가의 가능성과 국가성을 재평가하게 했던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의 라이트의 주요 관심사는 도시 집중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계획의 수립과 미국 중산 가정이 살 수 있는 housing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 해결책으로 Broadacre City와 Usonian House가 제안되었다.
Usonia라는 단어는 1925년 라이트의 기록물에 최초로 나온다. 미국을 위한 자신의 건축적 제안을 구체화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
이 시기의 약 16년 동안 라이트는 거의 500점에 해당하는 프로젝트들을 설계했다. 이 시기 동안인 1943년에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시작했으며, 그의 전 작품의 거의 절반에 해당되는 정렬적인 창의성을 보여주었다.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기적 건축 -
자연에서 추출된 그의 건축적 모티브는 가장 원초적인 개념으로 읽을 수 있으며, 이러한 자연에 대한 직관은 자연의 자태에서 형상화된 구조의 시스템을 비롯하여 형태, 내부와 외부공간의 관입, 수직과 수평의 상호 연관관계 및 연속과 확장, 반복 및 대립의 관계로 이어져 각각의 개체가 결합되면서 일체로 표현되는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의 맥을 이루고 있다.

라이트는 그가 평생 스승으로 생각한 당시 시카고학파의 거장인 루이스 셀리반 사무소에 입사하면서 '미'라는 것은 기능이나 형태에 내재하고 있다는 유기론(자연적이며 생물적인 것으로 유기적 인간성으로 연결되며, 서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사상이나 사물의 파악)을 계승 발전시켰다.
라이트는 140개 정도의 주택설계, 50여개에 가까운 계획안 등 다작의 주택 설계를 했으며 이를 통해 건물의 진실성은 건물의 지붕과 벽에 있는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 수 있는 내부공간에 있음을 제시했다.

초기의 계획에서는 좌우대칭의 엄격한 고전주의(classicism)에 의하여 구성하였으나 묵직한 평면 및 단면을 단순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유틸리티 코어(utility core: 주방, 세탁실, 화장실 등 물을 쓰는 공간을 한데 모아 설비에 대한 처리를 간편하게 함)가 주택의 중심적 요소로서 평면의 가동 칸막이와 다양한 높이의 천정으로 공간의 변화를 꾀하는 등 인간적인 스케일을 채택하였으며, 다양한 높이의 내부 공간감은 건물 외관에서 볼륨감의 변화가 솔직하게 표현되었다.
또한 수평선을 강조하여 대지에 펼쳐지는 듯한 공간을 전개하여 자연과의 융합을 시도하였으며, 매개공간의 효과와 평면형식은 세로와 가로로 직교하는 축선에 의해서 십자형플랜을 이루어 교차되는 두개의 축에 의해 결정되었다.
벽으로 구획된 각각의 방도 창문에 의해 차단되지 않고 자유롭게 유통되며, 칸막이 역할의 벽은 드라마틱한 공간을 연출한다. 실내공간은 어느 방으로도 확산되어 공간의 연속성이 확연하며 창문은 프뢰벨 가베의 영향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형성하고 크게 열린 개구부를 통하여 테라스나 발코니가 정원 등 외부공간과 융합해서 각 실의 연속성과 아울러 내부와 외부공간이 상호관입한 유기적 건축의 실체가 되도록 하였다.

라이트는 시대적 흐름의 격동과 역경 속에서도 많은 작품 활동을 통하여 자신의 건축적 사고의 근본인 유기적 건축론을 실재화하면서 이론과 실체를 겸비하며 충실하게 표현한 건축가로서, 자연을 디자인의 모든 원리, 결과의 내부적인 요소로서 이해하였으며, 그러한 건축이념은 생명 그 자체로서 내부적 유기체이며 형태와 기능을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여 부분은 전체를 구성하기 위해 중요할 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과도 융합해야 되며, 공간은 그 생활을 구성하는 중요한 성분으로서 외부로 향하고 또한 내부로 향해 흐르는 것으로 모든 것을 제 3차원으로 하여 느끼고 보며 사용하는 것으로 확립하였다.

