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 마이어

(Richard Meier, 1934 ~ )

 

 

리차드 마이어는 소문 없이 자신의 건축언어를 일관성 있게 유지, 발전시켜 왔습니다. 모더니즘의 시학, 테크놀러지의 아름다움과 실용서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건축은 하나의 전통이며, 기나긴 연속체 입니다. 전통과 단절하든지 아니면 이를 강화하든지, 우리는 여전히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작업은그렇게 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르는 질서를 찾아내고 다시 정의하고, 어떤 용도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시도라고 그는 분명히 말합니다.

 

초기에는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사상과 동일 하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통하여 자신의 디자인 원리를 확고히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지속적으로 백색건축을 발전 시켜온 탓에 [게티센터]와 같은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는 행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독자적 접근 방법은 초기 주택에서부터 공공 건축이나 뮤지엄 건축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며, 그의 작품이 선명한 것은 그의 건축 이념인 논리적 사고가 정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언제나 신선하지만, 그와 반대로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간에 대한 그의 관심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공간이 아니라 분명하고 적절한 체적을 가진 공간이어서 쾌적함을 느낍니다.

 

그는 많은 뮤지엄 건축을 디자인 하면서도 백색건축으로 일관해온 건축가입니다. 특히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게티센터]는 좀 더 성숙되고 완결된 백색건축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건축이념은 르코르뷔지에와 알바 알토의 이념을 자신의 작품에 대입시켜 꾸준히 발전시키면서 이루어졌으며, 제2세대를 대표하는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로부터 사사를 받으며,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건축을 통해 실용적이면서도, 명료하고, 복합적이며, 고도로 세련되고, 절제되고, 위엄 있으면서도 편안한 시적인 공간을 실현해왔습니다.

 

그의 관심사와 연구계획은 뮤지엄 건축 및 전시 분야와 실내환경디자인 분야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새로운 문화적 경험 축적을 위한 답사 준비에 오늘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백색의 건축가 일까요??

 

미국의 현대 건축가 리차드 마이어는 로버트 벤츄리, 케빈 로쉬, 프랭크 게리와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제3세대 건축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1960년대 뉴욕의 진보적인 건축가 그룹 '뉴욕 파이브' 멤버 중의 한 사람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미국 내의 인지도를 높여 갔으며, 1980년대 부터 세계적으로 신망을 받는 건축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이는 그가 일관성 있는 작품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스타일인 백색건축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으며, 자신만의 순수한 건축 이론과 이 시대의 건축 문화를 접목시키고자 꾸준히 노력한 결과 입니다. 그의 모든 작품은 디자인 논리를 다이어 그램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모든 작품의 디자인 체계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건축가로 유명합니다. 특히 푸랑크푸르트의 [장식미술관]이나 아틀란타의 [하이뮤지엄]과 같은 세계적인 프로젝트 지명설계 경기 공모에 당선되어 21세기 건축을 이끌어 가는 세계적인 건축가로 그 명성을 더해 가고 있습니다.

 

그는 매 작품마다 자연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자연축과 주변 조건으로부터의 대지축을 찾아 배치 계획에 반영, 정확한 프로그램을 통한 공간 구성, 합리적인 건축 구조 체계, 인지도를 높인 위치에 입구 설정 등 시각, 지각적 원리를 이용한 디자인 적용, 체계적인 수직 동선의 위치 설정, 공간을 에워싸는 윤곽 등을 통해 논리적인 디자인을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논리 전개 방식은 모든 작품마다 다이어 그램을 이용하여 검증이 가능합니다.

 

마이어의 작품집 서문을 쓴 조셉 리크웰트는 그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리차드 마이어는 동시대 작가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면서도, 일관성 있게 그의 작품 특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의 비판자나 옹호자들 마저도 르코르뷔지에의 연장선에서만 마이어를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이 같은 논의를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의 스타일은 누구의 것을 계승한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그 자신의 것임을 주장해 왔습니다. 신중한 성격의 마이어는 정신적 혼란에 시달리면서도 "백색건축"에 빠져 들었으며 이를 대처할 대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백색 건축의 절정을 이룬 [하이뮤지엄]

 

마이어는 백색을 좋아 합니다. 백색에 관한 철학은 그의 작품집이나 연설문을 통하여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백색은 모든 자연색 내에 존재하는 가장 기본적인 색체로 백색표면을 이용하면 딱딱한 벽과 부드러운 개구부 그리고 빛과 그림자의 연출이 가능합니다. 백색은 전통적으로 완벽함과 순수함 그리고 명료함의 상징이며, 가장 인상적인 색채이므로 나의 작업에서 가장 개성적인 특성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백색을 이용하면 시각적인 형태의 힘이 강화되고 건축개념이 명백해집니다. 또한 백색은 추상적 공간이나 스케일 그리고 자연과의 조합과 관련 하여 공간을 정의하고 질서화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또한 "백색은 가장 아름다운 색이며, 항상 빛에 의해 전달되고 변화되며, 하늘과 구름과 태양 그리고 달이 그러하듯 백색은 항상 순결의 상장이며, 다른 색들은 그들의 배경에 의존한 상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나 백색은 절대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백색을 좋아합니다.

 

따라서 그는 규격화된 백색 재료로 일관성있게 백색건축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독특한 그의 건축기호가 되었습니다. 그의 백색건축은 낮에는 밝게 빛나고 밤에는 은빛을 내면서 항상 변화하는 힘을 가짐, 이로 인해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백색건축의 찬미자인 마이어의 주요작품은 크게 1960년대 주거건축과 1970년대 공공건축, 그리고 1980년대 이후 뮤지엄 건축으로 구분됩니다.

 

1990년대 대표적인 주거건축으로는 [스미스 하우스(Smith house)], [더그라스 하우스(Douglas House)]등 많은 백색주택을 들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쉽게 세상에 알려질 수가 있었고, 1970년대에는 브롱스에 있는 [재활센터(Bronx Developmental Center)]를 비롯한 공공 건축 작품, 그리고 1980년대 이후 프랑크푸르트의 [장식미술관(Museum for Decorative Arts)]을 비롯한 뮤지엄 건축들을 통하여 신임 있는 세계적인 건축가로 인정받게 됩니다.

 

오랫동안 일관성 있게 유지해왔던 백새건축 시대를 결산하고 방향전환을 시도하겠다던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게티센터(Getty Center)] 프로젝트도 결국은 그 동안으 백색건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건물에서 그의 백색건축은 절정을 이루었으며, 그는 백색건축의 찬미자로 인정되어집니다.

 

그가 백색 건축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것은 자연 속에서 정형적 형상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려는 의도 였으며, 그로 인해 대중들에게 큰 감명을 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게티센터]와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는 도시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디자인과 자연의 통합작업을 이루는데 성공한 사례라고 생각 됩니다.

 

 

그의 성장 배경과 건축 이념

 

리차드 마이어는 1943년 미국 뉴저지 주 뉴와크에서 태어나 코넬 대학에서 건축교육을 받았으며, 1957년 졸업 후 그림 공ㅜ를 하다가 6개월 간의 유럽여행을 통해 건축에 대해 많은 감명을 받습니다. 그 기회에 대학 재학시설부터 흠모했던 르코르뷔지에나 알바알토를 직접 만나 그들의 사무실에서 일할 것을 부탁해 보았으나 성사되지는 않았습니다.

 

마이어는 르코르뷔지에의 영향에 대해 스스로 "내가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을 모르고 애정이 없었다면 나의 건축물을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그가 공간을 창조하는 방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963년뉴욕의 [근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에서 열린 르코르뷔지에 작품전시회는 뉴욕파이브 맴버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마이어에게는 이것이 자신의 건축 사무소를 개설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마이어는 주로 표현주의적인 회화와 복잡한 콜라주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예술가인 프랭크 스텔라와 가까운 친구가 될 정도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그의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면서 필라델피아의 분수 설계 공모에 함께 참여한 일도 있습니다.