1. 유기적 건축 : 단위, 요소 - 신진대사

1894년 공공 연설에서 처음으로 '유기적(organic)'이라는 말을 썼다.
"당신의 주택이 그것의 장소로부터 쉽게 확장될 수 있고, 그곳 자연이 근사하다면, 그곳의 환경과 호흡을 같이 하도록 하게하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건축물이 마치 그러한 기회를 가졌던 것처럼 그 장소에서 조용하게 자리를 잡고 있도록 하라."


2. 라이트의 세가지 유기적 건축 원리

유기적건축의 정의 : 시간의 흐름, 장소적 특성, 인간적 요구(기능)

  • ㆍ시간적 흐름 - 20세기 건물은 17세기 건물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 과거의 건물은 현대에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과거만 삶의 방식과 사회양식 등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 ㆍ장소적 특성 - 장소에 적합하려면 그것은 주위 환경, 경관을 가장 잘 이용해야한다. 그 예로 pairie house, 지평선을 따라 확장되도록 만들었다. 주거층은 위로 올려서 주변 환경의 경치를 제공했다. 대표적인 예로 낙수장, 그것은 건물과 장소가 조화롭게 엉켜있는 궁극적인 예이다.
  • ㆍ인간적 요구 - 건물의 목적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조에서도 인간을 단위 길이로 사용했다. 그리고 건물의 리얼리티는 벽이나 천장이 아니라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의 "공간"이다. 그는 초기 집에서 건축적 공간을 자유화시켰다. 불필요한 파티션은 없앴다. 즉, family house에 open plan을 제공했다.


3. 라이트의 주거디자인 지침 원리

  • ㆍ주택에 필요로 하고 있는 부분의 수를 적게, 분리된 방의 수를 최소화.
  • ㆍ대지에 수평인 평면을 늘리고 이것을 강조, 건물 전체를 그 대지와 연결시킬 것.
  • ㆍ상자와 같은 방, 모든 벽을 단순히 둘러싸는 막으로 활용하고 있는 주택을 배제할 것.
  • ㆍ불건전한 지하실을 모두 지상에 위치시킬 것.
  • ㆍ안팎의 필요한 모든 개구부를 인간적인 비례로 조화시켜 그것들이 극히 자연스럽고 일련의 전체적 건물로 존재하도록 할 것.
  • ㆍ잡다하게 서로 다른 재료들 조합시키는 것을 그만두고 가능한 단일 소재를 사용할 것.
  • ㆍ난방, 조명, 베란다 같은 것을 모두 통합시킬 것.
  • ㆍ실내장비를 건물 그 자체와 일체화, 그들 비품을 기계작업에서 제작하기 쉽도록 디자인하며 이로 인하여 실내 장비를 가능한한 유기적 건축의 일부로 통합.
  • ㆍ장식을 축출할 것.

'건축이야기 > 세계의 건축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도 다다오  (0) 2017.03.06
루이스 칸  (0) 2017.03.06
오토 바그너  (0) 2017.03.06
안토니 가우디  (0) 2017.03.06
발터 그로피우스  (0) 2017.03.06

우리는 흔히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관계론과 존재론으로 설명한다 . 관계론은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인 형식이 아니고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즉 개별적 존재의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한다. 이와 반대로 존재론은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정체성을 부여한다.

건축을 관계론과 존재론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어떨까?
건축은 관계인가 존재인가?
아니면 관계와 존재의 상호작용이 만드는 어떤 것인가?

“건축은 관계이다.”
관계적 건축은 존재의 본질을 관계성 또는 관계망으로 보기 때문에 우선 주변 상황의 속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관계적 건축이 주어진 대지에 남기는 흔적은 전체적 흐름의 일부분이 된다. 관계적 건축은 남겨진 흔적의 관계성에 집중하고 흔적 자체의 정체성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관계적 건축은 주어진 상황이 결정한다.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했느냐에 의해서 관계적 건축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오름, 여초 김응현 서예관, M 프로젝트는 ‘건축은 관계이다’ 라는 관점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들이다.