 

그는 졸업 후 1959년 데이비스, 브로디 그리고 위스니우스키 사무소에서 1년간 근무하다가 1960년에는 대형 설계사무소인 S.O.M 뉴욕사무소에서 근무하면서 대형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1961~1963년에는 제2세대 대표 건축가의 한 사람인 마르셀 브로이어에게 사사를 받으며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브로이어는 모호리나기와 함께 도일 뎃소 바우하우스 스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월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로에 그리고 조셉 알버즈가 한 것처럼 1930년대 후반에 미국에 정착했습니다.

 

 

-출처- "리차드 마이어 - 백색의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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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법의 중요내용(2016.2.3)

 

 

■  개정이유

 

건축물 건축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실 설계-시공 등으로 인하여 건축물 안전사고가 발생하고 있어, 이러한 불법행위를 근절하기 위하여 설계자, 공사시공자 및 공사감리자 등 건축관계자의 책임을 강화하고, 착공 전 면밀한 안전 검토 체계 구축 및 소규모 건축물 등에 대한 감리 체계를 개선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정기점검 및 수시점검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는 소규모 노후 건축물의 안전사고를 예방하고 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안전점검을 실시토록 하는 한편, 특별건축구역과 건축협정제도의 활성화 대책을 마련하는 등 현행 제도의 운영상 일부 미비점을 개선-보완하려는 것입니다.

 

 

■  주요내용

 

가. 제조업자, 유통업자 정의 신설 및 의무 보여(제2조 제1항 제12호의2-제12호의3호 및 제24조의2 신설)

1) 건축물의 건축 등에 사용하는 건축자재를 제조하는 제조업자 및 납품하는 유통업자의 정의를 도입합니다.

2) 건축물의 안전과 기능 등에 지장을 주지 아니하도록 건축 등에 사용하는 건축자재의 제조-보관 및 유통에 대한 제조업자와 유통업자에게 의무를 부여합니다.

 

나. 초고층 건축물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건축물에 대하여 건축허가 전에 국토교통부장관이 지정한 공공기관에서 구조 및 인접 대지의 안전성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 및 평가를 하도록 기준을 신설하고 평가 결과를 공개하도록 합니다.(제13조의2 신설)

 

다. 건축주는 공사현장을 관리-감독하는 현장대리인을 지정-배치하여야 하고, 현장대리인을 배치하지 아니한 건축주와 현장을 이탈한 현장대리인에       대하여는 벌칙 및 과태료를 부과합니다.(제24조제6항, 제111조제3호의2, 제113조제3항 신설)

 

라. 허가권자의 공사감리자 지정 및 감리비용 관리 체계를 마련합니다.(제25조 제2항, 제11항 및 제12항 신설)

1) 소규모 건축물 및 분양을 목적으로 하는 건축물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건축물에 대하여 허가권자가 공사감리자를 직접 지정합니다.

2) 허가권자가 공사감리자를 지정한 경우 사용승인 전에 감리 계약서에 따라 감리비용이 지불되었는지를 확인하고, 관련 기준을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정합니다.

 

마. 건축관계자등에 대한 업무제한 제도 도입(제25조의2 신설)

1)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주요 건축물에 대하여 건축관계자등이 건축법 제40조, 제41조 등을 위반하거나 중대한 과실로 건축물의 기초 및 주요구조부에 중대한 손괴를 일으켜 사람을 사망하게 한 경우에 1년 이내에서 업무정지를,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규모이상의 재산상 피해가 발생한 경우에는 최초 적발 시 6개월 이내, 그로부터 2년이 지나기 전에 재차 적발 시 1년 이내의 업무정지를 명할 수 있도록 합니다.

2) 제40조, 제41조 등을 위반한(사망사고 및 재산상 피해 제외) 경우와 제28조를 위반하여 가설시설물이 붕괴한 경우에는 시정명령 후 시정조치 불이행시 3개월 이내, 2년 이내 재적발시 3개월 이내, 3차 적발시 1년 이내에서 업무정지를 명할 수 있도록 합니다.

 

바.  관계전문기술자의 참여 자격 및 의무 사항을 명시하고, 부속구조물을 설치하는 경우 관계전문기술자의 협력을 받도록 합니다.

(제67조제1항 및 제87조제1항)

 

사. 소규모 노후 건축물에 대하여 허가권자가 안전점검을 실시하는 한편, 소유자 등에게 안전점검 실시를 요구할 수 있고, 이 경우 신속한 점검이         

     필요하면 점검비용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합니다.(제35조제3항 신설)

 

아. 특별건축구역의 지정대상 확대를 위하여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에 따른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구역을 특별건축구역으로 지정할 

     수 없는 구역에서 제외하고, 이 구역을 특별건축구역으로 지정할 때에는 국방부장관과 사전협의합니다.

     (현행 제69조 제2항 제5호 삭제, 제69조 제3항 신설)

 

자.  현재 특별건축구역 내에서 모니터링 대상으로 지정된 건축주 또는 소유자는 모니터링 보고서를 사용승인 시 허가권자에게 제출하여야 하고,

또한 사용승인일부터 10년까지 정기적으로 모니터링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있어 건축주 등에게 시간적-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으므로 건축주 등이 아닌 국토교통부장관 및 허가권자가 직접 모니터링을 하거나 분야별 전문가 등에게 용역을 의뢰할 수 있도록 개선합니다.(제72조 제7항, 현행 제75조 제2항 삭제, 제79조제2항 및 제77조제2항 등).

 

차. 특별건축구역에 건축하는 건축물에 대하여 용적률 기준을 적용하지 아니할 수 있도록 합니다.(제73조제1항 제1호)

 

카.  건축협정구역에 건축하는 건축물에 대하여 건폐율, 용적률 및 높이제한 등의 건축기준과 [주택법]의 일부 기준을 완화하여 적용할 수 있도록

합니다. (법률 제13785호 건축법 일부개정법률 제77조의13제6항 신설)

 

타. 국토교통부장관 등이 건축물 건축에 관한 자료 제출 요청 및 지도-감독의 대상에 관계전문기술자를 추가합니다.(제87조 제1항)

 

파. 건축물 안전영향평가를 하는 자와 건축자재를 점검하는 자의 벌칙 적용 시 공무원으로 간주합니다.(제105조)

 

 

-출처- 건축법규해설

 

 

 

건축법의 중요내용(2017.1.17)

 

 

■  개정이유

 

도로에 인접한 건축물의 건축을 통한 조화로운 도시경관의 창출을 위하여 미관지구 내에 트별가로구역을 지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나 2014년 1월 제도가 도입된 이후 아직까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어 특별가로구역의 활성화를 위하여 지정대상 구역을 경관지구 등으로 확대하고, 국민불편을 초래하는 건축규제 등을 개선하기 위하여 건축허가 시의제처리 대상을 확대하고 건축물대장 기재사항 변경시 지방자치단체의 등기 촉탁을 의무화하는 등 현행제도 운영상 나타난 일부 미비점을 개선-보완하는 한편, 지방자치단체로 부터 노후 단독주택의 유지관리에 필요한 자금의 융자 및 보조를 지원 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려는 것입니다.

 

 

■  주요내용

 

가.  건축위원회 심의신청 시기 탄력 운영(제4조의2제1항)

건축허가 신청 전에 하여야 하는 건축위원회 심의 신청을 건축주의 선택에 따라 건축허가 신청 후에도 신청할 수 있도록 합니다.

 

나.  건축허가 시 의제처리 대상 확대(제11조 제5항 제22호-제23호 신설)

건추허가와 별로도 이행되는 행위허가로 인한 시간적-경제적 부담 감소를 위하여 건축허가 시 의제처리대상에 [수산자원관리법]에 의한 행위허가 및 [초지법]에 따른 전용허가(신고)를 포함합니다.

 

다.  건축허가 처리 협의 간주제 도입(제11조 제6항, 제20조 제6항)

복합민원의 신속한 협의 촉진을 통한 인허가 처리지연 방지 등을 위항 건축물 및 가설건축물 허가처리 등을 위한 관계부서 협의 시 일정기한 내 의견을 제출하지 않는 경우 협의된 것으로 간주합니다.

 

라.  건축허가 후 공사착수기간 연장(제11조 제7항 제1호)

공사의 규모에 따른 공사 준비에 소요기간, 경제적 여건변화에 따른 공사착수 시기가 예측이 불가능한 점을 고려하여 공사착수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연장합니다.

 

마.  건축허가 취소 요건 추가(제11조 제7항 제3호 신설)

경매 등으로 대지 소유권리가 상실된 경우에도 기존의 건축허가를 빌미로 새로운 건축허가 신청을 방해하는 등의 분쟁과 마찰소지를 줄이기 위하여 착공신고 전 경매 등으로 대지 소유권이 상실된 경우 일정 기간이 경과하면 기존 허가를 취소하도록 합니다.

 

바.  대지의 소유-사용권리 상향 입법(제11조 제11항 제3호부터 제5호까지 신설)

대지의 소유권과 사용권을 확보하는 내용은 건축허가를 받으려는 자의 권리와 의무를 제한하는 것으로서 국토교통부령에서 법으로 상향 규정합니다.

 

사.  노후 단독주택의 유지관리를 위한 융자 및 보조(제35조의2 제1항)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사용승인 후 20년 이상 된 단독주택으로서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정하는 건축물에 대하여 유지관리에 필요한 자금의 융자 및 보조를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아.  건축물 대장 기재사항 변경 시 등기촉탁 의무화(제39조 제1항)

건축물대장 기재사항에 변경이 있는 경우 국민펴늬를 위하여 대장 변경 후 허가권자가 의무적으로 관할 등기소에 등기를 촉탁하도록 합니다.

 

자.  특별가로구역 지정 구역 확대(제77조의2 제1항)

특별가로구역의 지정 구역을 경관지구 또는 지구단위계획구역 중 미관유지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구역까지로 확대합니다.

 

 

- 출처 - 건축법규해설

건축기본법 시행령(2016.2.11)

 

 

■  개정이유

 

건축물의 설계, 시공, 유지-관리 등과 관련된 [건축법] 및 그 관계 법령, 행정규칙 및 조례 등을 통합한 한국건축규정을 [건축법]에서 이관하고, 한국건축규정의 개선을 위한 한국건축규정 협의회의 설립 근거를 두는 등의 내용으로 [건축기본법]이 개정(법률 제13470호, 2015.8.11 공포, 2016.2.12 시행)됨에 따라, 한국건축규정의 관리 방법 및 한국건축규정 협의회의 구성, 운영 등 법률에서 위임된 사항과 그 시행에 필요한 사항을 정하려는 것입니다.

 

■  주요내용

 

가.  한국건축규정의 관리(제22조 신설)

중앙행정기관의 장 및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건축물의 설계, 시공, 유지-관리 등과 관련된 [건축법] 및 그 관계법령, 행정규칙 및 조례 등 건축물 관련 규정이 제정-개정 또는 폐지되는 경우에는 그 공포 또는 문서등록 전에 국토교통부장관에게 전자문서로 송부하도록 하고, 국토교통부장관은 제정-개정 또는 폐지되는 건축물 관련 규정을 제때에 한국건축규정에 반영하도록 합니다.

 

나.  한국건축규정 협의회의 구성 및 운영(제23조 신설)

한국건축규정 협의회는 위원장을 포함하여 10명 이상 25명 이내의 위언으로 구성하도록 하고, 협의회의 위원장은 국토교통부 건축정책관으로 하며, 위원은 기획재정부 등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이 추천하는 4급 이상 공무원, 국토교통부의 건축물 관련 규정 업무를 담당하는 4급 이상 공무원 및 시-도지사가 추천하는 건축물 관련 규정업무를 담당하는 4급 이상 공무원 중에서 국토교통부자관이 임명하여 구성하도록 하되, 필요하면 건축에 관한 학식 또는 경험이 풍부한 사람의 의견을 들을 수 있도록 합니다.

 

다.  한국건축규정 내용의 개선-보완 요구(제24조 신설)

국토교통부장관은 한국건축규정 내용의 개선-보완에 대하여 국가건축정책위원회에 심의를 요청하기 전에 미리 관계 기관의 장과 협의를 하도록 하고, 심의를 거치면 심의 완료 후 10일 이내에 그 결과를 관계 기관의 장에게 통보하도록 합니다.

 

 

-출처- 건축법규해설

1. 에게 해 건축과 초기 그리스 건축의 성립 (1-2)

 

 

 

미노아 건축

 

에게 해 는 그리스 동남쪽과 소아시아(지금의 터기) 서쪽 사이의 지역을 일컫습니다. 지중해 가운데에서도 섬이 많은 지역인데 이 일대는 서양 건축의 씨앗이 뿌려진 곳입니다. 이전까지 가장 발달한 문명이었던 오리엔트문명이 서진을 시작해서 그리스 문명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해당합니다. 오리엔트 대륙의 고대 전제 건축에서 그리스 반도의 시민 건축으로 넘어가는 전환기 성격을 갖습니다. 에게 해 건축은 전반기의 미노아 건축과 후반기의 미케네 건축으로 나뉩니다.

 

미노아 건축은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기원전 2000년경부터 기원전 1400년경 사이에 진행된 건축을 말합니다. 크레타 섬은 작은 섬은 아니지만 섬 하나가 독립된 건축사조 이름을 갖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그만큼 당시 크레타 섬 전체의 문명 수준이 높았다는 뜻인데 그 배경을 해양문화의 특징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고대에는 가장 유리한 교통수단이 뱃길인데 크레타는 이를 잘 활용해서 주변 각국과 교류하며 발달한 정보와 문명을 받아들여 해양문화 특유의 유연성으로 잘소화해냈습니다.

 

특히 전쟁보다는 교역과 교류를 문명의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에 소모적 파괴 없이 문명 창출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크레타의 지도자는 전제 군주나 군사령관이 아닌 경제적 조정자에 가까웠고 문명 전체에 자유로운 개인주의가 발달했습니다. 고루 잘 사는 평등한 사회였으며 놀이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그 대신 전쟁문명에서 관찰되는 거석 구조 같은 영웅주의 분위기는 많이 약했습니다. 무덤, 성채, 신전 등 고대 기념비 건축은 거의 없었고 크노소스 궁전이 거의 유일한 대표 건축물로 남아있습니다.

 

 

크노소스궁전과 개인주의 건축의 성립

 

크노소스궁전은 고대 오리엔트 대륙의 전체주의 건축에서 그리스 반도의 서양 개인주의 건축으로 넘어가는 전환기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건축 형식을 기준으로 하면 이집트 초기 신전과 아시리아 왕궁의 연속 구성을 기본으로 삼아 'x-y축' 양방향으로 분화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두 선례와 크노소스궁전 사이의 영향 관계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약한 편이나 시기가 일치하고 건축 구성이 유사성이 있는 점 등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정도 입니다. 차이도 있는데 이들 선례 건축에서 나타나는 축 구성과 대칭 구도가 거의 깨지고 없는 점입니다. 이는 문명의 요체가 전제정치와 전쟁이 아닌 경제 교역과 개인주의 놀이 문화에 기반을 둔 데 따른 현상입니다.

 

크노소스 궁전은 미로 건축의 대표적인 예이기도 해서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 신화의 배경 장소인 '미궁'이라는 단어도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방 약 122미터의 정사각형 윤곽 안에 수백 개의 방이 빼곡하게 들어 있습니다. 중앙에 큰 마당이 중심을 잡고 중간에 부분적으로 일직선 복도가 나 있는 것 말고는 뚜렷한 축과 대칭이 없습니다. 수백 개의 방들도 크기와 형태가 같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각자 고유한 형상을 유지하며 방들이 않은 방향도 제각각입니다.