오름은 주변 상황과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철저히 관계성에 매달린 프로젝트다. 땅의 흐름을 오름이라는 관계만으로 해석하고 다른 의미를 더 이상 부여하지 않았다. 관계 외의 모든 군더더기를 빼버리려고 노력한 프로젝트이다. 여초 김응현 서예관에서는 선형의 매스가 떠있고 그 위 아래로 주변의 자연이 서로 소통하도록 시도하였다 . M 프로젝트에서는 절곡된 판의 구조로만 주변의 자연과 관계 맺기를 시도하였다.

[M 프로젝트 모형]

[S 프로젝트 스터디모형]

“건축은 존재이다.”
존재적 건축은 존재의 본질을 각 개체의 정체성으로 본다. 존재적 건축은 각 개체의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해 독특한 논리 구조를 가지며 그 결과로 독특한 형식이 나타난다.
완공작 비움 l 과 비움 ll 에서의 비움, P 채플의 반투명한 표피구조, 춘천 애니메이션 스톱모션관의 경사조경, S 프로젝트의 디지털적 이중 표피 등이 존재의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한 논리 구조의 예이다.

“건축은 관계와 존재가 만들어 내는 긴장적 에너지이다.”
100% 관계적이고 100% 존재적인 건축은 존재하지 않는다. 건축은 관계성과 존재성의 상관관계가 만드는 역학이며 긴장감이다.
건축의 성패는 긴장의 에너지로 측정된다. 아래 도표는 발표된 작품들을 관계와 존재의 측먼에서 분석해 본 것이다. ×축은 건축의 존재적 정도를, y 축은 건축의 관계적 정도를 나타낸다. ×축과 y 축의 대각선 방향의 축은 긴장적 에너지 레벨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관계와 존재는 서로 반비례의 관계이다. 가장 관계적인 것은 가장 비존재적인 것이 일반적이다. 건축은 그것이 관계적이냐 존재적이냐 보다는 높은 긴장적 에너지를 가지느냐로 평가된다. 가장 높은 긴장적 에너지는 건축이 가장 관계적이고 더불어 가장 존재적일 때에 도달된다. 그 상태를 관계적 존재라고 부른다.

관계적 존재
관계적 존재는 최고로 관계적이면서 동시에 그 관계 맺음 자체가 최고로 존재적 의미를 가지는 상태를 말한다. 모순적인 말처럼 들린다. 일반적으로 최고로 관계적이기 위해선 각 개체의 독립성이나 정체성이 최소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존재성을 각 개체의 정체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관계 그 자체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오름을 예로 들먼 기존의 지형을 따라 오르는 매스는 그 자체가 존재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그 매스와 지형과의 관계를 통하여 자연적으로 발생되는 경사마당, 누하진입 등의 요소들이 존재적 의미에 정체성을 부여한다. 관계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난 존재인 것이다. 관계적 존재는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는 화두이다. 오름, 여초 김응현 서예관 등에서 시작된 실험은 P 채플, M 프로젝트, S 프로젝트 등을 통하여 결실을 맺어 갈 것이다.

거침(野)에 관하여

논어에 질승문즉야(質勝文則野) 문승질즉사(文勝質則史)라는 말이 있다. 내용(質)이 형식(文)에 비하여 튀면 거칠게(野) 되고 형식(文)이 내용(質)에 비해 튀면 사치스럽다(史)는 의미이다. 요즘 거침에 관심이 많다. 내용 즉, 설정된 논리의 전개과정이 형식을 빌려 담기지 않고 진솔하게 드러나는 것이었으면 하고 사치스럽지 않았으면 한다. 형식은 내용의 결과물이다. 결국 내용이 다르면 당연히 형식도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거칠수록 좋다.