 

이런 미로다운 특징은 고대의 전제성을 벗어나 인간 개인의 자유의지를 건축 구성에 적극 반영한 예이며 이런 점에서 고대 오리엔트 건축과 구별되는 중요한 분기점을 이룹니다. 빛과 높이 차이를 이용한 복합공간은 역사에서도 획기적인 발전이었습니다. 반 층 높이의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시선이 막혔다 트이기를 반복하고 벌어진 틈 사이로 빛이 들어와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실내는 화려한 벽화로 장식했는데 왕을 칭송하거나 종교적 내용을 그린 고대 오리엔트와 달리 돌고래가 펄떡이는 바닷가 풍경을 그린 점에서 개인주의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완전한 미궁은 아니어서 소 영역별로 특징을 묶을 수도 있습니다. 알현실, 옥좌실, 집무실 등 중요한 공실 영역은 방도 크고 좀 더 정리되어 있으며 행정실은 기능에 맞춰 모여 있고 창고 등 지원 시설은 일직선 복도를 따라 가지런하게 배열되어 있습니다.

 

 

미케네 건축과 메가론의 정착

 

미케네 건축은 기원전 1500년부터 기원전 1200년 사이에 그리스 펠로폰네소스반도의 미케네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부흥했던 건축을 말합니다. 이 반도에 스파르타라는 도시가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일대 민족은 성격이 강하고 호전적이어서 전쟁이 문명의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크레타와 100여 년에 걸친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미노아문명을 종식하고 에게 해를 재패했습니다. 이후 지중해 전체의 지배권을 놓고 바다 건너 트로이와 전쟁을 벌이면서 트로이의 목마와 같은 전설을 낳는 등 지중해 일대 도시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특히 많던 시기였습니다. 이 내용은 호메로스의[오디세이]와 [일리아드]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도시 성채 등을 언급한 내용도 있어서 이 시기 건축은 '호머의 건축'이라고도 합니다. 문명사에서는 청동기 문명 말기에 해당합니다.

 

전쟁 문명답게 건축도 성채와 무덤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성채에서는 성벽 축조술과 공간 구성이 중요합니다. 성벽은 석재를 많이 다듬지 않는 대신 다각형을 유지하면서 크기가 커져서 방어 기능과 거친 이미지는 더 향상되었습니다. '거대 성벽'이라는 뜻의 'cyclopean wall'이라는 단어도 거석을 번쩍 들어 올려 거대한 성벽을 쌓은 외눈박이 거인 싸이클롭스의 신화와 결합해 이 시기의 성벽을 지칭하는 데에서 생긴 말입니다. 외벽만 튼튼해진 것이 아니라 통로와 포대를 집어넣는 등 군사전략과 관계된 구조에서도 중요한 발전이 있었습니다.

 

미케네 성채의 정문 출입구에는 사자 문을 냈는데 이 문은 그리스 신전의 외관에 중요한 선례 역할을 했습니다. 상인방과 좌우인방을 갖추었는데 세 인방 모두 단일 석으로 처리했습니다. 상인방 위에는 삼각 박공을 한 번 더 얹고 그 표면에 돋을새김을 했습니다. 사자 한 쌍이 좌우에서 앞발을 제단 위에 얹고 머리로 기둥을 받치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자는 방어를 상징하는 주술적 의미가 있고 기둥은 왕실이나 왕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문에 맹수 모습을 새기는 것은 오리엔트 군사 건축의 전통에서 온 것입니다. 둘을 합하면 맹수가 왕실을 지키는 것이 되는데 삼각 박공에 주술적 상징물을 새기는 이런 처리는 이후 그리스 신전에서 동일하게 반복되어집니다. 기둥의 주신은 크노소스궁전에 쓰인 것과 비슷한, 완만한 역삼각형 형태인데 주도와 주추의 디테일이 좀 더 섬세하게 발전해 있습니다. 이 기둥 역시 그리스 신전의 오더 양식의 선례가 됩니다.

 

미케네 이외에도 티린스, 파일로스, 아르고스 등이 대표적인 성채였는데 전쟁 도시답게 왕궁과 성벽을 한 몸으로 지었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왕궁을 사방에서 수미터 두께의 완강한 거대 성벽이 에워싸는 구성입니다. 이 속에 들어 있는 왕궁의 공간 구성은 그리스 건축의 직접적 선례가 되었습니다. 특히 공실을 중심으로 한 메가론이라는 공간단위는 그리스 신전의 평면으로 발전하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사자 문과 함께 생각하면 그리스 신전의 입면과 평면의 선례가 세트로 잡히는 셈입니다.

 

메가론은 '포치-전실-방-중앙 영역'의 공간 단위 혹은 구성을 말합니다. 기둥 두 개가 받치는 차양을 덮은 현관을 지나면 전실이 나오고 그 속에 중심 공간인 방이 나오는 구성입니다. 방 한가운데에는 중앙 영역을 두는데 기둥 네 개를 네 귀퉁이에 세우기도 하고 기둥없이 바닥에 높이 차이를 주거나 바닥 처리를 달리하고 소품을 두는 형식으로 구획합니다. 이곳에는 난로나 옥좌를 두는 등 말 그대로 방에서 제일 중요한 중앙 영역의 기능을 합니다.

 

방 하나에서 영역을 구획하고 위계를 둔 것으로 보아 그 출처는 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 때 족장급의 주거와 종교 시설을 겸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실제 고고학적 증거를 봐도 페르시아 등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 지역에서 초창기 구성이 잡힌 다음 발칸반도를 건너 미케네 문명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는 메가론 생활에 대한 기술이 여러 구절 나옵니다. 오디세우스가 자신이 쫓던 자들이 메가론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고 화살을 쏘아 살해한다거나 키르케가 연인을 맞이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곳 등으로 등장합니다.

 

-출처- 한 권으로 읽는 임석재의 서양건축사

 

김중업

 

한국의 유명한 건축가 가운데 한명을 꼽으라면 나는 김중업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올림픽 상징조형물인 평화의 문 등을 설계한 건축가 김중업은 건축가 기수근과 많이 비교되어 집니다. 두 사람의 건축이념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김중업은 그의 스승이었던 프랑스의 유명 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말년에 보여주었었던 조형에 초점을 맞췄던 반면, 김수근은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사랑방이나 마당처럼 눈에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리삶에 여유를 주는 공간에 주목하였습니다. 이들 둘은 모두 여태 한국의 현대건축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지평을 연 거장이라는 점에는 틀림없습니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하였습니다. 1922년 평양에서 5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평양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41년 일본의 요코하마 공업고등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게 됩니다. 그리고 8.15광복 이후에 서울대 공과대학 조교수로 1946년에서 1952년까지 있었습니다. 그당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1952년에 유럽에 진출하여 유명한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연구소에 들어가 그의 밑에서 4년간 수련을 거치고 1956년에는 한국의 홍익대학교로 들어와 건축미술과 교수로 있게 됩니다. 그 해에 그는 김중업 합동건축연구소를 세우고 연구소장이 됩니다. 그리고 또 1956년에서 1965년까지 10년동안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으로 있었습니다.

 

1971년에서 1978년까지는 프랑스 파리 그리고 미국 프로비던스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1972년에는 파리건축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1971년에서 1975년에는 프랑스 문화부의 고문건축가로서도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리고 1976년에는 미국 로드아일랜드 미술대학의 교수로 그리고 하버드 대학교의 객원교수가 되는 등 유럽은 물론 미국에서도 큰 활약을 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 대사관, 미스 반데어로에의 시그램 빌딩에 영감을 얻어서 삼일빌딩을 설계하게 됩니다. 그 밖에도 서강대 본관, 부산대 본관, 서울 동대문운동장역 부근에 있는 서산부인과, 유엔기념공원 정문, 올림픽 상징조형물인 평화의 문등을 설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이 계속 장미빛이지는 않았습니다. 건축가로서 승승장구하던 김중업의 삶에 1970년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와우아파트 붕괴 당시에 옛 광주단지 현재는 성남시인 곳의 무분별한 도시개발정책을 비판하다가 1971년 우리나리에서 강제 추방 당하여 프랑스에서 도피생활을 하여야만 했습니다. 1976년에 영국으로 귀국할 때 까지 그의 도피생활은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1988년 5월에 건강악화로 숨을 거두게 됩니다.

 

최근에 김중업이 설계한 한국건축의 대표작인 주한프랑스대사관의 신축 계획이 발표되었습니다. 얕은 구릉 위 한옥 처마 형태의 콘크리트 지붕으로 되어진 건물 두동이 정차처럼 얹혀 있는 모양을 한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마치 콘크리트 건물인데도 외씨버선 코 닮은 우리 전통의 선이 절묘하게 보여집니다. 도심속 오아시스 마냥 서울 서대문구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는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김수근과 함께 한국 건축역사를 이끌었던 인물의 우리 근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작품입니다. 1980년에 조선일보가 실시하엿던 한국 50년 걸작 건축물 20선에서는 김수근이 설계한 공간 사옥과 함께 1위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사라질 뻔했던 그의 건축물이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어지고 신관까지 증축하여 재탄생합니다. 주한 프랑스 대사관은 대사관 신축계획을 발표합니다. 건물의 설계는 2014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건축전의 황금사자상 수상자인 건축가 조민석과 재불 건축가인 윤태호가 공동 설계를 맡아 2019년 여름까지 완공할 예정입니다.

 

그는 또한 굵직굵직한 그의 작품들 이외에도 서울 곳곳에 단독주택을 남겼습니다. 늘 "집은 아름다워야 하고 정성어린 공간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던 그의 철합이 반영되어진 주택들입니다. 그가 설계한 단독주택들은 작고한지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화두 되어지고 있습니다.

 

서울시 성북구 장위동 일대에 위치한 2층짜리 단독주택이 그 주인공입니다.

 

뉴타운으로 지정되었다 해제된 이 일대에는 2015년 부터 노후주택 개선을 위한 도시재상사업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하얀 담벼락에 둘러싸인 이 주택은 1970년에 준공되어 근 50년 가까이 묵었지만 1986년 건축가 김중업의 손을 거쳐 리모델링을 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인지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서울시와 성북구청이 지난해 9월에 14억 800만원을 주고 매입하기 전까지 사람이 거주하였다고 합니다. 원래는 김중업이 직접 처음부터 설계했다고 사람들은 추측했지만 설계도면을 찾을 수 없어서 그가 리모델링 사실만 확인이 되었습니다. 

 

건축가 김중업의 수석제자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건축그룹 칸의 대표인 곽재환은 말하길 "뼈대는 그 당시의 전형적인 주택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세세한 곳에서 선생님의 건축언어를 찾아볼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온실과 홈통등은 여느 다른사람의 작품에서는 볼수 없는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그 주택은 현재 "김중업 건축문화의 집"으로 이름이 붙여져 매주 금요일 주민들에게 개방되어지고 있습니다. "주민공동시설"로 사용되어지기로 결정이 끝난 상태이며 그의 제자인 곽재환 대효가 차후 그 건축물의 활용방안을 논의 하고 있는 중입니다. 건물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작은 도서관이나 작품홍보관 등으로 활용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 사람들의 의견입니다. 성북구청의 관계자는 "개방디어진 주택을 본 주민들이 집이 너무 아름다워서 보존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많이 내놓고 있어서 내부만 손을 대는 방향으로 윤곽을 잡고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건축가 김중업은 그 밖에도 현재는 카페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연희동 주택, 방배동, 한남동, 장충동 등 서울의 곳곳에 10개 안팎의 주택을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지방자치단체에서 이러한 것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가 이미 일부는 벌써 철거가 끝난것으로 알려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한국 현대건축사에 길이 남을 건축가 김중업의 건축물들이 충분히 보존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도시재생의 한축으로 보존하면서도 살아있는 공간으로 활용할 방침이라고 합니다.

 

모셰 샤프디

 

 

이스라엘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인 그는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쌍용건설이 시공하고 있는 싱가폴 마리나 베이 샌즈호텔의 설계자로도 이름을 알렸습니다.


건축가의 건축물에는 그가 추구하는 가치, 감성, 영감, 디자인 정신 등이 녹아들어져 있습니다. 모셰 샤프디가 말하는 성공적인 건축물은 건축물 자체의 목적, 그리고 그것의 장소에 대한 관념을 내재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길 건축가가 건축물을 설계할때 의도한 목적에 따라 건축물이 설계되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오로지 요구되어지는 프로그램에 맞춰 충족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행위를 수용가능한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건축물이 도시적, 전원생활에 맞춰 설계되어지거나 혹은 그 시대와 관계없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주변환경과의 자연스러움 즉 조화를 이루며 건축물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러한 건축물이 우리 즉 공동체에 어떤식으로 기여하고 또 후세에 길이 남을지 책임의식을 져야한다고 합니다.

 

건축물을 만드는 데 있어서 지리적, 문화적 다양성은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세계 여러 공동체에 들어서 있는 그 장소와 문화에 특화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건축물들은 그것들이 들어서 있는 곳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사회적인 요소들에 의해 영감을 받아 그 지역과 조화를 자연스레 이루게 됩니다.

1938년 이스라엘 하이파 출신인 모세 샤프디는 캐나다로 유학을 가 몬트리올 맥길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졸업후 그는 세계적인 건축가 루이스 칸의 사무실에서 근무를 하게 됩니다. 나중에 그는 몬트리올로 와서 자신의 이름을 건 Moshe Safdie and Associate Inc. 건축사사무소를 개소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1967년 그를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게 된 몬트리올 세계박람회에서 'Habitat 67'을 선보인 이후에 세계 전역에 여러가지 모델의 habitat 주거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됩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 대두되어 지는 것들은 Telfair 예술박물관, 예루살렘 Yad Vashem박물관, 솔트레이크 시티의 공공도서관, 미국 스프링필드에 위치한 연방법원, 인도의 Khalsa 기념관, 싱가폴의 마리나베이샌즈 호텔등 세계적으로 독창적이고도 유명한 그리고 그지역의 랜드마크가 된 것들입니다.

 

해비타트67은 딱 봐도 일반 건축물들과는 다른 무질서 하면서도 하나의 유기물적인 연결을 보여주는 건축물입니다. 큐브의 집합체가 아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룹니다.

 

HABITAT67

클라이언트: 캐나다 국제엑스포67 조직위원회

건축가:Moshe Safdie and David, Barott, Boulva Associated Architects

시공사: Anglin Norcross Quebec, Ltd.

조립용 콘크리트부재 : Francon(1966), Ltd.

프로그램:365조립식모듈, 158세대, 총면적 6,690

건설비용:17,000,000캐나다 달러

완공:1967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아파트 HABITAT67

 

해비타트67은 세계적인 박람회인 캐나다 몬트리올 건축박람회에서 1967년에서 탄생합니다. 그 당시에 캐나다 몬트리올 건축박람회의 모토는 다가오는 새로운 도시주거양식에 걸맞아 떨어지는 실험적인 조립식 주택의 건축양식과 디자인을 추고하였습니다. 이때 마침 샤프디는 박람회의 테마였던 '사람과 세상'을 모티브로 하여 몬트리올 박람회의 종합 건축계획을 맡게 됩니다. 예전 대학시설 논문을 준비할 때 부터 독창적인 디자인을 추구하였던 샤프디는 그 전에는 찾아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아파트의 설계에 들어갑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해비타트 67입니다. 그 당시 모셰 샤프디는 27세의 젊은 나이로 근로자들에게 적합한 저가형 주택인 해비타트가 탄생됩니다. 기존의 계획안은 캐나다 몬트리올 아브르 도심에 1,200세대를 수용할 수 있는 12~25층 규모의 초고층 빌딩을 건축하는 것이 였지만 세계박람회의 주요 주제로 다루기 위해서는 규모를 줄여야 하였기에 해비타트를 12층 높이에 158세대를 수용가능한 규모로 조정하게 되면서 현재의 해비타트 67로 재구성 되어졌습니다.