단순화에 관하여
이번에 발표되는 완공작은 처음으로 프로세스를 반영하는 이름을 붙었다. 오름, 비움 Ⅰ, 비움 Ⅱ 가 그것이다. 이전에 발표된 작품들에게도 프로세스를 반영하는 적당한 이름을 붙이려고 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할말이 너무 많았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이번에 완공된 세 작품은 붙여진 이름을 지키기(?) 위해 프로세스를 극도로 단순화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요사이 간디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진보란 단순화이다.”

출처-임재용 (건축사사무소 O.C.A 대표)

작은집의 단상

<서언>
작은 집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 시대의 새로운 시각을 열어보려는 편집진의 의도는 알수 있으나 본인의 생각이 그 의도와 부합되지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가뜩이나 글 쓰기 싫은 요즈음의 원고청탁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큰 집에 대응되는 작은 집의 관심은 오히려 억눌린 자들의 작은 집의 슬픈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나는 이 글을 쓰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작은 집에 대한 생각은 바로 이 시대에 작은 집에 대한 잘못돤 시각의 교정이나 아니면 비록 규모는 작지만 그것대로 새로운 가치를 찾아보자는 의도인 것 같다. 그러나 삶의 가치의 혼돈되어 있는 요즈음 나의 글이 어떠할까 생각해보면서 조심스럽게 졸필을 시작하고자 한다. 기실 작은 집에 대한 언급 자체가 바로 이 시대의 문제인 것이다 집에 있어서 외형적인 크고 작고가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가치관이라는 그 문을 제대로 통과하여 이해하기 전에는 작은 집의 문제는 올바로 접근하기가 어려울 같다고 생각되어지며, 작은 집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논한다는 자체가 이미 작은 집에서 사는 이의 아름다운 인격을 보기가 예전보다 힘들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가치관의 혼돈의 혼돈

우리의 근간의 사정을 돌아보면 불과 몇 십년간 이어지는 서구문화의 유입으로 배고픔에 지친 우리들에게 서구문화의 유입에 대한 적합성을 논하기도 전에, 그 서구문화의 옳고 그름을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 옆에는 국제화라는,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음을 보고서 깜짝 놀라곤 한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빠른 속도로 미처 우리들의 삶을 챙겨볼 겨를도 없이 변화의 속도는 우리들의 삶을 끌고서 앞으로만 나아간다. 지난 시간의 삶의 매듭도 풀기도 전에 또 다른 세계를 향하여 치닫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물질만능의 정보, 지식의 산업사회에서 우리들은 개성 혹은 다양성이란 미명하에 자기 현시적인, 과대노출증의 현대인에게 그럴듯한 큰 집이란 자기의 현재 위치나 부의 축적을 대변해주는 과시 수단과 대상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그것은 과거의 우리 조상들도 마찬가지로 보여지지만-----
그러나 작은 집에 사는 이의 모습은 예전과 자못 다른 것이 문제 아닌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예전의 조상들은 작고 초라한 초가집이지만 그 들은 가진 자에게 비굴하거나 아첨을 경계하였고, 청빈한 은둔적 삶에 오히려 자족하면서 이전투구의 사회에서 자신을 멀리 놓아 자신을 갈고 닦는데 노력하면서 삶을 살았다. 사회가 혼란할 때는 직언을 스스럼없이 하였고 자기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유유자적하며 살아감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러한 가치관은 사라지고 큰 집과 좋은 자동차가 그 사람의 사회적 성공을 대변하는 대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진정한 삶의 가치가 부를 목표로 한 것이 올바른 가치인가? 이 웃기는 일이 웃기는 일이 아닐 때 작은 집은 우리들에게 편안한 대상이 되며, 진정한 집의 아름다움은 규모가 아닌 삶의 가치가 그 집을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으로 이해 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가치의 혼돈이 더 이상 혼돈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들의 큰 집과 작은 집의 구분은 사라질지 모르겠다.