 

해비타트 67은 각 세대, 코어(엘리베이터), 보행통로가 구조적으로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3차원의 구조로 설계되었습니다. 미리 제작되어진 365개의 세대 즉 유닛들이 높은 장력을 가진 케이블고 고도이 용접기술을 통해 안정적이게 지속적으로 서로 지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하나로 연결된 현수교식의 시스템설계이며 이것은 포스트 텐션 공법이라고 불립니다.

 

각각의 유닛은 가로,세로 겹겹히 겹쳐 있는 천장, 벽, 바닥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방음에 아주 탁월한 기능을 합니다. 각 세대는 마치 공장에서 물건 나오듯이 사전에 공장에서 제작하여 비용 절감과 공기 단축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았습니다. 미리공장에서 유닛을 제작하기 위하여 샤프디는 해비타트67 부지 바로 옆에 공장을 세웠습니다. 공장에서 유닛의 제작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하였습니다. 우선 표준형태의 금형 틀을 제작하고 그 틀에 콘트리트를 부어 굳혀서 유닛 형태를 제작하였습니다. 거기다가 전기 및 배관 설비를 설치하고 바닥은 목조로 마감하였으며, 욕조, 창틀 및 부엌가구를 유닛안에 설치하였습니다. 도시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그리고 획기적인 해비태트67를 선보인 모셰 샤프디는 캐나다 몬트리올 세계 건축박람회를 통해 그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리게 됩니다. 무명 이었던 그를 세상에 알려준 좋은 기회였습니다. 세계인들이 이 해비태트67에 크게 주목을 끌었던 이유는 바로 컨테이너 박스를 응용하여 조립한 큐브모양이었습니다.

 

해비타트67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마치 인공적으로 만든 큐브모양의 산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규격성이 강하게 나타나는 해비타트67은 크기가 조금씩 다른 박스를 쌓아올린 듯한 느낌도 들게 합니다. 또 해비타트67은 그 모양이 다양하고 입체감을 지니고 있어서 건축물을 보는 위치 및 각도에 따라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마치 12층으로서 높은 고층건물이 주는 답답한 보다는 내가 직접 살고 싶게 만드는 친근함이 물씬 풍기는 건축물입니다. 해비타트67은 독창적인 외관 디자인만 가진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쓰기도 편리한 이점들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완벽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고 언덕위세 지어져 있어서 넓은 주변경관도 제공합니다. 또한 그 옆에 세인트 로렌스 강이 아름답게 흐르고 있어 뛰어한 경관을 자아냅니다. 밖의 경관을 보기 편하게 각 유닛의 아래에 위치한 세대는 윗 세대에 정원 테라스를 제공해 주고 있으므로 햇빛 드는 날이면 편안히 일광욕을 즐길수 있는 여유로움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모셰 샤프디는 말하길 도심에 위치해 있지만 타인에게 침해받지 않는 개인적인 삶을 추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선한 공기와 집안에 충분한 햇빛을 받는 것에 초점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웃과 단위세대의 쾌적함 그리고 절제된 공간을 창조하였습니다.

 

각 유닛이 분리되어 있는 동시에 공간의 조화를 이루며 연결이 되어있는 해비타트67의 개별 거주공간은 모든 층이 연결되어있는 보행자용을 갖추고 있는데 그 외관은 전통적인 아파트의 복도를 대체하는 공용 휴게공간으로서의 활용가치가 있습니다. 각 유닛은 3면으로 테라스가 설치되어 있으며 6개의 엘리베이터와 중앙 냉 난방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3개의 승강기 코어는 매 4층마다 정지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승강기는 바로 보행자 통로와 연결되어 각 세대의 입구로의 진입이 편리하도록 되어있습니다. 평면은 56헤베 1베드룸 부터 233헤베인 4베드룸까지 15개의 각기 다른 면적으로 설계되어있습니다. 각각의 유닛은 정원을 향하도록 3방향으로 위치하고 있어서 하나의 큰 정원을 크게 바라볼수 있습니다.

 

해비타트67가 주는 영향력은 무엇일까요?

해비타트67은 모던하면서도 복잡함과 간결함이 동시에 그리고 명확하게 드러나는 건축물입니다. 비록 해비타트67은 몬트리올 세계 건축 박람회의 일환으로 계획된 것이었지만 또 다른 효과로 세인트 로렌스 강을 따라 도시 개발사업을 촉진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해비타트67은 세계적으로 도시에 인구밀도가 늘어나서 삭막하게 살았던 도심 거주자들에게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했습니다. 해비타트67을 보고 우리 현대인들이 박수를 아끼지 않는 것은 그 독창적인 외형 뿐만이 아니라 자연을 즐길수 있는 여유로움을 제안하고 실현했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주거공간과 대비되는 것은 바로 집이라는 것이 단순히 잠을 자기 위한 수면의 공간을 넘어 재충전과 휴식이 가능한 생태학적인 공간구성을 구현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은 해비타트67이 선보여진 이후 테라스가 달린 많은 건축물들이 대중화가 되고 발전하는데에 많은 이바지를 한 대표적인 모델입니다. 캐나다 퀘벡주 문화청에 의하여 역사적인 건물로 랜드마크로 지정된 해비타트67은 무려 40년 전의 건축물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독창적인 건축물임과 동시에 쾌적한 환경,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새로운 공간 구성이라는 이전의 공동주택에서 보여주지 못한 것들을 보여준 건축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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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코르뷔지에

(1887~1965)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로 현대 건축의 모든 면에서 기초를 다졌다고 보아도 될 정도입니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프랑스를 대표하는 천재 건축가입니다.

그의 다른 수식은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었던 건축가 입니다.

 

그의 일생

그의 본명은 샤를 에두아르 쟌레 그리 입니다. 1887년 스위서 서북부의 랴쇼드퐁에서 태어난 그는 중산층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피아노 선생님이었습니다. 어머님의 가르침은 르코르뷔지에를 세계적인 건축가로 발돋움 하는데 초석을 두었습니다. 그것은 "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해 내라"였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매사에 임했습니다. 한 예로 그가 13세 일때 라쇼드퐁의 미술학교에 응시했었습니다. 과제 작품제작 마감기한으로 3일의 기간이 주어졌습니다만 그는 그 첫날 저녁에 자신의 작품을 제출하였습니다. 미술학교에서 그의 스승은 화가가 되려는 그에게 건축을 하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17세의 어린나이에 자신의 첫 주택을 설계하게 됩니다. 하지만 르코르뷔지에가 어른이 되었을때는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이유는 그가 어린시절에는 스위스 전통양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그가 추구하는 모더니즘과는 정반대인 스위스 전통주택을 설계하였기 때문입니다.  17세 이후 19세 까지 그는 총 7개의 건축물을 설계를 했지만 전부 고전적인 모더니즘과는 정 반대인 고전방식의 건축물 이었기 때문에 유명한 작품들은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파리에서 그에게 영감을 준 스승을 만나게 되는게 그사람은 바로 철근 콘크리트(즉 모더니즘의 시작)의 선구자로 불리우는 오귀스트 페레입니다.  르코르뷔지에는 오귀스트 페레에게 최신 재료 즉 철근 콘크리트와 기술, 구조를 배우고 피터 베렌스의 사무실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됩니다. 건축사사무실엣 일하면서 그는 근대 건축에서 빼놓을 수없는 거장인 미스 반 데어로에(커튼월로 유명한 사람)과 발터 그로우 피우스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또 그의 건축정신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동방으로의 여행이었습니다. 베를린에서 출발하여 프라하, 빈, 부다페스트, 콘스탄티노플, 아테네, 폼페이 등을 여행하게 됩니다. 여행을 하면서 그는 위대한 고건축물들을 직접 보고 경험을 쌓습니다. 소피아 대성당과 모스트에서는 단순 기하학이 지니고 있는 강렬한 힘을 느꼈고 발칸반도의 민중예술과 토속 건축물의 자연스러움에 감탄하게 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통해 그는 기존에 그가 항상 보아왔던 유럽식 장식 예술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볼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고향인 스위스로 돌아온 르코르뷔지에는 현대적 기술(철근 콘크리트 공법)을 사용한 이론적인 건축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완성되는 것이 지금 건축을 대표하는 시스템입니다. 돔-이노 시스템으로 불리어지는 이 아이디어는 최소한의 숫자의 얇은 철근 콘크리트 기둥들이 모서리에서 지지하는 단순한 구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구조는 건축트랜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한 이유는 기존의 유럽건축물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럽건축물과 가장 큰 차이는 벽이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까지의 유럽건축은 벽으로 하중을 견뎌내었기 때문에 두꺼운 벽이 많이 필요하였고 창문도 엄청나게 작게, 혹은 위아래로 길게 내어야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스템이 있기에 우리는 벽도 창문도 지붕도 바닥도 마음대로 할수 있었습니다.