물리적인 가치에서 삶의 가치로의 전환

우선 나에게 작은 집과 큰 집의 구분을 가른다는 것이 우습게 들린다. 큰집과 작은 집은 물리적인 칫수나 형태에 의한 차이일 뿐 그것이 큰집과 작은집의 차이가 될 수가 있겠는가?
문제는 그 집의 사는 이의 정신세계이며, 올바른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이 사회를 위하여 얼마나 유용한 사람인가? 하는 삶의 소프트 웨어가 더욱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작다, 크다라는 물리적인 구분 자체는 의미가 없다. 자신의 삶의 방식대로 살면 되는 것이지 외부의 물리적인 기준이나 잣대를 사는 이에 적용하거나 들이대는 무모함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걸어서 다니는 사람이나 작은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큰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보다 인격적으로나 삶의 방식이나 가치가 잘못 되었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물리적인, 외형적인 차이가 내면세계의 가치의 차이로 잘못 오인할 수 있음을 우리는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큰 집과 작은 집이 인간들을 구분하는 잣대나 가늠자로 둔갑할 것을 염려하는 바이다. 그리고 비교, 대응의 의미의 포함은 자칫 잘못하면 흑백 논리의 다름이 아닐뿐더러 작은 집의 가치의 의미가 희석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은 집이든 큰 집이든 아름다운 집을 갖고자하는 욕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집이 부의 축적대상이나 재산증식의 수단이 될 때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집에 대한 올바른 가치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시점은 우리가 집이 부라는 추상성의 욕망의 대상을 벗어날 수 있을 때, 집이 부의 가치에서 삶의 가치로의 사고의 전환과 물리적인 크기보다 즉 양보다 질로의 삶의 가치의 전환이 함께 이루어질 때 가능 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짙게 드리워진 이 사회의 가치의 다양성과 인간의 얼굴만큼이나 다른 생각들 속에서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이미 구겨진 삶의 가치관을 누가 펴줄 수 있을 것인가? 큰집과 작은 집이 우리들 삶의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새 정부 들어서 마치 이전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으나 제대로 자신을 이 사회가 알아주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원망이라도 하듯이 이 시대의 기회주의자를 없애고 원리원칙이 바로서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새 정부의 일성이 정말 잘 지켜져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바꾸어놓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정부가 한다고만 되는 일인가?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한번쯤 되돌아 볼 시점은 아닌지----- . 그러한 사회가 되지 않는 한 작은 집은 여전히 사는 이의 인격이나 삶의 자세나 가치관과 상관없이 가난하고 없는 자의 대변인 노릇 이상을 하지 못할 것 같다. 그로 인하여 인격에 손상을 입는 푸대접을 이 사회로부터 계속 받을지도 모를 안타까운 일이다.


<결언>

나는 요즈음 덤덤한 집이 그립다. 지나친 꾸밈도, 그렇다고 너무 꾸미지도 않은 집은 더 싫다. 자신의 집에 대한 애정이 없으니까 돌보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수채화 물감 같은 삶의 모습이 그려지는 그러한 사람이 사는 집, 그리고 소박하면서도 투명하고 정직한 이가 살아가는 모습의 집이 그립다. 우리들 주변의 어딘가에 있을 법한 평범한 집 같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는 사람이 사는 집,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있어도 삶의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는 작은 집이지만 결코 보기가 쉽지 않은 집, 우리 주변에 있을 것 같지만 이 시대에는 쉽게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 삶의 진지한 향기가 있는 사람이 사는 집이 그립다.
집은 사는 이와의 가치가 절대 무관치 않기 때문에 요즈음의 집 따로 사람 따로를 걱정해야지 작은 집, 큰 집의 물리적인 칫수에 의한 구분은 더 이상 건축인의 관심이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 한다.