근대 건축의 5원칙

1. 철근 콘크리트기둥인 필로티로 무게를 지탱하였고 건축 구조의 대부분을 땅에서 들어올려 지표면을 자유롭게 활용할수 있도록 합니다.

2. 건축가가 원하는 대로 설계할 수 있는 구조기능을 갖지 않는 벽체를 두어 자유로운 입면이 가능하도록 합니다.

3. 채광효과가 뛰어난 길다란 "띠 유리창"을 두었습니다.

4. 기중이 있기에 지지벽이 필요 없어 바닥 공간이 방들로 자유롭게 배열된 "열린 평면"을 만듭니다.

5. 건물이 서기 전에 있었던 조경을 대체하기 위해 건물의 옥상에 옥상족경을 만듭니다.

그는 순수주의를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시트로앙 주택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이 이름은 프랑스 자동차 시트로엥의 말장난 으로서, 건축물 또한 자동차 찍어 만들어 내듯이 현대 산업 방식을 채택하여 건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공장 제작 부품을 이용하고 규격화 하면 효율적으로 양질의 주택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 이었습니다. 집 또한 자동차 처럼 기능에 충실하고 사용하기 편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건축물을 첨단 기술로 탄생한 자동차와 같은 기계와 같이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명언을 통해 그의 이러한 생각을 잘 드러냅니다. "A house is a machine for living in" 집은 살기위한 하나의 기계이다. 

그는 유럽의 도시를 바꿔놓았습니다. 당시 유럽의 도시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공간이 협소하여 좁고 열약한 주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리는 너무 더럽고 혼잡하였습니다. 이러한 요인은 바로 다름아닌 산업혁명으로 도시로 인구가 급격히 몰렸기 때문입니다. 좁은 지역으로의 인구는 급증하지만 건물들은 중세의 것들이어서 그는 유럽의 도시를 바꿔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르코르뷔지에의 도시계획은 교통수단으로 서의 자동차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자동차가 인간을 거리의 제약에서 자유롭게 한다는 생각으로 교통체계를 중요히 여기고 주거지역을 멀리 떨어뜨려 공간이 넓은 쾌적한 삶을 꿈꿨습니다. 당시에 유럽의 도시들은 이미 중세와 근대의 건물들로 넘쳐 났기 때문에 이러한 그의 도시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넓은 땅을 지닌 미국은 이러한 르코르뷔지에의 계획안에 맣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또한 개발도상국으로서 1970년대이후 만든 한국의 계획도시, 신도시 들은 이러한 르코르뷔지에의 개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차선을 중심으로 주거지역, 업무지역을 나누었으며 많은 녹지를 두는 것을 원칙으로 도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것은 도시 재개발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역시 이러한 계획안에 영향을 받은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정하기 힘들것입니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이러한 도시의 계획안은 인구가 집중된 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주택부족을 해소하여 주고 쾌적한 도시생활이 가능하도록 하였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도 야기 시킵니다. 사람보다 자동차가 우선시 되고, 업무지구는 밤에 모두 집에 가느라 도로가 정체 되고 너무나 넓고 넓은 녹지는 도시를 나누게 됩니다. 

르코르뷔지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가 지나치게 기능과 기술만을 바라봄으로써 인간과 도시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과 불확실성을 무시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원래 모더니즘 자체가 받는 비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은 다시 한번 변화를 가집니다. 1930년대를 기점으로 하여 르코르뷔지에는 전기와 후기로 나뉩니다. 그러한 이유는 그만큼 그가 같은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전혀 다른 건축을 선보입니다. 그가 후기에 설계한 롱샹성당을 보면 알수있습니다. 그동안 만들어 내었던 표준적이고 안정적이고 규격화 되어진 건축이 아닌, 대지의 특별한 조건 아래 형성된 특별한 모양의 건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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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반 데어로에

(1886~1969)

그는 우리주변에 볼수 있는 커다란 커튼월(철골과 유리벽을 한 구조)을 한 높은 빌딩들이 도시에 자리잡게 한 장본인입니다.

현대 건축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거장입니다.

 

그의 일생

그는 독일 출신의 근대 건축가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석공이었며 그러한 영향 탓에  그는 어릴 적 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돌을 만졌습니다. 흥미롭게도 미스 반 데어로에는 한번도 건축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일본의 유명 건축가 노출콘크리트로도 유명한 안도 다다오 그리고 그에게 영감을 준 르코르뷔지에 와 평행선을 긋는 듯 합니다. 베를린으로 이사를 온 뒤 근대 건축의 초창기 거장인 페터 베렌스의 스튜디오에서 건축일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정규 교육이나 학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곧 재능을 인정받고 독립적으로 건축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곳에서 철골과 유리에 매료된 그는 산업주의와 신고전주의를 통합하게 됩니다. 산업의 재료와 즉 유리, 철과 고전주의의 비례와 형태에 동시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의 본명은 원래 '마리아 루트비히 미하엘 미스'였는데 자신의 이름이 촌스럽다고 항상 여겼던 그는 새로운 디자인 이론과 독일의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어머니의 성인 '반 데어 로에'와 아버지의 성을 합하여 지금의 이름인 '미스 반 데어로에'로 개명을 합니다.

그렇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독일과 미국에서 살았던 그는 건축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바로 다름아닌 모더니즘입니다. 독일에서는 바우하우스의 학장으로서, 그리고 미국에서는 일리노이 공과대학교의 학장으로서 재직하여 모더니즘 건축의 중심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지금도 화두가 되고 있는 미니멀리즘을 이끌었던 장본인입니다. 이것은 그의 명언에서 알아 볼 수 있습니다. "Less is More" 더 적은 것이 더 풍요로운 것이다. 이 말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개인적인 모토 일 뿐 아니라, 20세기 초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가치를 찾고자 했던 근대 근축가들의 이상과 맞아 떨어졌습니다. 산업화가 진행되었던 19세기 말과 20세기초 에는 기존의 역사적인 건물의 외관과 장식을 흉내내는 예전에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관습적인 건축에 대한 반항운동이 일어 났던 시기 입니다. 시대는 변하여 가는데 건축은 그대로 머물러 있고 오히려 퇴행하는 듯하여 이러한 운동이 벌어졌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1920년대에 와서 국제주의 형식이라는 사조로 통합되어 바야흐로 현대 건축의 새 장을 열게 됩니다. 그 중심에는 바로 미스 반 데어로에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소재의 새로운 변화였습니다. 유리와 철 이라는 재료의 발견과 기술의 혁신이었습니다. 바로 커튼월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가치는 아방가르드 예술가와 건축가들로 하여금 새로운 비전을 그려내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의 작품