 

출처- 배병길 (배병길도시건축연구소 대표)

1. 건축법의 목적


건축법은 건축물의 대지, 구조, 설비의 기준 및 용도에 관하여 규정함으로써 공공복리의 증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따라서 건축법 및 이에 따르는 명령,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와 규정의 제정, 운용, 해석 등은 모두 이 목적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2. 건축법의 필요성


개인이 자기의 대지에 자기의 집을 건축하는데 도로, 건폐율, 채광, 방화 등의 복잡한 건축법규에 구속을 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회적인 집단생활을 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 건축법도 다른 법률과 마찬가지로 건축물을 건축함에 있어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집단에게 이롭게 하도록 상호 협력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건축법의 초기 단계에서는 이웃 근린끼리나 부락 내에서만 인정하면 허용되는 관습법적인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점차 발달해 감에 따라 인구의 조밀, 지배계급의 발생 등으로 지배계급이 사는 지역, 일반시민이 사는 지역, 공공시설이 설치되는 지역 등이 구별되었습니다. 가로 등의 정비에 따라 도로와 건축물과의 관계, 건축물 상호간의 관계 등이 법률로서 정해졌으며, 전염병의 발생, 대화재, 대지진, 풍수해 등의 커다란 재해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건축물의 위생, 구조방법, 방화상의 규제 등을 첨가하여 발전되어왔습니다. 산업혁명 후 19세기에 와서는 도시의 팽창이 급속히 진전되고 산업화에 의한 공장의 출현, 증기기관차,자동차 등 교통기관의 발전 등은 도시의 혼란을 야기시켰습니다. 계획적인 도시발전의 강력한 수단으로서 지역별 건축규제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대륙의 각국에서 채용되어 건축법규와 도시계획과는 따로 생각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건축법규 중 국민의 생명, 재산 등의 보호에 직접 관계가 있는 위생, 안전 방화, 등 재해 방지를 위한 규정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되기 쉬우나 지역지구제 등의 도시계획에 관한 규정 부분은 대지가 소재하고 있는 장소에 따라 차이가 있으므로 도시관리계획 그 자체의 합리성이 결여되면 주민의 이해를 얻기 어렵게 됩니다. 그러나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 지역,지구,구역 등의 도시관리계획 결정에 있어서는 앞으로 주민의 의견도 충분히 반영될 것으로 예상되므로, 건축법규의 필요성에 관한 것도 새로운 각도에서 인식될 것입니다. 


3. 해외 법제에서의 건물의 개념


일찍이 로마법에서는 물건이라는 일반개념에 동산과 부동산이 흡수되어 양자를 동일한 법원칙으로 규율하였기 때문에 양자의 구별이 중요하게 다루

어지지 않았습니다. 보통 부동산이라 함은 토지를 가리키는 것이고, 건물과 같은 토지의 정착물은 “지상물은 토지에 따른다”는 원칙에 의하여 토지와 일체를 이루고 별개의 독립된 물건으로 다루어지 않았습니다. 그 후 독일,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에서는 로마법의 법언에 따라 토지만을 부동산으로 하고 토지의 정착물이나 지상물은 토지의 구성부분으로서 독립한 부동산으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대체적으로 유럽민법은 물건을 동산과 토지로 나누고 건물은 토지의 본질적 구성부분을 이루어는 것으로서 이는 권리의 목적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법리에 따른다면 우리나라와 같이 건물이 언제부터 독립한 부동산으로 되는지, 독립한 부동산으로서의 등기가 가능한 등기능력이 있는지 등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지만 건물에 대한 행정적인 처리를 하기 위해서는 역시 건물로서의 요건을 갖추어야 하는 문제는 발생하게 됩니다. 한편 우리민법과 일본민법은 토지뿐만 아니라 토지의 정착물도 이를 독립한 부동산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일본민법 기초자들은 처음에는 서양민법과 같이 건물을 별개의 부동산으로는 규정하지 않았지만 당시 도쿄지방의 관습을 주장하며 제정위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건물을 별개의 부동산으로 하기에 이르렀고 우리나라에서도 별개의 건물로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일본의 법제는 건물을 토지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별개의 부동산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토지등기부와는 따로 건물등기부를 두고 있으며, 건물은 토지와는 별개의 권리의 객체로 됩니다. 따라서 건물이 토지의 일부 또는 구성부분이 된다든지 소유권에 관하여 토지와의 사이에 부합이 생기지 않으며 그에 관한 물권변동은 원칙적으로 등기를 하여야 효력이 생깁니다.여기에다가 우리나라에서는 건물 또는 건축물과 관련하여 민법, 건축법, 부동산등기법상의 개념이 각각 다릅니다. 또한 구체적으로 어떤 건축물이 건물로 등기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추상적 기준만 있을 뿐, 세밀한기준까지 정립하지 않고 있습니다. 즉 상황에 따라 등기공무원의 판단에 따라 건물로 등기할 수 있을지를 결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일본에서는 많은 실무상 처리기준을 두고 이에 근거하여 등기적격을 인정하고 있다