그는 날 때부터 모더니스트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초기 건축물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스타일에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대쵸적인 예가 펄스 하우스와 후르비히 하우스 입니다. 미스 반 데어로에는 모던한 스타일로 그 건축물들을 지을려고 하였지만 건축주의 강력한 주장에 못이겨 전통적인 박공지붕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는 건축주의 의견도 반영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단순하면서도 비례감이 살아 있는 건축물을 만들어서 그의 개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처음으로 그를 세상에 알리게된 주요 작품은 완공된 것은 아니지만 그가 1922년 프리드리히가 오피스 빌딩 공모전에서 제안한 계획안 이었습니다. 그 건축물은 20층 규모의 빛나는 글라스 타워였습니다. 그 당시에 유리와 철이라는 소재는 생소하여 보는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지금은 유리와 철이 커튼월이 보편적인 형태의 초고층 빌딩이지만 그당시에는 상당히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1927년에 독일 슈투트가르트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를 설계 하였을때도 사람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꽉차고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것이었습니다. 투명하고 현대적인 조형을 가진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새로운 주거형태 였습니다. 그 당시에 화려한 주택들에 비하면 바이센 호프 주거단지는 평지붕에 박스 건물이어서 초라해 보였을 것이지만 단순한 형태 안에서 최대한 동선을 줄이고 방을 기능적으로 배치하여 현대적인 삶의 방식을 담으려 그는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1920년대 부터 공간과 기능을 분리하여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점은 나중에 자신의 건축에서 중심 주제로 삼은 '무한정 공간'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바로 바르셀로나 파빌리온과 투겐트하트 주택, 그리고 수직타워의 안정적인 비례와 질서를 보여준 시그램 빌딩이다. 현대도시의 경관을 만들어 낸 시그램 빌딩은 많은 추종자와 반대자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건물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수 있는 전형적인 고층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중에 그의 제자들은 무수한 시그램 빌딩 복제품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복제품들은 미스 반 데어로에가 만들어낸 시그램 빌딩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바로 디테일에 있습니다. 그는 당시 법규가 허용하는 많은 면적을 포기하고 거리에서 27미터나 뒤로 물러난 곳에 빌딩을 위치시켰습니다. 그러한 결과 건물의 앞에는 많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광장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앞에 광장에 사용한 대리석을 로비 안까지 사용하여 마치 광장이 건물까지 연결된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건물전체의 통일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건물앞 광장은 마치 빽빽한 고층건물들이 들어서있는 사막한 가운데에 있는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시그램 빌딩을 모델로 삼은 건물이 있습니다만, (청계2가 사거리에 있는 삼일빌딩) 그 건물 후면부에 보기 싫게 붙어 있는 회색의 콘트리트 기둥과 차가 주차하여 숨막히는 듯한 비좁은 광장등 때문에 아쉬움을 남깁니다.

미스 반 데어로에 말년의 대표작은 베를린 신 국립미술관입니다. 디테일의 완성도 와 개념의 명료성에 초점을 둔 작품입니다. 관절염이 있었지만 병원에서도 도면을 검토할 정도로 그는 국립미술관에 큰 애정을 쏟았습니다. 그는 항상 그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베를린에 위대한 미술관을 짓는 것을 꿈꿔왔었기에 그러한 동기부여로 미술관 자체가 위대한 전시물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완성된 베를린 신 국립미술관의 포디움은 예술품을 지지하는 전시대와 같은 역할을 하며 유리로만 둘어싸인 내부는 안과 밖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지분을 떠받치는 십자 모양의 철골 기둥 8개는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 지는데, 이런 섬세한 디테일들이 모여모여 위대한 하나의 예술 작품을 이루게 됩니다.

그의 건축은 절제를 통하여 공간이라는 건축의 본질과 시대정신 그리고 그 시대의 산업재료(유리,철)로 구축한 진정성으로 건축의 의미를 드러내려 하였으며, 시대를 꿰뚫어보는 절제의 미학 미니멀리즘을 지님으로서 현대인들의 감성을 자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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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다다오


(1941년~현재)

그는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입니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하였습니다. 그는 마치 한 편의 소설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뜻대로 되는 것은 별로 없다. 시도한 건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회를 잡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고 그리고 그 기회를 잡은 뒤에는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건축가가 되기 이전에 치열한 삶을 살았습니다. 트럭운전사도 하였고 권투선수로서의 삶을 살았었고 공사판에 나와 노역도 마다 하지 않았습니다.


1941년 일본 오사카 시에서 태어나서, 후리츠 죠토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62년부터 1969년 까지 세계각지를 여행하며 독학으로 건축을 배웠습니다. 특히 그가 흥미를 보였던 것은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이었습니다. 1969년 안도 타다오 건축연구소를 설립하여 지금의 그를 있게 만들어준 "스미요시의 연립주택"으로 일본 건축 학회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노출콘크리트 기법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미술관, 공공건물, 교회나 절 등을 많이 지으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안도 다다오가 르코르뷔지에를 얼마나 존경하는지는 그가 키우던 개의 이름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그가 키웠던 개의 이름은 바로 '르코르뷔지에'였던 것입니다. 그 개가 죽고 또 다른 개를 키웠지만 그 개의 이름 역시 '르코르뷔지에'이었습니다. 안도를 건축의 길로 이끈 사람이 바로 르코르뷔지에 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안도 다다오가 그을 얼마나 존경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안도 다다오가 말하는 르코르뷔지에는 건축가이면서 화가이며 조각가이고 작가이며 사상가라고 일컫습니다. 그의 인터뷰에서 그는 르코르뷔지에를 "아마 500년에 한 번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의 건축가와 미켈란젤로 다음에 르코르뷔지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단순히 건축가라고 말하기 어려울만큼 그들은 위대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안도다다오는 어려웠던 집안 형편상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비록 그는 정식으로 건축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에 푹 빠져 그의 작품집을 헌책방에서 발견하여 책속의 드로잉을 수없이 따라 그리는 것으로 건축가의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말하길 그는 르코르뷔지에의 건축도 존경하지만 그의 삶과 정신을 흠모한다고 말합니다. "르코르뷔지에 처럼 저는 건축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습니다. 대학에도 가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무작정 책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건축물을 보러 세계로 다녔습니다. 그 과정에서 건축이 점점 저의 몸안으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세상에는 엘리트도 많이 있지만 엘리트가 아닌 사람도 많이 존재합니다. 더군다나 일본은 학력사회 이기 때문에 그 격차를 잡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실인 기회는 반드시 우리에게 옵니다. 그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일에 관해 계속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집중하여 계속 생각한다면 자신에게 오는 기회를 반드시 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잡았다면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합니다."

안도가 말하는 르코르뷔지에는 프랑스에서 살았지만 스위스 태생이고, 건축학을 정식으로 공부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의지만으로 대규모 파리도시계획을 비롯해 평생 동안 전 세계에서 많은 계획을 하였지만 안타깝게 모두 실현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의 사망 당시에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었던 안드레 말로는 장례식 조사에서 르코르뷔지에를 일컫길 "그토록 오랫동안, 끈질기게 사람들에게 숱한 모역을 당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로지 그는 인간과 건축만을 위하여 계속 싸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안도가 바라본 르코르뷔지에의 인생은 자신과 같다고 느꼈습니다. 안도 다다오는 항상 힘들때 마다 르코르뷔지에가 실패하였던 일들을 뒤로한체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였던 모습이 늘 귀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만나보지 못하였던 책으로만 보던 르코르뷔지에의 건축물을 실제로 보기 위하여 그는 푼돈을 열심히 모아 24세의 젊은 나이게 프랑스에 가서 롱샹 성당을 보았던 감동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는 막상 롱샹성당에 도착하였는데 사방에서 무참히 쏟아져 내리는 빛을 견디지 못해 1시간도 채 안되 밖으로 뛰쳐 나오다 싶이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그는 건축에서 빛을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중요한가를 뼈져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설계작품으로는 고베(神戶)의 로코 하우징 II(1993)과 오사카의 산토리 박물관(1994), 가고시마대학의 이나모리(稻盛)회관(1994), 오사카의 맥스레이(Maxray) 본사 사옥(1994), 나라(奈良)의 고조문화박물관(1995), 오카야마(岡山)의 나리와 미술관(1994)과 효고(兵庫)의 초등학교 등이 있습니다. 1985년 교토(京都) Times I(1985), Times II(1991), 1988년에 지은 오사카의 갤러리아 아카와 1989년에 건설된 '빛의 교회' 는 그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연과의 조화가 잘 나타난 건축물로는 치카츠 아스카 역사박물관, 구마모토현의 장식고분관, 그리고 히메지의 문학관, 물의 교회, 물의 절 등이 있다. 2007, 2008년 완공 예정인 상하이 디자인 센터(중국)의 설계를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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