2. 미국법에서의 건물의 개념


미국법상 건물의 개념은 사법적 영역보다는 공법적 또는 규제법적 영역에서 주로 발견됩니다. 물론 건물 역시 사적 재산의 하나이므로, 사인간의 거래

를 규율하는 사법, 즉 재산법의 관심영역 안에 포섭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 법제와 달리 미국법은 토지와 건물을 각기 독립한 부동산으로 파악하지 아니하는 탓에 부동산 거래는 주로 토지를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미국법상 부동산(real estate/real property)은 토지와 그 토지 위에 경작되거나 또는 부착되거나 세워진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농작물 뿐 아니라 건물

(building)도 포함됩니다. 이러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미국법상 건물은 별도의 독립한 부동산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토지에 부착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고, 더 나아가 그것은 별도의 소유권의 대상이 되지 아니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국 부동산 등록제도(Recoding System) 역시 토지를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미국 판례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건물(building)이란 “주거(shelter 또는housing)나 사람/가축/동산의 보호를 위해 제작한 구조물”로 정의됩니다. 즉,건물은 지붕과 벽으로 구성된 영구적인 구조물을 의미하는데, 좀 더 부연하면 사람/가축/재산(주로 동산)의 보호를 위해 고안된 것으로서 벽과 기둥에 의해 지지되는 지붕을 갖춘 영구적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상 건물의 의미는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서 다양하게 그리고 탄력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가령 형법상 절도(특히 주거침입절도 burglary)나 방화죄의 경우 건물의 의미에는 자동차나 선박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건물의 개념은 건물의 건축을 규율하는 법령이나 또는 토지 사용의 규제를 내용으로 하는 법령(zoning), 그리고 지역의 환경이나 화재 등을 규율하는 법령 등 과 같이 시민의 안전 또는 재산보호를 통해 공공 안전과 복리를 추구하는 규제법령들에 널리 사용되고 있고, 그러한 법령들과 밀접한 연관성을 띠며 유기적으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법령 등은 일차적으로는 미국의 개별 주들에 의해 입법이 되어 시

행되고 있습니다. 또 이러한 법제의 운영 역시 각 주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가령, 건축법의 경우 그 주 전체에 걸쳐 적용되는 법령을 두고 있는 경우도 있고, 반면에 주 내에 있는 지자체(가령, city나 county 등)별로 별도의 건축법을 따로 두고 있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예로는 뉴욕주의 Building Code of the City of New York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미국에서는 건물과 관련된 각종 법령들이 개별 주마다 따로 운영되고 있어서 각 법령에서 제시되는 건물의 개념은 미묘한 차이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건물의 신축/파괴/증축/개축/관리/보수 등과 관련된 건축법의 경우,

국제적 표준화 작업을 하는 ICC(International Code of Council)가 마련한 국제건축법(Internaitonal Building Code, 이하 IBC)이 모델법으로서 제시된 이후, 미국의 주 상당수가 이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IBC는 미국의 모든 주가 원형 그대로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주가 전면적 수용을 하거나 혹은 일부 수정 후에 채택하는 방식으로 따르고 있기 때문에, 미국법상 건물의 개념을 확인하는 작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여겨집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